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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누군가를 향해 외치는 호소의 울림이

무딘 냉소와 함께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을 때

분명 그의 세계는 무너진다.


1.

선생님은 말했다

사람은 펜과 똑같아

새하얀 종이에 그어보기 전까지는 그 안에

무슨 색의 잉크가 들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너의 삶을

너의 색을 보여주렴

그치만요 선생님

제겐 도화지가 없어요


2.

너는 잿빛 세상을 걸어본 적 있니

커터칼 날 5cm와 그보다 좀 더 긴

불신감을 겨누고 한숨을 뱉었다

내가 닿고 있다면 네가 내 도화지가 되어줄래

대답 대신 뒷통수에 불꽃이 터지고

눈을 떠보니 아마 그때

내 팔찌는 은색이었던 것 같은데

왜 나의 도화지가 되어주지 않았니

나의 색은


3.

무너진 세상의 끝에 누워

팔찌가 없는 손목에서 흐른 건

이제야 보이는 선명한 색

아아 선생님 보세요

제 안의 잉크는 새빨간 색이었어요.


4.

빨간 색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