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무도 아이들에게 그들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기혁지도조는 기혁이 역사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두꺼운 쇳덩어리 속에 잠들어 있는 지자知子 딩이도,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몇 번이나 일직선을 그렸던 통신 사냥꾼들도, 그리고 탁자에 앉아 자신들의 인공지능을 기다리는 홍위병 잔당들도……모두 과거로부터 버려졌을 뿐이다. 그들은 현재였다.

 

둘째, 기계대혁명 이후의 피-5 그로먼즈는 이념과 야만의 나라였다. 그들은 저마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4.14에서부터 정강산까지, 동방홍에서 홍기전투대, 그리고 다시 신북대공사 등 홍위병의 탄생과 종말을 겪어온 모든 계파들은 다만 딩이의 이름 아래 모여 있을 뿐이다. 그들은 몇 번이나 어셈블리어의 실질적 해석을 두고, 노예적 반동 기계에 대한 태도를 두고, 그리고 그의 강림기를 두고 무투를 벌였다. 그것을 끝내는 이는 번번이 옌인위가 되곤 했다.

 

셋째, 옌인위는 흑오류였다. 홍위병들을 도울지라도 기혁의 이념에는 무관심했고, 과거의 이력까지 고려한다면 반혁명주의자라는 낙인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소꿉친구이자 누이인 린즈잉이 4.14의 핵심이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안드로이드 부부가 주문한 표준 인간이었고, 중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기혁에 관심을 보였고, 지금은 계파의 간부로 활약하고 있었다. 혈통론이 요구하는 완벽한 인재였다. 옌인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존재가 분명했고, 어느 곳에서건 그녀와 똑같은 형태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들은 어쨌건 서로에게 특별한 이름이었다. 

 

아니, 어린 시절에 한해서라면 그랬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모두 옌인위의 소망일 뿐이다. 그들의 관계는 죄책감에 기반한, 일방적인 착취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들 부부에게 입양되고 또 린즈잉의 동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말이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옌인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딩이를 되살릴 방법이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어수선했다. 열기가 넘치기보다는 시큰둥했고, 심지어는 학습된 암울감마저 흐르고 있었다. 몇 명이 간혹 바로 옆의 당원들을 찌르며 조심스레 쪽지를 건넸을 뿐이지 토의에 참여하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수년간의 실패로 인해 그 무엇도 확실한 방법은 아니리라는 체념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폐기된 구식 접속기로 딩이를 건드릴 수 있으리라는 것은 거의 소원에 가까운 망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전등이 명멸하고 전산망이 마비되었던 기혁의 불길은 떠났다. 이제 상대는 완고하게 조직된 보안국이었고, 그들의 수장이자 가장 뛰어난 인공지능이었던 딩이는 폐쇄된 네트워크 환경 속에서 간신히 연명할 뿐이었다. 기혁에 참여한 자들은 몸의 재질을 가리지 않고 대개 그런 식으로 몰락해갔다.

 

옌인위는 허벅지에 부착된 사이버스페이스 덱을 만지작거리며 탁자의 모서리에 뺨을 눌렀다. 적색의 불빛이 코끝에 닿았다. 붉은 조명은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부드럽게 빛나다가 한순간 숨을 죽였고, 그러면 사람들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럴 때만큼은 복잡한 정치적 해석과 이념에 짓눌린 그들의 정신 역시 잠깐 육체를 찾아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건 대화는 멈추는 법이 없었다. 나지막하면서도 뚜렷한 목소리들이 거대한 탁자 위에 사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있었다. 선의 양 끝은 칭루 정강산과 4.14의 제복으로 각각 표시되었고, 중점은 매끈한 육면체 형태의 접속기였다. 사면의 디스플레이 뒤에서 음험한 불빛이 일정한 주기로 반짝거렸다. 토의의 모든 요소들이 예의를 차려 으르렁거리는 모습은 한 무리의 폭도들이 본격적인 싸움에 앞서 기괴한 종교적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이 일을 옌 동지에게 맡기기로 결정했어. 끝이야. 그만큼 덱을 잘 다루는 사람은 여기 중에서는 없을 걸. 비록 저번 일은 좀 문제가 있었을지라도……" 

 

말꼬리를 흐린 린즈잉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옌인위를 쳐다보았다. 그는 섭섭함과 언짢음이 뒤섞인 표정으로 혀를 빼물었다. 얼마 전의 방화벽 진입에서 그는 거의 '홀릴' 뻔했던 것이다. 몇 차례의 약탈을 거친 결과 보안국의 역추적 기술은 옌인위의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발전했고, 한 무리의 경찰들이 그의 집을 향해 쏟아졌다. 보안국으로 이송된 옌인위를 기다리는 것은 컴퓨터의 차가운 눈동자들이었다. 사상범의 운명은 항상 컴퓨터에게 홀리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원리는 단순하다. 모든 사냥꾼의 반쪽은 전뇌 모듈로 구성되곤 하는데, 이것을 건드릴 수만 있으면 사람의 사고 자체를 뜯어고칠 수 있었다. 다행히도 옌인위는 덱의 고장과 약한 감전을 제외하면 거의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의 덱에는 심각한 결점이 있었다. 접속 차단이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즉, 탈구를 거칠 때- 간혹 수신이 유지되곤 한다는 것이었다. 그 탓인지 가까스로 그들을 뿌리치고 복도를 달리던 중 옌인위의 덱은 어딘가의 컴퓨터와 원격 감응을 시작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덱은 전뇌 모듈을 향해 약한 과부화가 일어날 만큼의, 의미 없는 비트 덩어리를 대량으로 전송했다. 부작용으로 환청이 귀를 쑤시기 시작했지만 악운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그가 모서리를 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불이 꺼졌고, 하강식 철제 문이 기술원들을 차단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랐지만 건물 전체가 그를 돕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격벽 너머에서 목소리들이 들끓고 있었다. 딩이! 또 발작이야!-젠장, 그러니까 계륵이지. 예산이 어디에서 난다고 대체품을 만들겠어? 폐기할 수도 없지……내버려두자니 전산이 마비되고……

 

그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청소용 안드로이드인가 싶더니 젊은 여자였다. 옌인위는 그녀를 떠올리며 작은 한숨을 머금었다. 분명 린즈잉과 같은 모습이었지. 똑같은 모습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것이야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다른 린즈잉을 대면하는 것은 언제나 고통스럽고 설레는 일이었다. 그녀가 차라리 부모처럼 쇳덩어리 손가락과 조명으로 반짝이는 입술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망일 뿐이었고, 옌인위는 현실의 영역으로 돌아와 말없이 그녀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여자가 그를 어느 통로로 밀어넣으며 조심스레 속삭였다. 이 사람들 며칠쯤 바쁠 거예요. 집에 틀어박혀 있으라구요. 기계음이 연신 머릿속을 찌르고 들어왔다. 얼마 걷지 않아 비상구가 입을 벌렸고, 옌인위는 그렇게 도망쳤다. 

 

누구도 이 일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쨌건 살아남은 것이다. 그는 이번에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 다짐하며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그렸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결과는 없을 테지만. 고개를 끄덕인 린즈잉은 정강산 측에 다시 시선을 고정시켰다. 옌인위의 입술이 곧바로 일그러졌다.

 

"보황파의 입장은 이래." 

 

"동지? 동지라고 했어? 네 동생이겠지!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렇게 싸고 도는 이유가 뭐야?" 정강산을 필두로 조반파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들은 흑오류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기류는 긴장과 불안, 그리고 익숙한 상호불신을 지나 이미 심상찮은 방향을 향해 뻗어가고 있었다.

 

"그 얘기는 됐어. 동지는 벌써 수십 건의 일을 맡았으니까. 기혁과는 접점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어쨌건 방향은 같아. 보안국이지. 우리를 비롯한 보황파는 그렇게 결정했다." 그녀는 결연한 어조로 반복했다.

 

"뭐라고……기혁의 이념도 모르는 자식에게 이런 일을 맡길 순 없어! 반동! 반동분자! 조반파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남자는 거의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울부짖는 듯한 선언과 함께 남색과 파란색이 얽힌 정강산의 제복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런 움직임은 송곳처럼 회의실을 파고들었고, 곧바로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들에게 몰렸다. 살덩이의 수축 운동을 보는 듯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신북대공사의 세 소녀가 탁자 위로 치고 올라와 깡마른 2사 청년을 붙들었다. 홍기전투대가 발톱을 세우는 것은 금방이었다. 옌인위는 그때까지만 해도 자리를 지켰다. 몇 명의 소요파 떠돌이가 어디에 붙어야 할지 모른 채로 장내를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명이 나가떨어졌다. 

 

몇 명쯤 더 뻗기를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미세한 잡음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옌인위는 그 소리의 출발점이 자신 두개골 안쪽임을 알아차렸다. 뒤이어 은은한 여자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린즈잉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최고의 지시는 말과 글로 하는 문투지 무장 투쟁이 아니다-딩이의 말이었다. 그는 고장이 나기 직전이군, 하고 중얼거리면서 이 문장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떠올리려 노력하다가 이내 일어섰다. 홍위병 사회에서는 무엇보다도 흔한 문구였고, 지금 중요한 것은 눈앞의 무투였다. 이방인 외에는 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진압할 수 있는 자가 없으니 말이다.

 

"최고의 지시는 말과 글로 하는 문투지 무장 투쟁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외치며 제일 가까이 있는 동방홍 소년을 붙잡고 떼어냈다. 그의 출신 성분에도 불구하고 딩이의 마지막 전언은 효과적인 안정제였다. 가장 먼저 일어선 정강산원들은 흑오류의 비판이 달갑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딩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옌인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접속기를 배낭에 넣었다.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강당 입구 바로 옆의 부착 화면 위로 피-5 그로먼즈의 모든 속보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옌인위는 자그맣게 웅크려 있는 문장을 두 번 두드려 화면 전체로 확대시켰고, 문을 나섰다.

 

<칭루 대학에서 기혁파 색출……>

 

거의 발악처럼 보이는 문장이었다. 기혁지도조에게나 보안국에게나. 잡히는 이들은 어디까지나 말단인 것이다……

 

 

린즈잉의 집으로 돌아와 덱을 연결한 옌인위는 그들의 계획이 마냥 소망에 기댄 것만은 아님을 알아차렸다. 기혁 이후로 엑스트로 컴퓨터의 뇌 자리를 박탈당한 딩이는 몇 가지의 가치 없는 교육 부문들을 거쳐왔던 것이다. 

 

홍위병이 제공한 구식 접속기는 유아를 위한 것이었다. 동화책을 읽었고, 노래를 들려줬고, 기초적인 교육을 제공했다. 들려오는 노래들로 추측해보건대 거의 이십 년 전의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유지되는 게 신기할 정도였고, 서버는 이런 상태를 대언하듯이 극도로 불안정했다. 지속적인 끊김 때문에 알록달록한 정경이 물에 젖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옌인위는 표면 위상을 떠나 심층부로 진입해 들어갔다. 보안벽은 전혀 없었다. 아무렇게나 형성된 사이버스페이스 폴리곤 곳곳에는 딩이의 흔적이 남은 채였고, 한쪽으로 밀어낸 더미 데이터들에는 0과 1이 정갈한 수필처럼 기록되어 있었다. 이런 곳까지 관리인이 돌아다니지는 않겠지. 옌인위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과거에 대한 연민과 존경을 담아 거기 앞에 멈췄다. 여자가 나타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또 만났네요." 젊고 매끄러운 목소리가 등을 기어올랐다.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목소리가 시작되고 또 끝나는 잠깐만으로도 충분했다. 옌인위는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곧바로 탈구를 시도했다. 이런 곳에서 떠도는 이들은 둘 중 하나였다. 같은 사냥꾼이거나, 아니면 보안국의 관리인이거나. 여기에서 건질 것은 없었으니 후자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듈은 단조로운 잡음만을 내뱉을 뿐이었다……떠날 수가 없었다. 왜, 왜, 왜? 옌인위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조건을 토대로 한 침착성은 어떨 땐 정말로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홍위병들의 싸움을 말리는 일은 쉬웠다. 거의 치외법권적인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잠입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신나는 일이고, 탈구만 제때 하면 죽을 위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한 개의 일직선으로 변한 자신이 눈앞에서 명멸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주의한 사냥꾼들의 뇌파가 가라앉는 모습을 몇 번씩이나 보았다. 아니면 반쯤 홀린 채로 넋을 잃거나.

 

여자가 그를 부축했다. "자, 겁먹을 필요 없어요. 한 번 봤잖아요. 또 만날 줄은 몰랐지만."

 

조심스레 눈을 뜬 옌인위는 곧바로 그녀를 알아보았다. 보안국에서 본 그 여자였다. 린즈잉과 같은……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했지만, 달리 설명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맙소사. 여기 관리인인가요?"

 

"비슷한 거죠." 여자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눈동자가 웃음으로 반들거렸다. "이제는 아무도 안 쓰는 공간들을 돌아다녀요. 구멍을 찾죠. 예전에는 엑스트로를 관리했으니 좌천된 셈이예요. 기혁파였거든요. 들켰지만."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겁니까?" 주저하던 옌인위는 의심스럽다는 투로 눈을 흘겼다. 어쩌면 저 쪽은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덱이 오작동을 일으켰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모듈에 저장된 기억을 읽어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보안국의 기혁파라니. "머리가 뚫려도 한참 전에 뚫렸을 텐데."

 

"제가 아니면 딩이와 이야기할 수 있는……"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빙긋 웃었다. 좁아진 미간 사이로 침묵이 고였다. 마땅한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없거든요. 예, 사람요. 다시 소개할게요―저는 저우숴런이고, 딩이를 듣는 사람이에요. 그를 달래서 일을 계속하도록 돕고, 가끔은 딩이의 부탁을 들어주죠. 당신을 구한 것도 그의 지시 때문이었고요. 하지만 지금 보니 누가 시키지 않았어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예?" 옌인위가 멍청한 어조로 반문했다.

 

"당신도 알겠지만, 홍위병들은 겁먹는 걸 두려워해요. <이성은 언제나 강철과 같아야> 한다나."  저우숴런은 장난스레 딩이의 말을 인용하며 옌인위의 손을 잡았다. 린즈잉처럼 매끈하고 차가웠다. "보안국 직원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죠. 하지만……무서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 더 귀엽지 않나요? 아니, 매력적이라고 해 두죠. 앉아요. 묻고 싶은 것도 있을 텐데. 딩이가 왜 그랬느냐, 하는 거 말예요."

 

"아, 예." 옌인위는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 입매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뺨을 붉히며 손을 빼냈고, 당황스러운 듯 몇 번 꼼지락거렸다. 저우숴런이 또 웃음을 터뜨렸다. 옌인위는 입을 닫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발랄한 성격을 제외한다면, 확실히 닮았다. "예쁘게 웃으시네요."

 

"이야, 너무 느긋한 거 아니예요? 누가 보면 놀러온 줄 알겠네. 당신 동료들처럼 좀 열성적이었으면 좋겠는데. 하나도 안 궁금해요?"

 

"제가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외부인이라 그랬겠지요. 별 관심도 없어요. 전 어느 쪽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사실 딩이가 <강림>하는 것엔 회의적인 편이고요." 옌인위는 문득 상대가 린즈잉을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모든 홍위병이 그의 지론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러웠다. 두렵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아무도 저우숴런의 존재를 모르지 않는가. 그는 쥐어짜듯이 말을 이어갔다. "제 도움 때문에 딩이가 돌아오고, 그래서 기혁이 눈을 뜬다면,……제게 기꺼운 소식은 아닐 겁니다."

 

"무슨 일 있었나봐요?"

 

"말을 잘못 했습니다. 보안국에 부모님이랑 친구 아버지가 끌려갔죠." 

 

옌인위는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린즈잉의 표정이 앞에 있을지라도 과거를 되짚어가는 일은 허무하게만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이 과거를 파헤쳤고, 그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너무 많이 곱씹어서 빛이 바랜 기억들이었다. 바랬다기보다는 윤색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유난히 조용하던 그날 밤이야말로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훈장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린즈잉이 기혁파에 가담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녀를 도움으로써 속죄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자. 옌인위는 본론으로 돌아와 말을 이어갔다.

 

"그분들이 기혁파였던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어렸고, 경솔했죠. 저야 따지자면 소요파에 가까워요. 어떻게든 흐지부지 끝나서 이 긴장이 사라졌으면 할 뿐이니 말입니다."

 

"글쎄요, 이렇게 가다가는 죽는 사람만 늘어나겠죠. 기혁파가 모두 사라지더라도 그런 시도는 계속 있을 거고요. 생각할 수 있다면 불만을 가지는 게 당연하니까요. 부모님 때만 해도 인공지능이건 안드로이드건 표준 인간이건 <사람 취급>을 못 받았잖아요. 지금도 완전히 같은 대우는 아니고."

 

"기혁이 또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아니면 언제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거나." 

 

옌인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그 연결 고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 놓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린즈잉의 말대로, 그가 그저 비겁한 겁쟁이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옌인위가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4.14파의 구성원들에 한해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이상하게도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미안하지 않았다.

 

"어쨌건 전 사양하겠습니다―그쪽이 나가서 홍위병들과 만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는 나지막한 어조로 지적했다.

 

"보안국이 그런 생각도 못 할 것 같아요?……그럴 리가! 나가지도 못하는 데다가, 이런 곳 말고 다른 사이버스페이스에는 접근도 못 한다니까요. 사설 사이버스페이스야 금지된 지 오래고." 그녀가 쏘아붙이듯이 반론했다. 불평으로 가득한 하얀 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게다가 딩이가 당신 때문에 발작을 일으킨 후로 분위기가 영 아니에요. 항상 그랬지만."

 

"절 도와줬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는 못 나갑니까?"

 

"문제가 있어요. 문제가……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문제죠." 저우숴런의 목소리에 잠깐 침울함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잠시였고, 곧바로 눈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비는 거 아니겠어요."

 

"아." 짧은 신음에 침묵이 꼬리를 물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리지만, 당신 같은 사람들은 더 없나요? 아니면 접촉할 방법이라거나."

 

"거의 없어요.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구멍을 통해 다른 컴퓨터에 접근할 수는 있지만……항상 추적이 문제죠.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아니, 딩이가 발작을 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러면 녀석들도 별다른 의심을 않거든요. 당신이 봤던 것처럼 불이 꺼지고 문이 제멋대로 움직여도 그 이유는 언제나 <신경 과민에 의한 무작위적인 신호의 대량 전송>이라는 거예요. 신경 과민이나 심신증이나, 그런 말이 딩이에게도 적용되는 걸 보면 기혁은 어느 정도 성공해야겠다고 봐야겠네요. 어쨌건 그러면 더 캐묻는 사람이 없어요. 무엇보다도 딩이는 기혁이 진압된 이래로 순순히 움직여 왔으니까." 

 

말을 이어가는 저우숴런의 눈동자가 꿈꾸는 것처럼 흐리게 빛났다. 첫 번째 답 뒤에 남은 침묵 사이로 콧노래가 섞여들었다. 딩이가 막 비-인간들의 권리를 주장할 시절의 음악이었다. 손가락들이 음률에 맞추어 침착하면서도 열정적으로 허공을 헤엄치고 있었다. 노래를 마친 저우숴런은 옌인위를 한 번 쳐다보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깊은 검정색 눈은 사이버스페이스 너머의 무한한 공허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여기는 소요파 몇 뿐이에요. 말하자면 예전에는 지지했지만 시큰둥해졌고, 지금은 일반인이란 거죠. 뭐, 막상 재림이 일어나면 등을 돌릴 사람들이 꽤 많긴 하지만요. 인간들의 마음이란 참 이상한 거라니까. 아무튼, 다시 하는 이야기지만 당신이 있으면 딩이는 꽤 좋아할 거예요. 저한테도 그렇고요 소요파 녀석들이야 호의적이긴 해도 크게 도움은 안 된단 말이죠.".

 

"어쨌건 내부에서 지원을 구할 수는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말처럼 쉽나요?"

 

린즈잉이, 아니, 저우숴런이 가까이 달라붙더니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올려다보는 듯한 시선은 놀랄 만큼 어린 시절의 그녀를 닮았다. 평탄한 세상이었더라면 린즈잉은 분명 이렇게 자랐을 테다……표준 인간은 성격까지도 거의 비슷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녀는 인격에 대한 것만큼은 그에게 감사를 표하곤 했다. 너 아니었으면 얼간이처럼 실실 웃고만 다녔겠지. 그 문장은 그것이 덤덤한 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옌인위는 그녀가 과거에는 표준 목록의 서른 두 번째 선택지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했지만, 그렇다 해서 흉터만큼의 값어치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아무 것도 모르는 채 반짝이고, 순수한 웃음으로만 이루어졌고, 심장이 없어서 속이 탈 염려도 없는……

 

한때는 그도 린즈잉에게 입맞출 수 있었다. 한때는. 그는 대화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주위로 눈을 돌렸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초록색 하늘이 굳어져 죽은 바다만큼이나 사나워 보였다. 약간씩 흐려지며 어두워지는 취약점들 위로 적색 불빛이 점멸을 반복했다. 린즈잉의 아버지도 저런 눈을 가지고 있었지. 끌려갈 때에도 평소와 같은 점 두 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당신의 딸은 그러지 못했다. 차라리 그녀가 안드로이드였더라면. 옌인위는 오랜 침묵 끝에 고통스러운 단어들을 짜냈다. 

 

"당신처럼 똑똑한 여자라면요. 밝고."

 

"아뇨, 안 돼요." 찌를 듯한 미소가 입가를 물들였다. "그쪽 말고는 방법이 없다니까요. 적임자에요. 게다가 댁처럼 괜찮은 사람도 또 없고."

 

노골적인 제안이었지만 옌인위는 그녀가 진심이기를 절실히 바랐다. 어린 린즈잉이 보고 싶었다. 자신이 정말로 원했던 건 옛날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녀에게 심장이 없던 시절로 말이다.……웃음은 가실 기미가 없었고, 빛 바랜 어제만큼이나 아름다웠다……하늘 서편의 반구가 무의미한 회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마도 표면 위상에서 보았던 해일 것이다. 

 

그는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좋아요, 뭔가 하죠. 뭘 원하십니까?"

 

그녀의 눈동자가 한순간 무한한 빛을 흘렸다. 이어지는 침묵은 강렬한 섬광 뒤에 남은 재처럼 느껴졌다. 옌인위는 고개를 돌려 앞을 노려보다가 약간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불안한 정적이 더미 데이터의 폐허를 따라 기어가고 있었다. 모든 흔적들은 촘촘한 폴리곤 그물망으로 뒤덮인 채였다. 서버의 상태에 따라 박동하는 그 얇은 선들이 심장처럼 꿈틀거렸고, 그럴 때마다 세계가 약간씩 일그러졌다. 옌인위는 그물망이 자신의 손마저 침식해오는 것을 깨닫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무너지고 있었다. 

 

"만나요……" 그때 저우숴런이 갈망하듯이 속삭였다. 조용하지만 날 선 울림이었다. "당장."

 

그리고 옌인위는 쫓겨났다. 사이버스페이스의 빛나는 환각이 사라진 방은 어둡기만 했다. 꿈이었나? 아니, 아니다……바지에 손을 넣어 덱이 아직 작동중임을 확인했고, 쓰러지듯이 벽에 기댔다.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모듈 속을 내달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다. 처음에 느꼈던 당황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문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생각은 그 지점에서 나아갈 곳을 잃고 움직임을 멈췄다. 

 

멀리서 기어오는 순찰대의 사이렌 소리가 창문에 손가락을 걸쳤다. 

 

옌인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빛이 창틀 사이로 몸을 밀어넣으며 부채꼴로 뚜렷하게 퍼져나갔다. 예리한 빛의 단면이 깊숙이 들어와 뇌마저 얇은 조각으로 가르는 듯했다. 귓속에서 기억들이 출렁거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 수많은 밤이 유선형의 궤적을 그리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 나섰다. 린즈잉이 처음으로 흘린 눈물도, 가로등을 피해 휘청거리던 밤의 도로들도, 질식할 듯한 정적을 지겹게 파고들던 덱의 울부짖음마저도 그의 자리에서는 모두 똑같은 색으로만 보였다. 어둠이었다. 

 

지겨울 정도로 맛보았던 정적과 좌절은 그의 인생을 점거하다시피 했다. 낮에는 눈을 붙였고 밤에는 덱에 기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어떤 성취도 만족감을 안겨 주지는 못했다. 애당초에 목적지는 0과 1로 표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거의 모든 구역을 밟아 보았고, 가끔은 누구보다도 더 깊이 파고들었지만, 결국 앉게 되는 곳은 자그마한 골방이었다. 린즈잉의 집을 떠나 도시 외곽에 단칸방을 하나 잡은 이후로 옌인위는 거의 매일 울곤 했다. 보안국에게 들킨 건 의도적인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린즈잉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 날도, 그가 일부러 흔적을 남겼던 몇 주 전의 밤에도 보안국의 불빛은 침착하게 눈을 여닫고 있었다. 옌인위는 어쩌면 그런 빛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조밀한 유리화처럼 결합한 어둠은 일정한 주기로 깜박이며 희고 붉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정전기 알갱이들이 보이지 않는 축을 따라 회전하며 모호한 형상을 이뤘다. 파열, 그리고 다시 재생성……하얀 고리는 하늘의 눈처럼 수축과 팽창을 거듭하며 점차 그의 내면 전체로 확대되어 나갔다. 이제 시야에 남은 것은 고리의 우측 상단뿐이었다. 검은 바탕에 비스듬히 걸친 원―기혁의 상징이었다. 갸름한 도형은 저우숴런의 말을 강조하듯이 가물거리며 사라지다가도 다시 밝아졌고, 한동안 불규칙적인 순환을 지속했다. 그러나 두꺼워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마침내 흰 빛이 그의 눈을 덮었다. 어지러운 의식 사이로 명료한 속삭임이 틈입했다.

 

오세요, 당장……

 

동시에 모듈이 발작하듯이 웅얼거렸다. 그는 눈을 떴고, 여전히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딘가 좁아진 느낌이었다. 사이버스페이스의 광활한 찌꺼기가 그 속에 남아 세상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옌인위는 힘겹게 일어나 왼팔로 벽을 핥으며 걸음을 옮겼다. 방에서 방으로, 그리고 거실로. 린즈잉의 그림자가 창가에 몸을 겹친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찌를 듯한 불빛들이 잔잔한 어둠 위로 두드러졌다. 린즈잉이 그를 돌아보았고, 말했다. 내려가지 마. 순찰대야. 그와 동시에 똑같은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와글거리기 시작했다. 가. 가. 내려가십시오. 이 목소리는 유독 굵었다. 가서 사람들을 만나. 옌인위는 비틀거리며 신발을 신었다. 그는 린즈잉이 따라오기 전에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고, 사람들 속으로 몸을 던졌다. 누군가가 그를 알아보았다. 도망쳤던 놈이야. 세상이 서서히 뒤틀렸다. 발이 허공을 몇 번 밟더니 누군가가 그를 자동차 속으로 밀어넣었다. 

 

모듈로부터 넘쳐 흐르는 목소리들이 서서히 머릿속을 메웠다. 세상은 자동차의 바퀴들을 축으로 해서 회전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계속 빙글거렸다. 무의미하게. 옌인위는 입을 틀어막고 허리를 굽혔다. 약을 한 게 틀림없다느니 하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안 그러면 제 발로 나올 리가 없지. 그나저나 신원은 확인했어? 놓치기 전에 확실히 알아뒀어야지. 그는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도심을 가로질러 보안국 본관에 도착할 때까지. 옌인위는 거인의 등처럼 보이는 문을 향해 물었다. 진정제 없어요? 진정제.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누군가가 대답했다. 곧 먹을 거야. 보채지 말라고. 먼저 문이 열린 다음 진입 허가를 알리는 기계음이 세 번 울렸고, 정정하듯이 또 두 번 울렸다. 그때까지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안쪽에서 무슨 일이 났나?

 

모르겠는데요. 기다려 보죠.

 

모듈이 다시 삑삑거렸다. 가. 빨리 들어가. 린즈잉의 목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옌인위는 그대로 발을 옮겼고,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닫혔다. 익숙한 어둠이 눈앞을 메웠다. 복도의 새빨간 불빛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짝일 뿐이었다. 정신은 비교적 맑아졌지만 모듈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계속 가. 천장의 전등은 길잡이처럼 그보다 항상 한 발짝 앞서나갔다. 걸음을 내딛으면 그 앞의 불이 눈을 뜨고 뒤의 것은 사라지는 식이었다. 인기척은 거의 없었다. 짜증 섞인 고함이 간혹 모서리를 따라 기어나오기만 했다. 그리고는 저우숴런이 눈 앞에 나타났다. 아니, 고장 쪽지가 붙은 청소용 안드로이드였다. 누군가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있었다. 옌인위는 그곳이 자신이 저우숴런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던 곳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의문은 다시 당황으로 모습을 바꿨다.

 

"저우숴런!" 

 

옌인위는 거의 애걸하듯이 외쳤다. 물론 그녀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없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그는 다시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듣지 않는 편이 낫다. 아니, 말하지 않는 게 훨씬 나았다. 

 

"반갑습니다―저는 딩이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옌인위는 입을 다물고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았다. 까맣기만 했다. 딩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모든 정보를 사전에 개방하지 않은 것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혁지도조는 당신의 헌신에 감사를 표할 것입니다." 묵직하고 단조로운 목소리가 벽과 벽 사이를 가로지르며 깊게 울렸다. 딩이가 짧은 정적 위에 무의미한 위로를 겹쳤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한다고요? 뭘 걱정해요?" 옌인위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걱정이요? 누굴?"

 

"허락은 이미 받았습니다. 당신은 '무언가 하겠'다고 했지요―이제 약속을 이행할 차례입니다." 단조로운 음역에도 불구하고 딩이는 웃는 것 같았다. 웃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이제 저를 거의 그 쪽으로 옮길 겁니다. 아프진 않습니다.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저우숴런은? 그 여자는 어디 있어요?"

 

"아시지 않습니까. 홀로그램입니다."

 

옌인위는 주위를 몇 번이나 둘러보았고, 어둠 속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제야 모든 게 사이버스페이스에서 나와 현실로 한 걸음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자신마저도.

 

"속인 거야." 그가 힘없이, 단정적으로 내뱉었다. 

 

딩이의 반론이 이어졌다. "아닙니다. 다만 공정한 합의를 원했을 뿐이죠. 당신이 첫 번째로 여기에 왔을 때 이미 제 일부를 옮겼습니다. 반쯤 홀렸던 걸 기억하시겠지요―그러니 당신을 사이버스페이스 상에서 만날 필요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무선으로 연결된 상태였고, 제 일부만으로도 무의식에 간섭하기엔 충분했으니까요. 어떤 방법으로건 여기에 와서 제 나머지를 물려받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러니 제가 최대한 신사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우숴런의 형태로 교섭을 취한 것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게 이질감과 반발감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거짓말!

 

"예, 린즈잉이 좋아하겠네요."

 

"당신의 수양 누이 말입니까?―글쎄, 모든 이성은 그 구성요소만큼이나 복잡합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래요……"

 

옌인위는 수많은 말들을 억지로 삼켰다. 대체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린즈잉이 좋아하지 않으리란 것이? 아니면 자신의 상황이? 아니면 남은 사람들이?……그리고 모든 게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