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read 라캉 : 라캉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 라캉 세미나를 시작하며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해왔다.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의 정확한 마르크스주의적 맥락을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이 말을 해석과 실천의 단순한 대립 구도 속에서―가령 골방에 틀어박혀 책만 읽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광장으로 나가 노동자 투쟁에 참여해야한다는 식의―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때 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세계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필요성일 것이다. 핵심은 세계에 대한 해석과 그 속에서의 실천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의 해석은 그에 따르는 실천을 단순히 가능하게 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정확히,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실천을 이미 전제하며 그것을 담보한다고 말해야 한다. 루카치가 지적했듯, “어떤 노동자가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해있다고 간주하기만 하면’ 그 의식은 그의 현실을 변화시킨다. 즉 그는 다르게 행동한다”. 만약 이 말이 와닿지 않는다면 저 진술을 반대로 뒤집어 보기만 하면 된다. 즉 자신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해있다고 간주하지 못하는, 세계를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노동자가 무슨 수로 노동자 투쟁에 참여할 생각을 하겠는가? 게다가 여하간 “우리”는 글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저 말을 단순히 (실천과 대립되는) 해석의 가치를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기에는, 이미 마르크스가 철학사상 가장 위대한 해석가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또한 저 말을 굳이 마르크스주의에 한정해 해석해야할 이유 역시 하나도 없다. 세계 멸망의 하루 전날 진정으로 스피노자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겠는가? 두 말할 것 없이 사과를 (물론 중요한 것은 세계의 필연성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그의 내적 평온함 속에서)심지 않겠는가? 이제 우리가 라캉 세미나를 시작하기에 앞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식과 행동 사이의 저 뗄래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이다. 내 생각에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배운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진지하게 어떤 사상을 대한다는 건 바로 자신이 그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겠다는 것이다. 계속해 말했듯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행위이다. 따라서 어떤 사태에 라캉의 이론을 적용한다는 말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적용은 나에게 하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현실의 사건이나, 혹은 문학작품의 사건을 라캉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건 그가 라캉주의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경우 그가 아무리 라캉 이론의 ‘난해한’ 명제와 도식 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는 근본적 의미에서 라캉을 공부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입문서로써 <How to read 라캉>의 가치와, 더 넓게는 라캉주의자로서 지젝의 탁월함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지젝이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우리가 라캉의 이론과 개념들이 분명한 현실이란 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반대로 어떻게 라캉주의가 현실에 대한 하나의 관점에 ‘불과한지’에 대한 것이다. 지젝은 대타자란 것이 근본적으로 특정한 존재라기보다 하나의 효과이자 현상일 뿐이란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따라서 ‘대타자가 존재한다는 근거가 있느냐’와 같은 질문은 전적으로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대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행동의 어떤 부분이 라캉으로 하여금 대타자라는 개념을 상정하게 했는가’, 혹은 이와 반대로 ‘대타자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사고의 틀 속에서 인간 행동의 어떤 부분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는가’와 같은 형식을 취해야 한다. 지젝이 라캉을 설명하며 끊임없이 대중문화를 참조하는 것도 그저 재미와 가독성을 위한 것만이 결코 아니다. 그는 그러한 참조를 통해 대중문화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표현해온, 행동 이면의 본질적인 지점(이라고 여겨져 온 것)을 역시 정신분석과 라캉이 겨냥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고대 비극으로부터 현대 할리우드 영화에까지 이르는 시기적으로 광범위한 참조는 라캉주의의 이론이 (비록 ‘언제나’라는 개념은 사후적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정신분석 스스로가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런 것임을 명심하는 한에서)인간이 ‘언제나’ 그렇게 행동해왔던 방식, 인간의 보편적이고 근본적인 부분을 설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How to read 라캉>을 라캉 이론의 ‘적용’(일반적으로 이론 학습의 마지막 단계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지젝은 정확히 그 반대의 것을, 현실을 바탕으로 이론적 체계화에 이르는 라캉 이론의 ‘출발’을 다루고 있다. 지젝은 ‘입문서임에도 불구하고’ 라캉 이론의 기본적 용어와 그 유명한 도식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건너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입문서이기 때문에’ 용어와 도식들에 대해 아직 상세히 기술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라캉 자신이 그러했겠듯이, 우리에게 역시 세계에 대한 특정한 관점을 먼저 획득하고, 그것에 동의하고 나서 더 정교한 체계화를 위해 공식과 도식들에 접근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믿는다.


  한편으로 우리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와 같은 ‘새로운 관점’을 얻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우리가 얼마나 관습적이고 자동적인 인식에 젖어 있으며 그것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다. 시를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과에 대한 ‘시’ 한 편을 써내지 못한다는 것을 단순히 우리가 사과에 대해 그 어떤 새로운 관점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뿐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시를 쓰는 연습을 새로운 관점을 획득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말해 본다면, 마찬가지로 새로운(라캉주의적) 관점을 획득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단순히 지식의 습득이란 형태를 취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우리가 앞으로 기울여야할 노력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공부라기보다 차라리 훈련에 더 가까운 무엇이 되어야할지도 모른다.




학교 문학 동아리에서 하는 라캉 세미나 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