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경험적 사고에 입각하여 쓴 시 외에 어떠한 불안감, 그리고 긴장된 요소로써, 미지의 감각을 자극하는 도구로

 

나는 픽션을 역이용하여 재구성한다.

 

밀가루를 반죽하듯, 혼합하고 반죽하여 그 마찰 속에서 빚어진 에너지들은, 시도가 어떠하던 그 자체로써 색다르며 숭고하다.

 

나는 이것을 사랑한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제 어미의 젖냄새를 알고 찾는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경험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반죽할 수 있는 두 손이 있다. 움직일 수 있는 몸과 생각할 수 있는 뇌가있다.

 

또한 꿈을 통하여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암시하고 , 혹은 예고하거나, 특별한 경우에는 꿈이 실체화되는 경우도 있겠다.

 

모든것이 불가항력적으로 시간에 흐름에따라 각기 변하듯 시 또한 그렇지만, 역사의 맥락 속에서 시의 본질적인 기능만은 변모할 수 없다.

 

시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리고 항시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였고 세대와 세대를 걸쳐 어떤 색(色)의 횃불들을 전달하였는가?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비평가도 아니고, 문학가도 아니지만 '시' 라는 본질적인 기능을 가장 원론적으로 따져놓고 보자면

 

시에는 비평도 평론도 존재할 이유가 없다. 철없는 어린이가 쓴 '동시' 와 시인이 쓴 시를 별개로 각개 철저히 검토하여 분석한다는 것이 애당초

 

오류이며. 그저 이 유연한 '시' 라는 문학체계가 거짓없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은,  직접적인 이미지 예술인 미술계 처럼 희대 인물들인

 

잭슨플록과 앤디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등의 인물들이 난입 할 수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평단에서는 결국 시에도 값을 매긴다. 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비교 산술적인 수치를 내어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확실히 불가피한 진리이다. 진리(眞理)가 이런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진리 딱지를 붙이겠는가?

 

물에도 값이 매겨지며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나무에도, 세상 모든 것에는 인간이 새긴 값이 매겨져 있다.

 

세상 모든 것이 인간의 수요와 공급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값들은 시대의 흐름과 수많은 변수 속에서 무구히 변한다.

 

나는 '시' 라는, 누군가 책상에 낙서한 시, 혹은 숫자가 난무하는 현대시이건, 동시이건, 나는 필히 그 어느것도 속으로 평하지 않을 것이고

 

아쉬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음지라고 평한 그 음지 속에서, 겸허하고 부드러이 시를 즐길 것이다.

 

 

 

이 글은 내 자신에게 나를 상기시키는, 내가 내게 전하는 조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