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이후 자연과 나의 관계 / 심보선
겨울 동안 헐벗었던 산봉우리는 이제 초록색 브래지어를 걸쳤다, 자연이여, 18세기 이후 나는 불행해졌다 나는 내 자지를 노 저어 여기까지 왔다 뒤돌아 보면 강물은 어기저기 찢겨 있다, 자연이여, 흘러가는 상처여, 늙은 동지여, 헉헉거리며 숨 가쁘게 얼음 녹는 해빙의 물결에 나는 더러운 손을 씻는다 나는 그처럼 따뜻한 구멍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랬다 18세기 이후 역사는 접붙인 자지들로 만든 인공 숲이었다 겨울 동안 배곯았던 길은 이제 훈풍의 노래를 여물처럼 씹고 있다, 자연이여, 찢긴 악보여, 단 하나의 모성이여, 나는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내 자지를 기역자로 꺾어 날카로ㅜㄴ 낫이 될 때까지 숯돌에다 갈기 시작한다 머지 않아 봄날이 등 뒤에서 산불처럼 크게 웃으며 나를 덮치리라
(부끄)...
근데 '내 자리를 노 저어 이곳까지 왔다. 뒤돌아 보면 강물은 여기저기 찢겨 있다' 마음에 든다.
자리가 아니라 자지.
작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소설도 좀 그렇더라. 교육으로 부자연스럽고 억압된 여성 성을 '남성' 화자를 눈으로 얼린 전복으로 봐. 손만 잘못 잡아도 성추행인 시대에 아예 은교로 빠지든가. 무엇보다 시점이 흔들려. 화자와 주인공 비중/실제와 상징의 경계가 애매해. 와따리 가따리 갑툭튀 하는 바람에 불쾌지수도 애매. 이것들이 사람을 성기로만 보나. 여자들은 기분 나쁘겠더라.
아이비리그 출신인 거랑 시가 이런 거랑 별 상관 없나 봐. 난 그런 거 같더라.
아이비리그에 사회학도지만 성 개념은 무개념입니다
라고 선언하는 거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