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밥 / 이승훈

학교 연구실에서 20년 매일 잡채밥을 시켜 먹는다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빗물 묻은 우비를 걸치고 배달 온 청년이 묻는다 다른 건 잘 못 먹어요 청년이 나가면 연구실 낮은 탁자에 등을 구부리고 앉아 맛없는 잡채밥을 먹는다 학생들이 연구실에 앉아 잡채밥 먹는 걸 보면 실망할지 몰라 문을 잠그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오전 열한시 반 낡은 잠바를 걸치고 앉아 고개 숙이고 잡채밥 먹는다 물론 다 먹지 못하고 남긴 그릇을 신문지에 싸서 연구실 문밖에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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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면 / 이승훈

해가 지면 "이정현!" 아파트 마당에서 아이 부르는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어제도 "이정현!" 목소리가 들리고 오늘도 "이정현!" 목소리가 들린다. 난 정현이가 누군지 모른다. 여름 저녁 들리던 소리가 가을 저녁에도 들리고 매일 저녁 해가 지면 "이정현!" "이정현!" "이정현!" 세 번 부르고 조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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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웃는다 / 이승훈

"잠시 기다려야 해요. 자리가 없어요." 금요일 오전 열시. 정형외과 물리치료실. 밖에는 비가 온다. 난 치료사 탁자 앞 소파에 앉아 벽을 바라본다. 벽에 걸린 그림이 한쪽으로 기우러진 상태다. 소파에서 일어나 액자를 바로 건다. 그러나 또 기우러지고 다시 걸어도 또 기우러지고 "이상하네요. 바르게 걸어도 계속 비뚤어져요." 치료사 보고 말했지. "그대로 두세요. 아무도 안 보는 걸요." "그래도 신경이 쓰여서." 밖에는 비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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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 / 이승훈

병원 옥상에서 일본 의사 가즈시게가 말한다. "햇살이 강해요. 모자를 쓰시죠." " 네. 그런데 지금은 슬리퍼를 머리에 쓰고 싶어요." 여대생 환자는 모자 대신 신고 있던 슬리퍼를 머리에 올려놓는다. 잠시 후 그녀는 슬리퍼를 입으로 가져가 "이걸 먹고 싶어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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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말 / 이승훈

하루 종일 신고 다닌 양말 벗어 방바닥에 던지면 밖엔 눈이 온다.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양말이 방바닥에 누워 창밖에 내리는 눈발 보는 저녁. 난 양말이 몇 살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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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賀 / 이승훈

당나라 시인 이하는 체구가 가냘프고 연약했고 시를 빨리 지었고 매일 아침 해가 뜨면 허약한 말을 타고 어린 종을 데리고 나서며 종은 등에 낡은 비단 주머니를 메고 그는 시가 떠오르면 시를 써서 비단 주머니에 던져 넣고 그는 제목을 정하고 시를 짓지 않았으므로 시를 제목에 억지로 맞추기 않았고 날이 저물면 집으로 돌아와 지은 걸 다시 살펴보는 일이 없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지은 시들을 보고 말했다 너는 심장을 토해내야만 그만 두겠구나 그의 시는 일반규범에서 벗어나 흉내 낼 수 없고 그는 길에서 쓴 많은 시들을 바로 버리고 스무 일곱살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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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시다 / 이승훈

쓰는 건 모두가 시다 원고지 뒷장에 갈기는 낙서 거리에 떨어지는 햇살 아스팔트에 뒹구는 낙엽 달리는 자동차 달리는 오토바이 해안에 부서지는 포말 새기고 사라지고 쓰고 다시 쓴다 낙서도 편지도 일기도 만화도 신문도 마침내 신문도 신문도 시다 시는 쓰는 것 새기는 것 흘러가는 것 그러므로 가을 오후 시청 앞 사람들도 시다 시는 없으므로 이 시들을 사랑해야 하리 간판도 거리에 시를 쓰고 마네킹도 유리창에 시를 쓰고 이 저녁도 시를 쓰네 시를 쓰며 한 세상 산다 시는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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