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란무엇인가 혹은 맛있는 굴튀김 먹는 법-

소설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대체로 이런 대답을 한다. \"소설가란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내리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라고.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판단은 왜 조금만 내릴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쪽은 늘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데 있다.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 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않고 자기가 매사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

소설가가 좋은 이야기을 만들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지극히 간단히 말하자면, 결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그저 정성껏 계속해서 가설을 쌓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가설들을, 마치 잠든 고양이를 안아들 때처럼, 살그머니 들어올려 이야기라는 아담한 광장 한가운데에 하나씩 하나씩 쌓아올린다. 얼마나 자연스럽고 솜씨 좋게 쌓을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역량이 된다.

독자는 그 가설의 집적을-물론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을 때 얘기지만-일단 자기 안에 받아들이고, 자기 질서에 따라 다시 한번 개인적으로 알기 쉬운 형태로 배열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 작업은 거의 무의식중에 자동적으로 행해진다. 내가 말하는 \'판단\' 이란 결국은 그 개인적인 배열 작업을 가리킨다. 그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정신 조성의 패턴을 재조합하는 샘플이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는 그런 작업을 통해서 살아가는 행위에 포함된 운동성을 내 일처럼 리얼하게 \'체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일을 해야만할까? \'정신 조성의 패턴\'을 실제로 다시 짜는 일은 인생에서 몇 번이고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픽션을 통해 일단 시험적으로나 가상적으로 그러한 작업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소설이란 사용된 소재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허구지만, 그에 뒤따르는 개인적 질서와 배열 작업의 과정을 보면, 명백하게 실제적인 것이다(그래야만 한다). 소설가가 철저하게 허구에 구애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경우, 분명 허구 속에서만 가설을 유효하고 콤팩트하게 쌓아올릴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픽션이라는 장치에 정통해야만 고양이들은 곤히 잘수 있는 것이다.

이따금 젊은 독자에게 긴 편지를 받는다. 그들 대부분은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내가 생각한 것을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고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이 차이도 크고, 지금껏 축적한 경험도 전혀 다를텐데\" 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것은 내가 당신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그러니 당연히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혹여 내가 당신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면 그것이 당신이 나의 이야기를 당신 안에 유효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라고.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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