< 펜 역으로 가는 내내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짓는 그 미소를 짓고 있었어. 그 미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네. 그녀의 특징, 그녀의 역사, 심지어 그녀의 고통도 존재하지 않았어. 그녀란 존재는 그 얼굴에 펼쳐진 미소가 전부였네. 심지어 그녀는 혼자도 아니었어. 혼자로 존재할 만한 그 무엇도 없었지. 그녀가 일생 동안 도망치려고 발버둥쳤던 수치스러운 배경이 뭐였는지 몰라도, 거기서 이런 여자가 생겨난 거야. 인생 자체가 도망쳐버린 인간. >
<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를 이데올로기의 손에 헌납하기로 작정하면, 개인적인 건 몽땅 거품처럼 빠져나가고 이데올로기에 유용한 것만 남는다는 것. >
< 나중에 그 아내는 마음이 내키면(아마 이브는 그랬을 수도 있고 안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항의할 수도 있겠지. ‘아니, 그건 아니에요. 꼭 그렇진 않았어요. 당신들은 이해 못해요. 그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에겐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나에겐 이런 사람이기도 하고, 저런 사람이기도 해요.’ 나중에 이브 같은 밀고자는 그를 해괴하게 왜곡시킨 기사들을 읽고는, 자기가 말한 것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걸 깨달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기차는 떠나버린 후야. 그때쯤이면 이데올로기는 그녀에게 신경도 안 써. 더는 이용가치가 없으니까.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대꾸해. ‘이거? 저거? 우리가 뭐하러 그런 거에 신경써야 하는데? 우리가 왜 그 딸한테 신경써야 하는데? 그 아인 살아 있는 비곗덩어리에 불과해. 더 들먹거리지 마시오. 우리가 당신한테 필요로 하는 건 정의로운 대의를 진정시킬 수 있는 것뿐이야. 또 다른 공산주의자를 처형해야지! 또 다른 반역자를!’ >
< 그리고 몰아닥친 배신의 물결. 생존, 흥분, 출세, 이상주의 등등, 이유가 뭐였든 모든 사람이 그 물결에 휩쓸렸지. 상대에게 입힐 수 있는 피해, 가할 수 있는 고통을 위해. 그 속에 숨겨진 잔인함을 위해. 그 속에 숨겨진 쾌감을 위해. 잠재된 힘을 입증하는 쾌감. 남을 지배하고, 적을 파괴하는 쾌감. 그들을 불시에 덮치는 거지. 그게 배신의 기쁨 아닌가? 누군가를 속이는 쾌감. 그건 그들이 안겨준 열등감, 그들에게 무시당한 느낌, 그들과의 관계에서 느낀 좌절감을 되갚는 방법이야. 내가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 자체가 내겐 굴욕이지. 그래서 그들에게 당연한 벌을 내리는 거야. >
< 영웅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네. 평범한 삶이란 매일 수천 가지를 놓고 벌여야 하는 타협의 연속이지.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은 고문을 견디는 것은 고사하고, 별안간 타협을 일체 거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네.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거든. >
< 어떤 사람은 고문을 당해 약해지기까지 육 개월이 걸리지만,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요리하기가 아주 좋다네. 이미 약한 사람이니까. 굴복하는 것밖에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서명해’라고 말만 하면 즉시 서명하지. 너무 순식간에 끝나버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그게 배신인지도 몰라. 하라는 대로 했으니까 괜찮겠거니 하지. 상황이 심각해졌을 때는 이미 늦은 뒤야. 이미 배신했으니까. >
<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 중에서 - 필립 로스 (문학동네)
어디라고 말하고싶지는 않고..한 문단 매우 맘에 드는군. 마치..끈덕지게 내게 들러붙어 날 괴롭히던 모기를 잡아 짓이겼을 때 나오는 피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