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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짤리니까 여기서 보셈..
“나는 병든 인간이다. ... 나는 악한 인간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 내가 치료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약 20년간 살아왔다. ...”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사실 이토 준지의 만화는 그렇게 무섭지 않다. 오히려 다소 불쾌하다. 엽기적이고, 이 작가의 상상력이 대체 어디까지인가 호기심을 자극하는 재미가 있다. 우리가 막장드라마에 몰두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다. 이토 준지는 인간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을 파고들고 이것을 이야기의 소재로 활용한다. 피해의식, 열등감, 타인에 대한 혐오, 나르시시즘, 집단에 속해 있다는 주류의식과 우월감과 같은 것들이다. 한 개인이 갖는 마음의 어두운 측면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서 다른 개인들을 감염시키거나, 해치는 방식으로 사회에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기상천외한 사건들과 이야기 전개로 풀어나가는지 읽는 내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독자 또한 일상적 개인의 한 부류이고 어두운 본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이토 준지의 만화가 그렇게 별 세계 이야기로 읽히지만은 않는다. 여기에는 노소 가릴 것 없이 예외가 없다. 특히 서술자의 위치에 따라서 독자들이 느끼는 감정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가끔씩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들을 읽다 보면 괴기스러운 이야기의 피해자 또는 당사자가 내가 된 것처럼 몰입되는 경험을 느낄 수 있다.
이토 준지의 공포만화 시리즈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깊은 인상을 남겼을 거라 생각되는 토미에. 그녀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미인으로 묘사된다. 그녀가 유혹하는 모든 남자는 최면에 걸린 듯이 그녀에게 빠져든다. 그러나 그녀가 남자를 유혹하는 이유는 남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치장거리로 삼기 위함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관심사는 자신을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것이다. 물론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토미에는 죽지 않는다. 죽일수록 계속해서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타 여성에게 기생할 수 있다. 토미에가 기생하는 여성은 토미에와 비슷한 나르시시즘을 보이게 되고 얼굴까지 그녀와 같아진다. 실체가 불명확하고 죽지 않으며 전염성 있는 토미에는 일종의 신드롬이다. 이는 토미에가 현대사회의 나르시시즘과 외모지상주의를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토미에는 김치녀의 전형이 아닌가? 그리고 그녀를 죽이고 싶어하는 남자들과의 관계는 성적 적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식으로 대부분의 이토 준지의 만화에서 사회 비판적인 입장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 같이 그의 작품들은 현실을 병적으로 재구성해낸다. 이는 결국 이 만화를 보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종류의 사회적 부패를 목도하게 만든다. 인간의 어두운 본능에 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일 수도 있다. 감상의 폭은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만을 고집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만화를 통해서 우리가 처한 일상의 문제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이러한 요소는 이토 준지의 원작 만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 공포의 물고기에서 한층 더 명확해진다. 어느 날 지독한 가스를 풍기는 물고기 때가 육지에 출현한다. 이 물고기는 좀비와 같은 상태인데 기계를 장착하고 있어서 걸어 다닐 수 있다. 그리고 끝에 달린 촉수를 통해 바이러스를 감염시킬 수 있는데 이 바이러스에 걸리게 되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이렇게 된다.
온몸에서 가스를 분출하고 이들은 또 다시 희생자들을 감염시킨다. 결말에 다다라서는 일본 열도에는 이런 좀비 떼들로 가득 차게 된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다는 듯이 강렬하게 진동하는 가스의 냄새. 이 가스는 카메라에는 찍히지 않는다. 하지만 눈으로 볼 때는 끔찍한 형상을 띄고 있다. 이 가스는 사상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사상적 의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고 다른 이들이 같은 의지를 갖도록 절대적으로 복종시킨다. 이 가스를 동력 삼아서 움직이는 기계 장치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에 기생한다. 그러나 자신이 기생하는 존재가 쓸모없어지면 이 존재를 파괴해버리고 만다. 이처럼 사상적 의지는 비이성적이고 자기파괴적이다. 그러나 또 소멸되지는 않는 무한한 존재이다. 이들 기계들은 새로운 모형이 나오면 떼로 달려들어 부셔버린다. 극 중 인물 타다시의 모델이 자신들의 것과 다르다는 이유로 떼로 달려들어 살해하는 장면은 풍자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즉, 진보적인 것을 억압하는 다수의 보수. 이쯤 되면 과학자가 나서서 백신을 개발할 법도 한데, 이들은 한 술 더 뜬다. 아예 기계를 개조해서 날아다니는 모형으로 바꾸어 버린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라는 속담이 저절로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사회를 개혁해 나갈 지식인들마저 진실을 외면하고 사상적 의지에 사로 잡혀버린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화가 클로즈 업하는 선원의 모자의 마크는 군국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일장기를 연상시킨다. 일본 열도는 이 가스로 뒤덮였다고 말하는 선원의 말로 영화는 끝이 난다.
새로운 모형을 살해하는 감염된 인간들.
그러나 독자들은 결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공포의 물고기를 보면서 ‘아, 전체주의라는 것이 무서운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를 본다면 현재 우리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어. 나가서 시위라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코 없다.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는 하나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엽기적이고 강렬해서 경고가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라고 머릿속에서 금방 잊혀져버리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뒷끝 없이 개운하다고 할 수 있다. (나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이토 준지의 만화가 단순히 참신한 재미를 위해 소비되는 B급 공포물로 남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가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훨씬 뛰어넘는 존재입니다."
반면에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어떠한가? 그녀의 유명한 소설을 ㅇ원작으로 한 영화 리플리를 보자. 리플리는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호텔 보이이다. 우연히 선박 부호 그린리프의 눈에 띄게 된 리플리는 이탈리아에 있는 그의 아들 딕키를 찾아와 달라는 청탁을 받는다. 리플리는 딕키에 대해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해서 그에게 접근했고, 끝내 그와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도 상류사회의 일원이 된 듯 한 착각에 빠진다. 끝내는 딕키를 살해하고 자신이 딕키 행세를 하게 되는 리플리의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이토 준지의 만화가 주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하이스미스의 그로테스크함은 이토 준지의 그것처럼 뇌리에서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다. 그것은 톰 리플 리가 상상 속에 등장하는 기괴한 살인마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톰 리플리는 자기 자신이 아닌, 더 나은 남의 모습이 나이길 바라는 어긋난 생각에 사로잡힌 우리의 초상일 수 있다. 영화의 시작부부터 그는 주체성이 없다. 남 대신에 피아노를 쳐주고 남의 옷을 빌려 입어 다른 사람의 행세를 시작한 리플리를 그리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주체성의 상실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극한을 달린다. 여러 개의 거울 속에 분리되는 톰 리플리의 모습, 피아노에 반사되어 갈라지는 톰 리플리.
주류문화에 대한 동경과 주류가 갖는 특권의식은 이토 준지 또한 잘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이토 준지가 보여줬듯이, 그녀는 자칫 저급하고 엽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쉬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객관적이고 치밀한 묘사로 환상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녀는 이야기에 최대한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일부러 감정이 배제된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사용했다. 이토 준지와 하이스미스의 작품은 같은 주제가 얼마나 다른 형태로 표현될 수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둘은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지만 상이한 형상을 띄고 있다.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라는 어머니. 선택은 독자의 자유다.
http://blog.naver.com/tyrion7/220040609011 사진 짤린 관계로 여기서 보셈.. 글 맘에 들면 이웃좀 걸어줘
야 병시나. 하이스미스가 영화감독이냐 소설가지? 왜 하이스미스 소설 얘기를 하는데 영화 얘기를 해. 보조텍스트로 다룰 순 있어도 하이스미스 이름 걸거면 소설을 가져와서 얘기해야지. 이토준지도 만화가지 애니메이션 감독임?? 이게 구분이 안되는데 뭔 리뷰를 하냐.
하이스미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얘기를 하는거잖아 그리고 애니메이션도 만화랑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 없어서 시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 사진을 넣은거지. 이상한데서 테클 ㄴㄴ해
그러면 하이스미스 이름 들먹이지 말고 영화 감독 이름이나 작품 제목으로 얘기해. 일단 원작이랑 태양은 가득히랑 같은 내용도 아님. 학부생인지 고딩인지 모르겠는데, 너는 선생이 나니아 연대기 읽고 리뷰 써오라고 하면 영화 보고 쓸거냐? 내용도 표현방식도 전혀 다른데??? 나 대댓글 잘 안다는데 네가 너무 몰라서 한번 더 달아둠.
니말 뭔말인지 알아 등신아 테클걸거 발견햇다고 죽자고 달려드네 비평문이나 논문쓰는것도 아니고 감상평정도로 쓴거에 그렇게 엄밀한 기준들이대면서 욕까지 해대는거 들어줘야되나?
니 말대로 글의 제목이나 취지를 고려하면 소설을 끌어다 오는게 더적합한 사례가 되긴 하겟네 ㅇㅇ
감상평이어도 독자에게 객관적인부분에선 혼란을 주면안된다 본문에서 소설을 원작으로한 영화다 정도의 설명은 덧붙여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