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ㄴ야
류로(223.62)
2014-07-25 02:57:00
추천 0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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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고 주목하는 젊은 작가 있냐?
180 ㅁㄴ 나와라
문갤 공식 전문가 180 ㅁㄴ
정확한 분석이라기보단 그냥 문창과도 국문과도 전공하지 않아서 현장문단 훑어보기 좋아한 탓인거가틈.
소설 쪽보다는 시를 더 많이 파서 소설은 잘 모르겠어. 근데 두 경향으로 나뉜 거 같은 기분임. 대형서사가 사라진 이후로 언어성에 대한 고민을 천착하려는 소설들 - 소설에 대한 소설들이 생겼다고 보임.(일부 소설가들은 솔직히 이것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전위적인 문학에 대한 환상을 갖고 쓰는 작가들이 있는 거 아닐까싶음.) 다른 한 부류는 미니멀리즘이라고 해야 되나, 서사 이하의 사건 단위로 소설을 구성하려는 움직임 같아. 이게 한국 장편소설들이 짧아지거나 중편들이 경장편이라는 이름을 핑계로 나오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생각돼.
이렇게 막연해서 어떤 소설가를 감히 주목한다거나 그럴 여력은 못됨.
아 그리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시인 비평가 몇분을 개인적으로 알아서 시에 대한 견해를 들을 기회가 더 많았어. 그래서 시에 대한 할 말이 더 많은가봄.
좋은 분석이다. 최근에는 그러한 구분이 많이 희석되는 감도 있다. 서사성이 약화된 건 최근의 일은 아닌 듯하고, 오히려 2000년대에 등장한 일군의 작가들(서준환, 한유주, 김태용 등등)의 미학적 타입이 한국 소설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 주류 출판사인 문지에서 그러한 경향에 대해 과도하게 호의적이기도 하고.
근데 재밌는 건 그런 서사성이 약화된 소설들이 해외에선 오히려 평가가 좋다는거지. 물론 한국문학은 아웃사이더니까 그 평가 좋다는게 엄청 주목받거나 팔리는 그런 건 아니지만, 이인성이나 정영문이 프랑스 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도 그 예지. 문지는 반면 서사적인 소설에도 호의적인 편이라고 보여지기도 해. 문학동네도 서사성을 약화시킨 소설들에 나름 호의적일 때도 있지만, 창비나 민음사는 잘 모르겠다. 문지에서 등단한 김엄지, 윤해서 같은 경우도 좀 특이하지. 윤해서는 김태용 한유주랑 비슷하고 서사성 약화됐지만, 김엄지는 그렇다고 보기도 특이해. 문지의 김사과 같기도 하고..
신기...
서사나 비서사의 구분이 사실 서사학적으로 접근했을 때 무용한 건 사실이지. 어쨌든 서사학에서는 '서사가 있다', '서사가 없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의 표현 형식을 분석하는 것이 일반론이니까. 서사 비서사의 구분도 작위적인 구분이라고 할 수 있고, 이인성이나 정영문 또한 작가 나름의 독특한 서사 표현형식을 획득한 거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해외의 동향은 잘 모르겠는데, 이인성이나 정영문의 평가가 좋은 만큼 오정희나 신경숙의 평가도 나쁘지 않지. 김엄지는 김사과랑 조금 다른데, 김사과의 서술자가 '분노'에 가까운 고유의 정념을 강하게 내장한 채 움직이는데 반해 김엄지는 내면성이 없고 무개념한 인물들의 표류를 주로 보여주지. 윤해서는 소설의 형식실험이나 꼴라쥬에 관심이 있는 것 같고, 그렇게 보면
김태용과 한유주와도 변별되는 거지. 김태용 한유주가 형식실험이나 꼴라쥬에 매달린 것은 아니니까. 따지고 보면 최근의 소설들은 서사 비서사의 구분이라는 게 얼마나 무용한지 몸소 보여주려고 하는 듯하다.
나도 개인적으로 서사와 반서사/비서사의 구분은 무용하다고 보는데, 김태용과 한유주 같은 이들이 그런 것들을 보여 주려는 것 같긴 함. 김엄지와 김사과의 차이는 나도 동의하는데 굳이 창비에서의 '김사과'를 문지에서 찾자면 김엄지가 아닐까 싶어. 김엄지는 인물성의 무용함과 그 인물성의 서술이 지니는 무의미성으로 나가려는 거 같던데, 김사과는 사실 그 점에서 오히려 정반대라면 정반대였지 같은 방향은 아니거든. 근데 윤해서의 경우 형식실험이나 꼴라주에 관심이 있는 게 맞다 보여지는데 김태용도 마찬가지라서. 장편에서의 성향이나 문학 작품 외의 작업들을 보면 더 그렇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