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담론의 부재함. 문학이 콘돔은 아니잖는가? 무슨 뜻인가. 그야말로 이야기가 없다는 것, 이야기의 개진도 반성도 회유도 없다. 안타깝다.
2. 매체 효과의 몰이해. 생각 있는 면면이 있다면 이 장을 새로운 매체 소통의 장으로 환원시키고 새로운 규격의 비평틀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 익명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부재하고 싶은, 즉 무로의 충동인 것을 인식할 것
3.합평의 비교류. 무엇보다 디시는 일방적이다. 나의 인상인데 무책임하고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4분만에 덧글이 달렸다. 라캉 운운은 아쉽다. 텍스트가 주워져 눈 앞에 놓이면 것의 주석과 유래의 연혁이 아니라 자체의 열기와 치기를 봐야한다. 왜 하필 디시인가. 디시 문학갤인가. 그대들에게 반추한다. 이곳에서 무얼 기대하는가. 아니다, 무얼 기대할 수 없는가.
공부스럽네. 공부스러워.
그럴싸한 문장과 이론들로 가공되기 전의 언어들을 보고싶어서 문갤에 온다. 비평문으로 접하는 문학은 너무 딱딱해
3번이 참 재밌다. 자기 이야기를 상대 신경 쓰지 않고 배설하듯이 내뱉을 수 있는 곳이 현실 어디에.
`무책임하고 대상을 가지지 않는다' 이 이상 좋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논증을 시도한다. 1. 문학 텍스트에 있어서 대상을 갖는 것의 층위는 외연적으로 코스모폴리탄이고 내적으론 니힐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학, 것도 인터넷의 데데한 장에서 이착륙하는 문학 운운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논제를 요구하는 댓글의 작성자는 문학을 느끼는 것과 소비하는 것을 어떤 방식으로 이 장에서 성립시키는가. 일축하건데
허망한 누빔점은 아닌가. 하는 문제
누빔점?
나는 감히 문학도고, 당신은 그저 비평가라는 생각.
2. 허망할 경우 지젝식으로 표현하면 이 장은 대중매체로서 충일하다. 담론을 실어나르는 기존의 텍스트와 이곳의 밀도는 익명성 내지는 접촉의 용이에 있다. 그런데 문학이 대상을 가진다는 위 논제의 바깥에서 그 안까지 텍스트는 유통을 통해 진위를 확언한다. 무슨 말인가. 낭비벽이 이 사랑을 부르고 있다.
언어 굴림이 어느 범주 안에 있네. 근데 뭐라는겨? 갑자기?
지젝식. 라캉식. 지젝은 이해하고 오셨는가 몰라. 대학강의하는 교수조차도 잘 모르는 지젝을. 당신도 좋은 문갤러요. 지식배설.
정신병자 라캉을 읽는다니 가상하긴 한데. 라캉 번역이나 되나 몰라 그거. 난해 극치.
논제가 어두우면 시는 출몰한다. 오해하지마시라, 익명의 문학도여. 밤 중에 너와 난 오로지 소비로만 문학을 그린다. 까닭에 다음과 같이 줄이자. 매일 한편의 시로 오직 문의 눈으로만 이 장을 해체하자. 역겨운 기억법보다 수집하듯 읽었던 서구의 사서보다 이 자리에서 뜨겁게 거꾸러지는 시를 보자. 행간을 찢자
결국 문학은 소비밖에. 생산이란 문학 외적인 것이 도맡아 해주기 때문에. 비평처럼. 당신 마지막 말은 극히 추상적이라서 이해하진 못했으나 윗글 중 가장 있어보이네. 그럼 됐지뭐.
팔월의 둘째날이다. 그대(들)가 한 편의 문학을 제시하면 내가 답신 하는 것으로 중간의 폭을 자르겠다. 느긋하니 특석한 밤이다.
혹 시를 좋아하시는지 수줍게 묻는 것이다.
특석한이 무슨 뜻이야
무슨, 동키호테가 기사도 정신 넘쳐나는 책을 읽고 갑옷 입고 댕기는 듯하이. `뉴비기너' 글은.
시를 좋아하지 않을을 수 있을까 싶음. 즐겨 읽진 않고 읽기에 대한 갈망은 있으나. 갈망 뿐..소설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걸로 대신. 소설가가 되지 못해 비평가가 됐다는 모 비평가처럼. 나도 시인이 될 수 없어 소설가가 되어가는 중.
이 친구는 철학책을 읽으면서 사전을 많이 뒤져본듯.
ㅋㅋㅋㅋㅋ개성있어서 다들 재밌다고 생각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공부는 디씨가 아니라 책상에서 해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