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음, 잠시만요. 아, 됐습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여자가 들어오자 남자가 책상을 급히 치우며 건낸 한 마디였다. 그의 옷차림과 정갑이 가면서도 다소 사무적인 태도를 보았을 때, 그는 아마도 의사인 듯 했다. 말 없이 등받이 없는 동그란 쿠션 의자에 몸을 기댄 -아니, 이건 좀 이상하다-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의사가 친절한 표정으로 말한다. 또 다시 침묵. 남자는 그런 것에 익숙한 듯, 가로로 긴 타원형의 안경을 치켜 올린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는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자, 자. 편하게 하세요.\" 그제서야 입을 연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 (그러나, 대충 닦인 마스카라가 드문드문 보이는 눈두덩을 보았을 때, 이미 한껏 눈물을 쏟아 내었던 것 같았다) \"으음... 그러니까요...... -여자는 할 말이 많은 듯 눈가를 살짝 찌푸린다. 저, 이거 비밀 유지되는 거 맞죠?\" \"-남자는 슬슬 밀려오는 짜증을 애써 참으며- 네, 그럼요. 그런 쪽으로는 안심하셔도 좋아요.\" 말했다. 물론 남자가 이런 일로 짜증을 낼 리는 없다. 그에게는 한 없이 익숙한 일이니. 정신과 의사에겐 말이다. \"실은... -여자는 말을 뜸들인다. 요즘, 너무 외로워요.\" 정신병원이라는 곳이 워낙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이 잡혔기도 하고, 그런 인식이 크게 다른 것도 아니고- 무슨 뜻으로 말 한 거지? 남자는 한순간 당황하지만 평정을 유지한다. 그는 병원을 운영하며 다양한 환자를 만났고, 그 환자들은 그의 도움을 간절히 바랐던 것이다. 그런 위치에서 의사는 항시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며, 환자가 불안해 하지 않게, 환자의 말을 제대로 듣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아 죄송해요. 갑자기 본부론터 이야기하니까 놀셨라죠?\" 왠지 모르게 여자의 말이 괴상하게 들려온다. 이런 일이 또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남자는 말한다. \"네, 요즘 외로우시다고요? 그럼 그 이유가 뭔가요?\" \"저에게 애인이 한 명 있는데요. 요즘 자꾸... 자꾸, 저와 멀어지려 하는 것 같아요. 너무 외로워요.\" 남자는 자신의 진료실이 연애상담소가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아, 네. 그럼 그거 때문에 많이 힘드신가요?\" 애써 퉁명스러움을 감춘다. 여자는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평소에도 계속 이랬으니, 이젠 익숙해져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아니, 그럼 왜 여기까지 와서 상담을 받고 있는 거지? 남자는 머릿속으로 빈정거린다. \"하지만, 제가 걱정인 건, 이 외로움이 언제쯤 끝날까 하는 거에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네, 그렇군요.\" 뭐, 그래도 역시 고민이 있으니 병원까지 오는 거겠지. 남자는 생각을 고친다. \"계속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기다려도, 오지 않아요.\" \"무뚝뚝한 애인인가 보네요.\" 여자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이전까진 저에게 잘 해줬어요. 언젠가부터 그러기 시작했죠. 이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말 모르겠다구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죠?\" 바람이군. 남자는 그렇게 끝을 맺었다. 일단 애인과 어떻게든 정리하라고 권유하고, 우울증 치료라도 해야겠어. 오늘은 일단 적당히 해서 보내면 되겠네. -그 때, 여자가 선수를 친다. \"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역시 갑자기 와서 상담을 받다보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어서 너무 번잡스럽게 말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 한 내일 정도, 이 시간대에 다시 올게요.\" 남자는 눈치 빠르게 인사한다. \"언제든지 다시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뭔가 찝찝한 느낌. \"제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요......\" 그 다음 날에도 연애상담을 하는 듯한 남자의 기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병을 치료하는 것이 목적인 곳에서 왜 내가, 하며 푸념을 늘어놓지만. 까놓고 말해서 그의 직장에는 손님이라곤 달리 없었다. 정신병원이라고 다들 쉬쉬하는 와중에, -물론 병 가진 사람은 널렸다만- 어디 사람들이 오겠는가. 전날에도 손님이라곤 중국집 알바생이 전부였다. 간만에 사람이 와서 반사적으로 너저분한 책상도 치우면서 환대했더니, 별 이상한 여자만 들어오고. 대화도 그리 길지 않았지. 기껏해야 10분? 나 참, 아무리 그래도 의산데, 이런 꼴이나 하고... 그는 끝없이 머릿속으로 잡다한 문장들을 내뿜어댔다. 긴 문장, 짧은 문장. 마치 타자기에 찍혀 나온 듯 검정 잉크로 씌여진 그것들은 다양한 폰트로, 다양한 크기로 줄줄이 이어진다. 실타래처럼, 뱀이 또아리를 튼 거라고도 할 수 있을까. 이제 그 뱀은 누군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쉬- 하며 혓바닥을 내밀고 낼름낼름......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아요?\" 아, 흩어졌다. 허무한 탄식. -누가 한숨을 쉬는 건지- \"네? 네. 듣고 있습니다.\" 굴림체의 문장이 머릿속을 흐른다. \"정말 듣고 있는 거 맞죠?\" 분노 한 줌이 끼어 들어간, 끝으로 갈 수록 점점 커지는 모양새군. 물음표는 선홍색이다. \"당연히 듣고 있죠! 의사인 제가 듣지 않으면 또 누가 듣겠습니까?\" 같잖은 허풍이다. 상황은 시트콤처럼 전개된다. 추궁하는 여성, 반박하려 애쓰는 남성. 결국 의사가 질게 뻔하지만. (갑과 을의 관계, 진료비는 받았던 것 같았다) 그래도 그는 특유의 능청스러움이 있었다. 첫 대면 때, 그 정감있는 모습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그럼, 지금까지 했던 말들을 정리해 보죠. 자, 애인을 처음 만났을 때, 어땠다고요?\" -자신있는 문장. 여성은 다시 말을 곱씹는다. 성공! 머릿속으로 외치는 의사. \"음... 네, 다시 말하간 좀 오그라들지만, 마치 꽃밭을 거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황홀한, 뭐, 그런 느낌?\" 알록달록한 문장이군. 남자는 키보드를 만지작 거린다. 타자기는 개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리고, 어... 약간 두려웠어요. 첫 만남부터 그랬죠. 두려운 기분. 지금처럼 될걸 미리 알았던 것 같기도 하고......\" -시트콤! \"지금은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는데요?\" \"네, 그래도 역시 대화를 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아요.\" \"역시 그렇죠?\" 남자는 여자에게 씩 웃어본다. 그녀도 싫지는 않은 눈치다. \"네, 그래요.\" 좋지도 않은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럼, 이제 느낌만 말하지 말고, 당시의 풍경도 한 번 말씀해 보세요.\" 남자는 대화를 이어간다. 여자와의 대화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계속할 노릇도 못되었다. 한 여성의 연애문제에 관한 상담도 슬슬 질리는 차였던 것이다.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속된 말로 일을 귀찮게 만들 \'싹수\'가 그에게는 보였다) 이미 여자에 관한 진단 결과는 끝나 있었다. \'애인의 -아마도 바람에 의한- 부재로 생긴 우울증.\' 그러므로 의사는 관계를 정리하는 것을 추천하는 게 맞았지만, 그녀가 너무나 애인을 사랑하는 것이 보였고, 막대한 양의 잡담과 잡생각들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물론 여자가 제대로 된 부연 설명을 첨가시켜 준다면, 성심성의껏 상담해줄 의사가 의사에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겐 그녀가 하는 설명들이 너무나 막연하게 보였다. 대화를 이끄는 것이 그의 몫이긴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황은 전혀 진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에게도 정신병을 고쳤던 경력은 있었다. -당연히 이런 세세한 이야기는 짧게짧게 서술하겠지만- 그가 인턴으로 나가 있었을 때부터,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병원을 차렸을 때까지의 손님들에 대한 짧고 굵은 일화들이,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과, 서재의 한 공간을 차지했다. 다만 이번 \'환자\'의 경우는 처음이었다. 여러가지 의미로.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여자가 의기소침하게 말했다. \"잘 기억이 나질 않아요.\" 여자가 의기소침하게 -한 번 더- 말한다. \"어휴...\" 남자는 한숨을 쉰다. 첫 만남이 어디서 있었는지도 모르다니, 뭐야 이게? \"기억이 왜 나지 않으시는 거죠?\" 여자는 풀이 죽은 듯 눈가가 조금씩 빨개진다. (다행히 오늘은 마스카라를 바르고 오지 않았다) \"아니, 울지 마시고, 왜 기억이 안 나시는지 말씀해 보세요. 아니면 이전 기억을 곱씹어 보는 것도 좋아요.\" 기대심 반, 그리고 또 다른 기대심 반. 첫 번째 기대심은 혹시 여자가 과거의 기억을 뚜렷하게 기억해 내 진료에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것. -이고, 두 번째는 혹시나 이 여자가 과거를 생각하며 애인에 관해 불만을 가지거나 싫증을 느껴 헤어지고는, 치료를 받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그때쯤 되면 우울증 같은건 눈 씻은 듯이 사라질 것 같다만. 뭐, 둘 다 좋았다. \"술집, 이었던가?\" 여자가 중얼거렸다. 의사는 키보드를 만지작 거린다. 머릿속은 타자기를 하나 살까 고민하면서, 입을 연다. \"술집이요?\" \"네,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드디어 기억을 되살려 낸 여자가 말한다. 아, 그러면 까먹을 수도 있겠다. 남자는 1번 기대심에 희망을 건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어요. 주위 공간이 막 배배 꼬이고, 뒤틀리고...\" 술 마셨으니까. 진료가 길어질 예감이 든다. \"고생 깨나 하겠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지금 술집이라고 제가 취해서 까먹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지금 다 기억 났어요! 저는 술 안 먹었다고요!\" 거짓말. 남자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그렇다면 왜 그 전까지는 기억을 하지 못한 겁니까? 애인과의 소중한 추억이잖아요.\" 여자가 말한다. \"잘 모르겠어요. 미안해서 어쩌지... 첫 만남조차 까맣게 잊어 버리다니......\" 연애상담가는 당황한다. \"아니,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보아하니 꽤 오래 사귀신 것 같은데, 까먹을 수도 있는거고. 애인이 몇 날째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면서요? 그것 때문에 걱정하느라 잊어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일단 진정하세요.\" 그리고 사과는 나한테 해야지. 여기서는 헤어지는 것을 권유하면 역효과만 날 뿐이다. 남자는 타자기에 관한 생각을 그만두지 않고 있었다. 괜한 집착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인지. 물론 그런 물건을 들여 놓는다면 꽤나 멋은 나겠지만, 쓸데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믹서기, 오븐, 전자레인지... 막상 사놓아도 많이 쓸 일은 없는 물건들이 자꾸 발목을 잡는 것이다. 그도 알고는 있을 터였다. \'쓸데\' 없다는 거. 비싸기만 하지. \"왤까요? 왜 기억이 나질 않죠? 그저 술집에서 만났다는 것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아요. -\"당시에 느꼈던 감정이나 느낌은 남아있다고 하셨잖아요?\" 구체적인게 기억이 나질 않는걸요? 느낌만 알아서 뭐 해요. 그런건 얼마든지 둘러댈 수 있는 거잖아요. 그이가 싫어하면 어쩌지...\"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기대감1이나 2나 둘 다 틀렸다. 그녀는 기억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제대로 된 원인 -애인- 을 제거할 생각도 없는 채로 진료실에 앉아 있다. \"진짜 술 안 먹었어요?\" \"안 먹었다니까요?\" \"다른 추억은, 뭐, 기억나는 거 없나요?\" 여자는 곰곰히 생각한다. \"잠시만요...\" 건망증이 좀 심하다. 아무리 오래 못 만났다고 해도 그렇지. 이번 상담이 끝나면 호두같은 거나 추천해 볼까... -라는 문장이 의사의 뇌를 한 바퀴 돌아 미안을 관통해 바람에 날리듯 부드럽게 돌아가 그의 왼쪽 귀로 슬며시 빨려들어갔다. \"저기, 혹시 호두......\" \"아! 생각났어요!\" 여자가 자신있게 말한다. \"공원 벤치! 공원 벤치요!\" 흔한 추억이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평범하죠, 뭐. 자연스럽게 수다 떨고, 손 잡고, 커피 마시고. 대충 그게 다에요.\" \"정말, 평범하네요.\" 불현듯 떠오는 생각. -\"아! 어제와는 다르게 오늘은 꽤 오래 앉아 계신데, 의자는 안 불편하세요?\" 여자는 뜬금없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린다. \"딱히 안 불편한데요? 이 의자 좋잖아요. 높이 조절도 되고.\" 괜한 오지랖일까. 그렇다 해도 수상한 것이 너무 많다. \"등받이도 없는데, 허리 안 아프세요?\" \"괜찮은데요? 갑자기 왜요?\" 혹시나 해서... \"워낙 손님이 없다보니, 의자같은 거 신경쓸 일이 없잖아요. 제가 거기 앉아 볼 일도 없을테고.\" \"은근히 배려심이 깊으시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이제야 생각난 건데요 뭘.\" 갑자기 떠오른 생각. 문득 떠오른 생각. 때로 이런 것들은 당사자의 주의를 끌고, 끈덕지게 달라 붙을 때가 있다. -타자기라던지- 바로 지금이 그랬다. 여자의 입장에선 애인과 보낸 추억이 중요한 일이겠지만, (의사에게도 그래야 하지만) 너무나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그녀의 대화법에 남자가 관심을 가질 리 없었다. 그는 막연한 호기심을 품었다. 왠지 이 여자에게는 이상한 점이 있다. 그게 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그녀와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면, 그녀의 행동과 버릇 등에서 특징을 찾아내 생각해 보는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그였다. 그래도 그는 \'의사\'였고, 쓸데없이 호기심이 흘러 넘쳤다. 특히 이번 경우에는 말이다. 남자는 안경을 고쳐 쓴다. 그리고 여자를 세세히 관찰한다. 얼굴, 팔, 다리, 몸. 그녀가 애인과 헤어지려 하지는 않겠지. -그러면서 생각한다. 그래도 눈에 보이는 원인은 그것 뿐이야. 더욱 세세하게. 그녀의 과거 이야기는 그다지 쓸모가 없어 보이고... -눈, 코, 입, 귀, 머리카락- 지금 말하는 거만 봐서는 우울증도 아닌 것 처럼 보이고...... -손, 발, 가슴, 배, 허리- 슬슬 범죄나 다름 없게 되어 가는데, 그래도 전에 말한 걸 보면 분명 증상은 있어. 이제 여자의 주변을 관찰한다. (혹시 모르니까) 원래는 새하얬지만 하도 손님이 안 와 담배만 뻑뻑 피워 누렇게 물들어 버린 벽지, -대화에 진전이 없어, 무언가 기억이 나게 할 방법은 없을까- 그 아래를 차지하고 있는 침대. (어디 쓸 곳이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져 온 듯 했다.) 여자의 왼쪽 -남자쪽에선 오른쪽- 에는 초록 페인트를 칠한 네모난 창문이 있는 문이 보였고, 여자의 오른쪽-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뭐 해요?\" 고민에 빠져있던 여자가 퉁명스럽게 묻는다. 남자는 괜히 뜨끔해서 둘러댄다. \"아니, 그냥 인테리어를 어떻게 바꿀까 고민중이었어요.\" \"인테리어를요?\" 한 쪽 눈을 치켜 올린다. \"손님도 없다면서 왜 바꾼데요?\" 이 여자, 심기가 불편한 것이 틀림없다. 남자는 능청스럽게 말한다. \"손님이 없으니까 인테리어를 바꾸죠. 매일매일 같은 것만 보고 있으면 얼마나 지루합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 \"납득은 되네요.\" 남자의 질문. \"그래서, 생각은 나요요? 벤치 이야기 말고.\" \"딱히 생각나지 않는데요?\" -또 이런다. \"아니, 애인이랑 대체 얼마나 사귀셨길래 그렇게 추억이 없어요?\" \"이제 1년 다 되어가죠. 근데 만난 시간은 채 100일도 안 될 걸요.\" 갑자기 우울해진 그녀가 고개를 떨군다. 그러든 말든, 남자 또한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황에 얼굴을 찡그렸다. 이제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좀 더 풍성하게 해야 하는데. 뭔가 진전이 있어야 되는데. 의사는 고민한다. 이제 쌍으로 고민한다. \"저, 오늘은 이제 그만 할까요?\" 고민하는 사람 1이 말을 꺼낸다. 내가 의산데, 왜 그쪽이 먼저 말하는지요. \"네, 뭐 그렇게 하죠. 대신-\" 말을 잇는다. 이렇게라도 해야지. \"숙제가 있습니다. -\"뭔데요?\" 애인과의 추억을 기억해 오세요. 이제 슬슬 당신이 뭐가 고민인지도 종잡을 수 없게 되어가는데, 실마리라도 잡아 봐야죠.\" \"그 정도야 쉽죠. 또 할 건 없나요? 치료에 도움되는 거라든지.\" 쉬운 일이면 진작에 얘기를 할 수 있었겠지... \"그럼 그 애인 프로필이나 가져오시죠. 건망증이 얼마나 심한가 테스트 좀 해보게.\" 정신과 의사가 빈정거린다. \"신체 사이즈 같은 거요. 키나 몸무게, 이런거.\" \"제가 그런 걸 언제 재봤겠어요! 눈대중이라면 대충 쓸 수는 있겠는데, 이거라도 괜찮은가요?\" 그래도 무시당하는 건 싫은 모양이다. 의사는 머리를 굴린다. \"그림이라도 그려 오실래요? 그래, 그림 좋네. 그릴 줄 알죠?\" \"잘은 못 그리는데요? 그리고 만난 지가 오래돼서 생각도 잘 안 나요.\" \"어떻게든 그려 오세요.\" 여자가 툴툴댄다. \"효과는 있는 거에요?\" 아니, 헤어지면 바로 해결될 것 같은데. 그래도 진료비는 받는 그였다. 여자가 나간 뒤, 나는 멍하니 앉아 그 동안 휘갈겼던 기록들을 뒤적거렸다. -시점의 변화? 이 여자와 수다를 떨기 시작한 날이 몇 일 전이었더라? 장수가 왜 이리 많아? 얼마 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대충 세어보니 10장이었다. 이렇게 많을 리가 없는데. 뭐지?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곧 생각을 정리한 나는 첫 장부터 세세하게 읽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그래야지. 총 열흘 치의 기록들이다. 앞의 몇 장들을 썼던 기억이 난다. 1일 차, 여자의 이름(이건 공개할 필요가 없다)이나, 몸무게, 키 등등 잡다한 사항들이 써져 있고, 여자가 말한 자신의 증상(외로워 한다)이 물음표와 함께 휘갈겨져 있다. 2일 차, 오늘이다. 이때의 나는 그녀에게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나중가선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역시 간단한 여자의 신상정보가 기록되어 있었고, 예의상 적었던 \'그녀의 애인\'에는 역시 물음표가 자리하고 있었다. 원래 상담이란게 좀 오래 걸리는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의문점으로 가득찬 사람을 나도 처음 보았다. 두 번이나 만났는데. 아직까지 이야기의 진도도 빼지 못하고 있다. 나름대로 노력은 많이 해보았지만... 결국 나도 극약 처방으로 유일한 실마리인 애인의 간단한 모습들을 기록해 오라고 했다. 물론 쓸모있을 리 만무하다. -이 외에는 멍청한 타자기에 관한 기록이 쓰여 있었다. 그 아랫쪽은 내가 뭐라도 얻기 위해 발버둥 친 기록들이다. \'그녀가 수상하다.\' 마지막 줄에는 이렇게 써놨다. 3일 차, 이게 뭐지? 내 기억 상으로는 그녀와 상담을 한 지 이제 채 2일이 지났는데, 내일의 기록이 왜 여기 있는 걸까. -남자는 의문을 가진다- 다른 종이들도 이럴까? 일단 읽어보자. 분량이 길어졌다. (어떻게든 성과를 얻은 걸까) 여자의 신상 정보(생략) 다음에는 여자의 증상이 적혀 있다. 막연하게 우울증이라 추측만 해 왔던 상황에 이건 처음이었다. -건망증? 남자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를 만난 장소는 꽤나 뚜렷하게 알고 있다. 당시의 분위기나 감정 등을 설명하며 즐거워 했다. 그녀가 그린 애인의 그림과 그의 신상정보 (역시 쓸모가 없다, 라고 적혀있다) 첨부. 그림과 신상정보? 내가 오늘 숙제로 내 줬던 그건가? 한 편으론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대감과 신기함이 겹쳤다. 어떻게 이런게 가능한 거지? 무수한 의문과 혼란이 나를 덮쳤다. 찬찬히 생각해보자. 일단 지금 해야할 걸 생각하자. \'그녀가 기록해 온 것은 어디있지?\' 일단 내가 들고 있는 이 종이들에는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아까 장수를 세어 보았으니. 나는 손에 든 것을 내려 놓고 서랍장을 열어 안을 살핀다. 여긴 없고, 책장. 자리에서 일어나 뒤져본다. 여기도 없네? 설마 버리기라도 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쓰레기통을 열어 본다. 역시 없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A4용지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오싹함\'이었다. 사람이 진짜 놀라면 말도 안 나오는 건지. 아까는 없었던 그림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이 여자, 그림 못 그린다더니. 디자인에 소질이 있는 걸까.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하자. 색연필인지, 물감인지, 혹은 컴퓨터로 그려 출력한 것인지. 기록에 씌여진 대로 \'쓸모가 없었지만\'. 적어도 그 당시의 내가 혼란스러워 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사실 그는 \'그림\'보다는 방금까지 없었던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더욱 혼란스러워 했다- 검은 실루엣. 그림자라고 불러도 되려나? 이 여자는 뭐 하는 사람이지? -간단히 그림의 모습을 표현해 보자. 구겨진 건지 구긴건지 모를, 한 때는 흰색이었을 종이에는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무늬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여자가 표현한 \'황홀한\' 모습인가? 빨강, 파랑, 초록, 노랑. 다양한 색깔들이 꽉꽉 들어찬 종이의 가운데는 어느 키 큰 남자 형태가 새까맣게 들어차 있었다. 이게 대체... 뭘까? 다음장을 본다. 실루엣의 신상 정보. -쓸모 없었다! 자, 정리해 보자. 오늘은 그 여자를 만난 지 이틀 째이고, 나는 그녀를 수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한 실마리는 그녀의 애인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떠나고 전에 기록해 놨던 종이들을 살펴보려 하니 그 장수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이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직 세 장째 밖에 보지 못했지만 분명 이 종이들에는 오늘까지의 일을 제외한, 8일 가량에 달하는 \'미래\'의 진료 기록이 쓰여져 있을 것이다. (정리해 봐도 전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다) 아무 예고도 없이 나타났던 그녀의 \'애인\'이 그려져 있던 빌어먹을 그림을 보았을 때, 분명 이 애인이란 놈은 그녀의 상상 속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정리 끝, 목말라 죽겠다. 일단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물 부터 마시자.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지- 걸음을 옮겨 초록색 문(참 매니악하게 생겼다)을 열고, 컵을 챙겨 정수기로- 어? 문이 열리지 않는다. 쓴 웃음이 지어졌다. 이거 무슨 스릴러 같은 거 아냐? 누가 나한테 뭔가 원한이라도 가지고... 그렇게 치면 판타지나 SF같은 장르일 수도 있겠군. 비록 이런 황당한 농담이나 하고 있지만, 난 그래도 충분히 겁에 질려 있다. 이거 좀 불안한데. 한 번더 손잡이를 돌려본다. 확실히 잠겨있다. 이럴 필요까진 없지만... 아까워라...... -남자는 팔꿈치로 문에 달린 네모난 창문을 찍어 깨뜨린다. 왜 이렇게 어두워. 일단 문부터 열기로 한 나는 조심스럽게 깨진 창문에 팔을 넣어 바깥쪽 손잡이를 돌렸다. 고작 물 하나 마시려고. 이러니까 좀 낫긴 하다.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진료실을 나왔다. -평소와는 다를 텐데- 평소와는 다른 느낌. 마치 동굴 속에 들어 온 듯한 공간감이 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불길하다. 여기가 이렇게 넓었나? 그럴리가 없지. 이게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판타지, 호러, 스릴러 등, 남자의 머릿속에 다양한 장르가 개성을 뽐내고 있다- 일단 문부터 닫자. 정수기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물은 마시지 않기로 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땀은 계속 흐르고. 머릿속의 타자기가 -그놈의 타자기- 끊임없이 문장을 쳐 낸다. \'왜, 나, 한, 테, 이, 런, 일, 이, ?\' 엔터 누르고. 나는 병원 침대에 걸터 앉는다. \'원, 인, 이, 뭐, 지, ?\' -뭐일 것 같아? \'그, 여, 자, 때, 문, 인, 가, ?\'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혹시 또 모르지- 타자기 생각은 여기에서, (정, 말, 뜬, 금, 없, 네,) -꺼져, 타자기! 그만 두기로 하자.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만약 지금 벌어지는 일이 누군가의 스케일 거창한 장난이라면, 그 인간이 바라는 일은? 평소와는 분위기가 다른 모습의 어두컴컴한 진료실의 밖을 누비기? 나는 책상을 바라 본다. 아니면 안전하게 자리에 앉아 저 종이 뭉치를 들여다 보는 거? 나는 후자를 택했다. 저런 곳에 어떻게 나가. 이게 정답일지는 모르겠지만... -뭘 고르든 똑같았을 거야- 4일 째부터 읽으면 되나? 새로운 정보가 나올지도 모른다. 아주 만약의 경우라면 이 병원에서 (내 직장이라는 점이 아이러니 하지만) 탈출할 수도 있겠지. 나는 다시 자리에 가서 앉았다. 4일째, 대체 어떤 내용이 쓰여져 있을까? -읽어 보면 알겠지- 썩 자랑스러운 것이 3일째 이후부터는 그녀를 확실히 \'치료 대상\'으로 인식한 것 같았다. 그녀가 말한 것들이나, 행동들이 꽤나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그녀는 자신의 애인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뭘 하면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한두 가지가 의심스러운게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걸까? 그렇다고 쳐도 이상한 건 많다. 그는 아직도 기록들을 살펴보고 있다. 5일째,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제외한다면 요약은 쉽다. 여자는 꽤나 심각한 허언증에 빠진 것 같다. -허언증이 뭔지는 알겠지-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꽤나 정상적인 사람이었는데. -감정의 변동이 심하다. 이건 그도 꽤 실감하고 있었다. 병원 안에서 그와 대화를 할 떄는 꽤나 밝은 성격을 보였으나, 자신의 애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우울해 보였다. 그리고 집에서는 엄청난 -또한 익숙해진- 외로움을 겪는 듯 했다. 뭐, 결국 원인은 \'애인\'이다. 헤어지는 것을 추천해 봐야겠지. \'나\'는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넌\' 다음장을 펼치겠지. 6일째,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허언증, 극심한 외로움, 감정의 변동. 남자는 역시나 애인과 헤어지는 것을 추천한 모양이다. 그게 실제 애인일지는 잘 모르겠다만. (만약 실제 애인이라면 이게 제일 좋은 해결책이리라) 그리고 밑줄. \'여자는 분노했고, 이후 병원을 나갔다. 그 여자 성격 참. 이 여자 성격을 봤을 때, 한 며칠 정도는 안왔을 것이리라. 대충 넘겨짚으며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7일째, 일주일째 되는 날이군. 기록이 남아있는 걸 보면 그래도 찾아오긴 온건가? 자기가 환자라는 것은 인지한 듯 했다. 신상정보, 빽빽하게 쓰여진 기록지에 추가된 내용이 있다. 그녀는 나의 (정확히는 5일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저 비웃기 위해 찾아 온 것 같았다. 이거 꽤 심해지는데. 어쨌든 이제 이 여자는 확실한 치료가 필요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았다. 침착한 설득.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인 상태였다. 감정은 점점 고조되고, 냉담해진 그녀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다. 나는 이런 상대를 어떻게 대처하려고 했을까? 8일째, \'여자의 감정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 여자 성격 참- \'애인에 대해 질문하자 울기 시작했다\'. 그 실루엣은 분명 그녀의 상상속 인물이리라. 6일 뒤의 나는 그녀에게 약을 처방했다. 항우울제. 일단은 상담을 계속 받게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 -라는 생각. 딱 나답다. 나는 이제 어떻게 행동할까. \'애인의 존재를 상상 속의 존재로 인식시켜야 한다\'. \'많이 힘들겠지만 이게 최선이다\'. 9일째, 절정에 접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그동안의 이야기를 이야기했다. 6일과 7일 사이의 시간동안 (그녀가 분노해서 병원을 나간 날이다) 벌어졌던 일. 그녀는 애인이 다시 찾아왔다고 말했다. 왜 그 전엔 말을 안했냐고 물었더니, 애인이 언급을 하지 말라고 했나 보다. 실루엣이 말도 하고, 신났네. 그 애인이란 존재가 실존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극에 달한 허언증을 보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치료를 거부했다. 하지만 애인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마침내 생겨난 기회다. 고칠 수 있다. 한참의 설득으로 그녀는 다음날 (10일째)에 한해서 오겠다고 말했다. -라는 내용. 이제 한 장 남았다. 딱 10장만 남았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종이의 갯수만 보고 판단하자면, 치료는 \'실패\'한 것 같았다. 안타깝군. 이제 마지막 장이다. 10일째. 아무 내용도 없다. -어떻게 된 일일까? 머리속에 떠오르는 변수야 많다. 그녀가 오지 않았다, 치료는 실패했다, 등등. 하지만 질문이 남아 있다. 왜 굳이 필요도 없는 10장째를 끼워넣은 거지? 치료가 실패했다는 암시? 이 기록들은 앞으로 내가 맞이하게 될 \'미래\'의 기록들이다. 확실히 9장에서 끊는다면 10장째는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를 내가 맞이할 미래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치료가 실패했다는 것이 암시로 깔려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는 걸까? 내가 당장 내일 예정되지 않은 일을 터뜨린다면 나중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를 텐데? 무슨 의도일까? 이 빌어먹게 스케일 큰 장난을 벌인 그 인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남자는 생각한다. 대체 무슨 의도일까? -남자는 생각한다- 이 10장째가 있으므로써 달라지는 일이 뭐가 있을까? 남자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나는게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애써 부정하는 그-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어. 애초에 이런 장난을 상대한 내가 병신이었어. -괜히 겁이 난다- 근데, 그런데, 장난이 아니라면? -\'장르\'는 변질한다-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의 몸에 다시금 식은땀이 흐른다. 혼란스럽다. -백지인 종이 한 장. 이 빌어먹을 장난의 결말은 나의 죽음이리라. -이제 부정할 수 없다- 혹 8일 뒤 내가 죽지 않더라도, -이게 모두 현실이라는 가정하에- 내가 여자를 만나려 하지 않아 미래를 바꾸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난 내일로 갈 수 없을 테니까. (타자기가 움직인다) -그는 몸을 벌벌 떨었다- 그럼 난 어떤 식으로 죽는 걸까? 당장이라도 저 문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다. (이, 건, 꿈, 일, 거, 야) 아니, 아니다. 미래의 종이도 튀어나오게 하고, 진료실 바깥을 저런 공간으로 만드는 자인데, 굳이 직접 나와서 그런 짓을 벌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한 방법을 쓸 것이다. (꿈, 이, 아, 니, 면, 안, 돼) -근데 이런게 현실에서 벌어질 일일까? 그가 생각했다. 타자기의 문장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뒤덮는다. 수만가지의 뱀들. 이리저리 휘적이며 움직이는 것들. 다양한 크기의, 다양한 색깔의 문장들이 혼란스럽게 꾸물거린다. 그리고 나는 어처구니 없는 확신을 갖는다. 이건 꿈일거야!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이건 꿈이야- 꿈이니까 이런게 가능한 거겠지. 내가 언제부터 자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게 꿈이 아니라도 별 수 없는 생각이었다. 아니, 꿈일 수 밖에 없다. 막연하게 느껴지는 바깥의 공간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종이가 허상이 아니면 뭘까? 미래의 내용이 쓰여진 종이들이 판타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소름끼치면서도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 무언가가 언제나 나에게 느껴졌다. 어느 하나 개연성에 맞는 게 없었다. 이게 만약 내가 주인공으로 그려진 소설 -맞다- 이라면 작가는 정말 더럽게 형편없는 인간이겠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뭐 말도 안 되는 소리겠지만, 대체 왜 상담에서 꿈의 내용으로 변하는 건지. 좀 똑바로 좀 쓰지. 그는 헛웃음을 짓는다. 꿈이라는 건 알겠는데. 그럼 이 꿈은 언제쯤 끝나는 거지? -곧 끝날거야. 음?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린 것 같다. -형편없는 글이니 이런게 가능하다. 그래, 역시 꿈이니까. 이상할 법한 일들은 오히려 그에게 확신을 가져다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인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계획된 일들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마치 자신의 모든 고난을 이겨낸 것 같이, 모든 걸 깨달았다는 듯이. -아닐 거라는 건 모른채 말이다. \"지금 무슨 소리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 당신들은 지금 남자의 말 옆에 큰 따옴표가 붙은 것을 보고 계십니다. \"누구야?\"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깨달아 주시길 바랍니다. \"하! 그렇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다 알겠어! 어떻게든 결말을 맺고 이 꿈을 끝내버려! 그럼 난 아침에 일어나서 이 빌어먹을 기분을 곱씹을 테니.\" 왠지 주인공의 성격이 이상해 진 것 같다. 남자는 아직도 소리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그는 생각한다. 누가 어딘가에서 계속 뭐라 중얼거리고 있어. -자, 여러분. 그럼 이제 의사는 어떤 행동을 보일 것 같습니까? 남자는 본능적으로 문을 벌컥 열어 재낀다. \"거기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지금 뭐라고 했어?\" -그는 이성을 잃었습니다, 독자분들- 그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동굴같이 넓고 서늘한 공간\'으로 대충 써놓은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무언가에 용기를 얻은 듯 자신있게 앞으로 걷는다. (이건 역시 꿈일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 이제 나는 생각해야 한다. 이미 결말은 모두 정해져 있고, 나머지는 모두 내가 즉흥적으로 써내려가는 것일 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의사와 만나는 것\'. 이게 어떤 의미든, 다른 사람이 보기엔 내가 그저 혼자 인형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최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고, 내가 원하는 대로 주물러서, 소화시키는데 편할 정도로 만들기 위해, 애쓸 것이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음료수를 벌컥인다. 자, 나는 이제 어떻게 이야기를 이어갈지 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 동안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대충 적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의사가 아까부터 소리를 빽빽 지르고 있지만 무시하자. 아, 의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이 등장인물의 모티브는 바로 \'나\'였다. 이유는 물론 별 생각 없었고. \'여자\'에 관한 모티브는 \'미지\'였다. 의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여자에 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정보는 없을 것이다. 제목? 제목의 의미는 일단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보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의사는 이제 숨을 헐떡이고 있다. 내가 이야기는 안 했다만, 그는 아까부터 뛰고 있었다. 좋지 않은 체력에, 그의 상태가 좋은 편도 아니라 오래 뛸 리는 없다. 지금은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분명 꿈일텐데... 왜 힘든 거지?\"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다. 꿈이라도 꼭 전지전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공감하겠지, 그는 걷고 있다. 말동무라도 해줄까. \"당신의 이야기가 지금 공백 포함해서 16266자를 차지하고 있어요!\" 남자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역시 나를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 답게, \"단편이야?\" 라는 유머러스한 답변을 내놓는다. -적어도 난 웃겼다- \"잘하면 중편 정도도 되겠는데요?\" \"날 얼마나 고생시키려고 그러는 거야?\" 남자는 이제 될대로 되라는 심정인 것 같다. 뭐, 그가 생각하기엔 이곳은 \'꿈\'이니까. \"힘든가요?\" -욕은 생략한다- \"당연하지!\" 그리고 말을 잇는다. \"대체 뭐 하려고 이런 형편없는 소설을 쓰는 건데? 그리고 그 여자는 대체 뭐야!\" 이유는 이미 앞에서 다 말했다.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고, 단편 분량으로 끝내려면 슬슬 이야기도 마무리 지어야 하기에, -남자는 터무니 없는 문답을 반복하다 마침내 어두운 공간의 출구를 찾아냈다. \"후, 이제야 끝났네. 질문에는 대답 안 해줄 거야?\"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미 다 말 했어요.\" 한숨을 쉰다. \"그런데, 누가 여기서 끝난다고 말했죠?\" 곧 끝난다고 말은 했다만 아직 끝낸다는 건 아니다. 비속어(생략). \'대체 왜? 뭘 하고 싶은 건데? 여기서 얻는 게 뭔데?\" 나름대로의 성취감? \"그건 이쪽으로 오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왜 거기로 가야 하지?\" 그래야 이야기가 끝이 나니까. 하지만 남자는 나가기를 거부하고 있다. 자, 어떻게 할까. 그는 시간을 끌고 있다. \"이 글의 주제가 뭐지?\" \"없습니다.\" 말 그대로 습작일 뿐이다. \"이 글의 제목이 뭔데?\" \"연인.\" 헛웃음 \"퍽도 괜찮은 제목이다.\" 그래도 나름대로 의미는 있는 제목인데. \"이야기를 단편으로 끝내려면 당신이 빨리 여기로 와야 합니다.\" \"대충 얼만큼 남았는데?\" \"3000자 정도요.\" 설마 이런 주제로 말싸움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짧은 분량 내에 결말을 내겠다고? 거기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짓수는 대부분 안 좋은 결말이야. 내가 그런 결말에 도움을 줄 필요는 없지.\" 작가에게 대드는 등장인물이라니, 흥미롭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어 그를 계속 내버려 둔다. \"주제가 없다고? 지망생이 그래도 되는 거야?\" \"지망생이 이러면 안 된다는 이유라도 있나요? 그리고 주제가 없는게 주제에요.\" 이게 내가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고. \"음, 너는 아마 현대에서 살고 있겠지? 아니면 지금 시대보다 미래인가?\" 그는 이제 나를 분석하고 있다. 나는 친절하게 대답한다. \"당신이랑 동시대에서 살고 있죠. 물론 그쪽은 가상이지만. 이 글의 주제는 주제가 없는게 주제입니다.\" \"하!\" 꽤나 즐겁다. 이 쯤에서 결말을 내도 상관 없으려나. 굳이 예정된 결말로 끝낼 필요는 없다. 적당히 끼워맞춰서, 개연성도 신경 쓸게 없으니. -이미 신경도 안 썼으니- 대화는 이 정도로 끝맺어도 좋다. 남자는 눈을 뜬다. 멍청하게 침을 흘리며 -등받이 없는- 동그란 쿠션 의자에 앉아 앞의 테이블에 엎드려있다가, 멍하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 본 그는 생각한다. 여기가 어디지? 아직도 머릿속에 방금 전 꿈의 내용이 조금은 떠오른 듯 의문을 가진다. 난 병원에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어지는 어두운 공간이 생각나고, 술을 꽤나 마신듯 머리를 부여잡는다. -갑자기 왜 이런 상황으로 넘어가냐고? 아무 이유도 없다. 처음과 끝이 정해져 있을 뿐. 중간 과정은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이다. 문장들의 경우에도 그렇다. 보기 쉽게만 쓰면 된다. 시점, 시간대, 길이 등. 이런 것은 쓸데가 없고 언제든지 깨어 부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형편이다. 아직까지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다양한 방법이 개발되고 있지만 일단은 \'글\'의 존재는 매체의 전반을 차지했다. 남자의 경우에도, 그는 나 자신을 모티브로 잡고 있는 인물이다. 이 글의 시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지적 작가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혹은 1인칭 관찰자? 뭐로 보든 애매할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애매한 점을 노렸다. 이 등장인물은 \'나\'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또 다른 나\'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등장인물의 행동을 대략 추측해낼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상황에 몰아넣으면서, 이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생각에 제한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만 한다면 전지적이면서도 관찰자인, 1인칭 서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단편도 슬슬 끝이 나면서 이런 건 얘기할 필요가 없게 되었지만. 어찌됐든 남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두운 조명이 그를 비춘다. 옆사람이 눈을 힐긋거리며 술을 마시고 있고, 저 멀리 반듯해 보이는 인상의 바텐더가 맥주를 따르고 있다. 그곳은 술집이었다. 남자는 당황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상하게도 그의 자리에는 술은 커녕 먼지나 실오라기도 하나 없었다. 침이 고인 웅덩이가 작게 보이긴 했지만, 신경쓰지는 말자. 남자는 일단 이 곳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에게 꿈에 관한 내용은 서서히 사라져 이제는 현실의 풍경에 섞여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이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휘청거리며 걸음을 내딛는 남자. 입구를 향해서 걸어가다가 어느 여자와 부딪힌다. \"괜찮은가요?\" 여자는 왠지 모를 표정으로 친절하게 대처한다. 남자는 혀가 꼬여 가면서도 간신히 대답에 성공한다. \"내.. 괜차나요. 그 쪼근 어떤가요?\" 그 말에 피식 웃는다 \"전 괜찮아요. 그런데, 저... -여자는 말을 더듬는다- 전화번호가 뭐에요?\" -18892자. 여기서 결말을 내기엔 좀 아쉽다. 썩 괜찮은 부분이었는데, 더 이어가도록 하자. \"내. 네? 저나번호요?\" 남자는 정신을 살짝 차린 것 같다. 하긴, 처음 보는 사람한테 전화번호를 따인 경험이 그 동안 있었을 리가 없다. 거기다 잔뜩 취한 상황에서 그런 경험을 갖는건 더욱 힘든 일이다. 여자의 재촉에 남자는 겨우겨우 머리를 굴려 자신의 전화번호를 전달한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나중에 한 번 밥이나 먹어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지만요...\" 여자는 아쉬운 표정으로 자리를 향한다. 남자는 정신을 차려 아까보다는 똑바른 걸음이다. 마침내 -결말- 입구에 향하는데 성공한 그는 문을 열어 젖힌다. 어떻게든 끼워맞추는데 성공했다. 결말이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지. 이 글이 어떻게 끝나는지 생각하는 건 나에겐 한 없이 쓸모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은 잡담이나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엇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글에 관한 이야기나 아니면 등장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도 좋겠다. 그래도 마지막인데 독자들에게 득이 되는 이야기를 해야겠지. 득이 되는 이야기라. 꽤나 고민된다. 이런 소재를 사용한 이전의 작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할까? 궁금해할 리는 없겠지만 나의 사적인 이야기라든지. 아, 이건 내가 할 생각이 없다. 나도 모르게 이야기를 하는 것을 피하는 듯 싶다. 막상 하려니 할 이야기도 없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고 그만 둘 수는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러고 생각하는 와중에 어느새 2만자의 분량에 거의 다 도달해 버렸다. 여기서 이야기를 계속 한다면 애매한 분량이 되어 버리겠지. 그만두자. 마지막으로 이런 습작을 완성하게 만든 내 근성을 생각하고, 망가진 컴퓨터와 내 알아보기 힘든 악필을 괜히 저주해 본다. 이것들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이 단편 소설을 끝냈으리라. 또, 할게 있나? 앞으로 이 글을 읽어줄 독자들, 친구들, 가족들에게 고마울 것이다. 그리고 습작은 습작으로 끝나야 할 것이다. 이제 정말로 끝이 다가온다. 앞으로 한 100자 정도 남은 것 같다. (저 문장을 썼을 때엔 78자 정도 남은 뒤였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이 글에 부제를 붙인다. 연인 : 어느 지망생의 습작. 끝! 환호성.
작중 화자는 내가 아니다.
이런거 제출할때 보통 줄거리 요약하지않나여?
넌 똥쌀때 먹었던것들 정리해서 쌉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