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인스포팅

 

 

통리역에 서 있으니
아무도 타지 않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간이역에
춤추는 빨간 구두 벗겨지지 않아 기찻길에 달려든
이제는 은퇴한 그 여배우가 된 기분이다

급행열차가 지나갈 시간이면
파랑주의보에 떠는 고깃배처럼 간이역엔 소름이 돋고
석탄을 가득 뱉은 산들마저 진땀을 흘렸다

간이역도 말을 한다는 거
열이 나서 땀 흘리며 잠에서 깬다는 거
깊은 밤 철교 위로 산책도 한다는 거
어두운 나무 밑에 스러져 울기도 한다는 거
술집 구석자리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한다는 거
전화를 해도 받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거
맥주를 마실 땐 목을 젖히고 발 받침대에 발을 올린다는 거
약 먹고 죽으려 하면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거

제 결혼역에 내려주실래요?
아니면 해마다 생일역에 안부라도
그것도 싫으시다면 내 장례역에라도 참석해주실 수 있을는지
여기서도 휴대폰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수백만 마리의 곤충 떼가 한꺼번에 지나가는 소리로 급행열차 또 지나가고
자고가고 울고가고 커피마시고가고 술마시고가고
심지어는 아기 버리는 미혼모처럼 기차 몇 량을 버리고 가고
그러다 같이 가! 부르면 아무도 돌아서지 않는다는 거

서랍이 많은 티켓 박스 속에서
서울로 강릉으로 가는 표들은 누렇게 녹슬어 있고
한 통의 편지는 오지 않지만 우편함은 매달려 있고
나는 또 무한정 키가 커버린 첼로처럼 푸르르 떨며 철길을 내다보고
화물기차가 내 늘어진 현을 당겼다 놓고 가버리면
내 얼굴엔 찬 별이 떠서 얼굴이 저려온다는 거
다시는 아무도 내게 머물게 하지 않으리
나는 쇠줄 두른 손목시계의 나사를 하나하나 풀듯
숱한 그림자 타다 만 시체처럼 누워 있는
기찻길의 침목을 하나하나 눈동자 속으로 삼킨다는 거

 


 

 


  자신의 시집 자서에 밝혔듯 김혜순은 시를 ‘말씀’이 아니라 ‘말하는 형식’이라고 여긴다. 말씀은 시의 언어가 아니라는 얘기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말씀’은 시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말하는 형식’에 주목한다. 내가 사물이 되었다가, 그 사물이 또 다른 사물의 일부가 되었다가, 내가 느낀 바를 사물이 발음했다가, 사물이 내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하는 기묘한 형식이다.


  아니, 이것은 어쩌면 시가 ‘말씀’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려는 몸부림인지 모른다. 어찌 하면 언어를 재료로 삼으면서도 그 속성인 ‘말씀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을까, 김혜순은 한동안 고민한 듯하다. 하여 그는 ‘도를 도라고 말하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호접지몽과도 같은 시적 세계관을 형상화한다. 


  간이역에 앉아 약간 들뜬 기분의 화자는 소름이 돋으며 진땀을 흘리면서 이제 막 플랫폼에 들어서는 기차나 석탄을 품은 산이 되어보기로 한다. 까짓거 간이역이 되어보기도 한다. 내친 김에 그녀는 간이역의 몸 안으로 들어가 본다. 그래서 말을 하고 잠을 깨보고 산책도 하면서 간이역의 속내를 죄다 털어놓는다. 해발 600미터 외딴 곳에서 대체 몇 년째 청승맞게 쭈그려 앉아 있는 이 간이역, 누가 이 여자를,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잊혀지는 여자, 늙어가는 여자로 간이역은 외로이 서 있다. 이제 급행열차는 서주지도 않는 나이. 그래서 간이역은 더욱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하고 여자는 기차가 지나쳐도 일부러 못 본 척 한다. “빼액~” 벨소리가 울린다고 내가 받을 줄 알어? 새침한 표정을 짓기도 하는 간이역.


  이 시에서도 어김없이 화자는 자기 역사의 여러 번지수들을 호출한다. 그러나 이곳이 간이역이므로 그 역사는 결혼역, 생일역, 장례역 분장을 하고 온다. 돌아보면, 간이역을 쌩~ 하고 지나치는 급행열차처럼 그녀를 스쳐간(“자고가고 울고가고 커피마시고가고 술마시고가고”) 이들이 있다. 기차가 그런 것처럼 그들은 결코 돌아보지 않았겠지. 하여 젊은 여자는 울고불고 했겠지.


  이런저런 추억에 잠겨 있던 화자는 “화물 기차”의 엔진음과 함께 현실로 돌아온다. 흐릿했던 화면에 초점이 잡히면서 실루엣은 서서히 형상을 갖추어간다. “그림자 타다 만 시체” 같은 “침목”이 화자의 시야에 들어온다.


  어릴 적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천 외갓집에 다녀오던 기억이 '빼엑' 소리를 내며 발차하면, 세월의 침목을 어렴풋하게 밟아 가는 이미지들..백산역, 철암역, 석포역, 현동역의 풍경들이 편린으로 스친다. 그러고 보면 내 삶에도 많은 역들이 있었다. 떠올리기만 하면 오래 오래 쉬어가는 역도 있고 언제부턴가 정차하지 않고 속도만 겨우 줄인 채 지나쳐 버리는 간이역 같은 순간들도 있다. 기억의 열차가 달리지 않을 때나 다른 노선을 달리고 있을 때 그 많은 역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자리를 지키고는 있을까. 


  어쩌면 추억이란 것 기억이란 것은 도저히 내려볼 수 없는 간이역 같은 건지도 모른다. 언제나 차창 밖의 풍경인 채로 남아 있는.. 

  통리역은 현재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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