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맙다는 듯이 웃어주고는 그 괴상한 음료를 한 입 마셔보았다. 달달하고 희뿌연 설탕의 향이 입 안에 알알이 퍼지는 게 나쁘지 않았다.

-정말 맛있어요. 으헤헤헤

-아이고 고 녀석, 솔직하다니까. 코에 묻히지 말고 먹어. 아무리 맛있어도 코를 파묻고 먹으면 못 써요. 아이고. 손님 왔다. 어서 오세요. 바쁘니까, 저 쪽 빈 테이블 가서 마시고 있어. 곧 가서 할 말이 있으니까.

그녀가 이 테이블 맞은 편 의자에 앉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점심시간이 막 지나고 주변의 실버타운 노인 분들이나 근처 회사원들이 디저트로 커피 한 잔 하러 오는 곳이기 때문에 평일에도 한창 바빴다. 나는 테이블 위에서 홀로 미니 체스판으로 나와 나 사이에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으로 동심에 젖은 노부부가 다시 보였다. 부부는 테라스에 앉아 한껏 가을의 자비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나도 그 테라스 발치에 앉아 노부부의 태도를 똑같이 따라해 보았다. 세월의 지혜로움을 전수받았는지 가을의 청명함이 한층 더 맑아진 것 같았다.

체스를 약 6판정도 두고 정리하고 있을 때 주인장이 내게 다가왔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카페 내부는 굉장히 더웠다. 내 체스 상대가 나보고 이 카페에 왜 왔냐고 따졌다. 난 좀 더 테라스 근처로 다가가 앉기로 했다. 점장도 나를 따라왔다.

그녀의 화려한 귀걸이가 카페 천정 가운데 샹들리에의 불빛에 번쩍 후광을 내비쳤다.

-너 진짜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으헤헤, 민지 만나고 왔어요. 그래서 진짜 잘 지냈어요.

-오오오, 이 자식. 슬슬 민지를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는데. 민지는 더 이뻐졌디?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내민 카페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 여자애 이 세상에 정말 드물다. 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얘. 착하지, 이쁘지, 항상 봉사정신이 투철해서 누가 힘들어하는 상황이 생기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니까. 우리 딸도 그 아이 도움을 무척 많이 받았었잖아. 그건 그렇고, 누나가 다른 가게를 창업하려고 하는데.

민지의 칭찬을 기분 좋게 듣고 있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손님들이 조금씩 빠지고 한산한 카페 내부는 호그와트의 그리핀도르 기숙사를 방불케 했다. 나는 그 카페 내부의 풍경을 찬찬히 동공에 담으며 그녀의 말을 곱씹었다.

-다른 가게를 여신다구요? 그럼요, 이 가게는 어떻게 하실거에요?

-뭐 물론, 누구한테 팔아야지. 솔직히 말야, 여기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이잖아. 근데 점심시간 이후로는 미칠 정도로 손님이 없어. 아무리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티비를 보고 책을 봐도 심심해 죽겠단 말야. 내 별명이 뭐냐. 장순이잖아. 장사를 잘 해서. 그만큼 장사하는 것에 타고난 기질이 있고, 좋아하는데 고작 찔끔찔끔 와서는 조용히 커피를 홀짝 마시고는 가 버리니 말야.

나는 쉴 새 없이 떠벌리는 그녀의 입을 바라보며 멍하니 동의했다.

-그래서 말이야. 예전처럼 떠들썩한 술집이나 하나 차리려고. 왜 유럽식 펍 같은 거 있잖아.

나는 펍(pub)이 뭔지 장순이가 뭔지 관심이 가질 않았다. 창밖으로 섬세한 가을 풍경을 조용히 즐길 수 있는 이 귀여운 카페를 팔겠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생전에 어머니가 자주 찾던 이 카페를 이제는 나 홀로 오고 갔는데, 이것은 명백히 우리 어머니를 향한 배신이었다.

-, 지우 너도 조금만 더 똑똑했으면 내 조수를 시키는 건데 말야. 참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훤칠한데, 살짝 머리가 좋지 않아서.

난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누나가 이렇게 나를 놀리고 난 뒤에는 주방에서 초콜릿 무스가 듬뿍 뿌려진 도넛을 들고 오기 때문이다. 나는 누나에게 배고프다는 눈치를 주었다.

-이 놈이, 엄마닮아서 공짜를 무지하게 밝힌다니까. 알겠어, 기다려.

누나는 이쁘장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주방으로 걸어갔다. 어느새 문간의 그림자가 가게 내부 깊숙이 드리웠다. 나의 그림자는 벌써 테라스 바깥으로 넘어가 소나무 두 그루를 가리고 있었다. 어느새 히터를 껐는지 찬바람이 솔솔솔 들어왔다.

 


2.윤태

-, 시험 개 어렵지 않았냐?

-4번 문제 뭐라고 적었어?

-3번이라고 했는데.. 아 씨 스트레스 받아. 끝나고 피시방 가자.

떠들썩한 교실 한가운데서 나는 홀로 앉아 열심히 스마트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옆에 짝꿍은 이미 친구랑 답을 맞춰보려고 종이 치자마자 뛰쳐나갔다. 나는 그가 앉던 의자 위에 다리를 올리고 앉아 열심히 인터넷을 검색했다. 실시간 검색어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말의 정보들이 줄지어 순위를 다투었다. 유명 연예인의 죽음? 사람은 누구나 다 죽어. 연예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메인 기사에 담겨 있었다. 나는 가차 없이 다음 페이지로 넘겼다. 미국의 테이퍼링과 한국 금융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나는 그 기사의 조막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코를 박고 보았다. 예전부터 어른들에게 애늙은이 소리를 듣고 자라와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연예, 스포츠 기사보단 이런 경제기사로 눈이 가버린다. 그렇게 십분 동안 위아래로 기사를 훑고 나면 어느새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고함은 도플러 효과처럼 줄어든다.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이쁘장한 젊은 여선생이 구두를 또각대며 들어왔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시험지를 뭉탱이로 껴서 들고 왔다. 그녀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표정은 돌하르방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2교시, 수학 시험이에요. 모두 책과 노트를 집어 넣으시고 필기구만..

버릇처럼 똑같은 멘트가 흘러나왔다. 알겠어, 알겠다고. 나는 살짝 때가 낀 영국제 필통을 가방 안으로 슬며시 집어넣었다. 샤프와 지우개만 꺼냈다. 그러고선 순수한 멍청이의 표정을 지으며 선생님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선생은 막 첫 번째 줄에게 시험지를 나누어 주고 있는 중이었다. 난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내 파트너를 살짝 돌아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긴장한 나머지 고개를 처박고 깍지를 끼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영혼이 나간 채로 멍 하니 있었는데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이미 직감한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내 파트너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네주었고, 그는 그 미소에 손가락 욕으로 환대했다. 드디어 내가 앉은 줄에 시험지가 배부되었고, 그것을 집어들어 문제를 보는 순간 역한 성질머리가 몰려들었다.

이따금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천장의 형광등의 밝은 불빛을 바라보며 따분함을 참았다. 시험이 시작되고 오한이 저리는 침묵이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드디어 첫 번째 신호가 주머니 속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난 사바나에서 거대한 사자를 만난 임팔라처럼 움찔했다. 진동이 한 번이라.. 1번에 1번이야? 그렇게 10초 간격으로 짧은 진동이 왔다. 나는 귀신처럼 그 신비로운 부호들을 머릿속으로 끌어올렸다. 온 몸의 신경세포들이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신경세포들은 주인에게 진동을 여과없이 전해주었다. 나는 그러한 세포들이 고마웠다. 그리고 이런 잔머리를 굴릴 수 있었던 나의 머리에게 황송했다.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은 학생들에게 손머리를 시켰다. 그러고선 맨 앞의 창문을 활짝 열고는 환기를 시켰다. 맨 뒤에 앉은 학생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험지를 걷어갔고, 나는 내 줄을 담당한 아이에게 살짝 윙크를 해 주었다. 선생이 나간 뒤, 나는 내 파트너에게로 가서 뺨을 가볍게 한 대 쳤다.

-, 이번엔 5번이 많던데?

-이번에 존나 어려웠어. 솔직히 10 퍼센트는 더 얹어줘야 돼.

-이미 딜 본 거고~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오자.

인생의 쓴 맛과 계약해버린 나는 정말 말 그대로 애늙은이였다. 썩을 때로 썩어버린 인생 말기의 늙은이. 순한 얼굴에 순둥이 같은 행동들과는 정반대로 악당 노인의 쉰내를 천성 속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 있는 인간 말종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인생은 그러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런 포부를 지니고 있다면 성공과 명예를 쫒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두 가지 성질은 선물처럼 오게 되어 있다.

-요즘따라 여드름이 부쩍 심해진 것 같다. 너한테 시험 문제 알려주느라 스트레스 받았나 봐.

-새끼가 엄살은. 너도 인생의 참 맛을 좀 먹어본 것 뿐이야. 나한테 감사해야 한다.

나는 머릿결을 뒤로 쓸어 넘기며 툭 쏘아 붙였다. 거울 너머로 친구가 푸아 푸아 대며 세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세수 패턴에 맞추어 머리를 넘겼다.

-내가 이런 말하기엔 좀 무안하지만, 너도 참 대단한 놈이다. 너한테 시험 문제 알려주지 않은 놈을 학교에서 찾아보기가 손에 꼽을 정도이니.

-자식아, 돈이면 다 되는 거지. 누군들 아무리 지 잘났다, 지는 순결하고 당장의 이익을 쫒지 않는다 해놓고는, 내가 살짝 흔들어 제끼니 바로 꼬리를 살랑대며 기어 오는 거 있지?

부럽겠지만 난 이 어린 나이에 대기업 회장이 된 것처럼 행세한다고. 그것이 허세같아 보여? 아니지 , , 담배 하나만.

친구는 장난스럽게 쌍욕을 하며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가을 공기가 텅 빈 거리를 더욱 애잔하게 흐려놓았다. 국기 게양대의 태극기가 미친 듯이 펄럭였다. 나는 그 몸짓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머금었다. 한참을 말없이 가을 풍경을 감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거리의 모습과 일상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아이러니의 극치를 느끼게 해 준다. 갈 곳 잃은 기러기들이 땅에 내려앉아 부리를 쉴 새 없이 땅에 쪼아댔다. 그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눈 앞에 형상화되어 가는 것 같았다. 담배연기와 그 모순은 눈에 섞이어 푸른 하늘로 솟아 올라갔다. 하늘을 쳐다보자 태양은 고맙게도 반대쪽으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청명한 하늘을 보고 있어도 눈이 부시지 않았다. 나는 한 두 모금정도 남기고 담배를 비벼 껐다. 교내 규칙을 어기는 행동이었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입 안의 잔향을 물로 깨끗이 떨어내고 옷은 겉부분을 살짝 적셔 냄새를 없앴다. 그러고선 다음 시험의 파트너에게 메신저 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덧없이 시험날이 끝나고 운동장엔 죄수들이 탈옥하는 것 마냥 학생들이 우루루 빠져나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나와 내 친구들도 그 무리에 합류했다. 부쩍 추워진 날씨에 욕쟁이 친구 한 명이 욕지거리를 했다. 나도 그에 맞서서 같이 욕지거리를 해 주었다. 이쁜 여고생 몇 명이 내 옆을 지나 어디론가 빠르게 향했다. 나는 그 찰랑거리는 뒷머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선 치마를 보았다.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브라운 스커트가 인상적인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이 사각거리며 모래 밟는 소리를 내자, 나도 그에 맞추어 모래 밟는 소리를 크게 내었다. 내 친구들은 게임 얘기에 정신이 팔려 내가 무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학교 정문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우리 동네는 여타 다른 동네와는 다르게 굉장히 개성이 넘쳤다. 개성 없는 못생긴 아파트 투성이 마을이 아니라, 담장, 지붕, 구석의 풀 한포기 마저 사연이 있는 마을이다. 그 골목길 하나하나를 걸을 때마다 역사를 걷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는 전혀 오래되 보이지 않았고, 신도시의 청결함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정적이면서도 차분한 것이 파워블로거 들이 자주 찾을 것만 같은 곳이었다. 이러한 고즈넉한 곳에 내가 살고 있었다. 그것을 나는 내 스스로가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나 같은 놈은 설악산이 어울리지. 깎아지는 절벽 사이 동굴에 홀로 움막을 짓고 밤에는 세상을 내려다보는 나의 모습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굉장한 걸작같은 느낌이 나서 마음이 들떴다.

여름 내내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던 개미들이 눈에 뜸해졌다. 눈을 비비고 크게 뜨며 내려다보니 조그만 병정개미들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가차없이 밟아주었다. 개미들은 내 신발에 패인 홈 덕분에 살았다. 나는 운 좋은 개미들을 보며 웃어 주었다. 그래, 얼른 땅 밑으로 꺼지렴. 너희들도 가족이 있고, 아들딸이 있고, 가을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개미들만 땅 밑으로 꺼지는 것이 아니었다. 좀 더 걷다가 보니 오늘 새벽에 촘촘히 내린 가랑비의 수분도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육안으로 보였다. 나는 덜 말려진 흙을 세게 걷어찼다. 흙은 공중에 산산이 흩어졌다. 나는 설악산을 다시 생각했다. 우거진 단풍나무 사이로 굽이굽이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달리는 버스에 앉아있는 자신의 유년기를 생각하며. 그리고 그 추억의 끝에서 나는 흙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겪은 듯이 행동하는 지금의 나를, 순수한 아이였던 그때의 나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동공에는 내가 보였고, 지금 나의 동공에 맺힌 것은 연약한 아이의 영혼이었다.

교복 마이의 단추를 풀어서 벗었다. 그것을 가방 안에 꾸깃꾸깃 집어넣었다. 온 몸에 열기가 에돌았고, 와이셔츠는 땀으로 축축했다. 힘들었지 윤태야? 이 길을 걷는 순간에는 마음으로만 말했다.

 


 


3. 민지

필 콜린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상상 속으로만 만들어 왔던 토이랜드가 생각난다. 그 곳에서 모두 싸우지 않고 다정하게 지내는 장난감들을 바라본다. 이 곳의 시간은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저녁 어스름 무렵이 계속 이어진다. 가끔 어린 목각이 인형들이 나보고 햇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조른다. 그럼 나는 햇살 가득 머금은 분홍색의 조그만 뮤직박스를 가져온다. 그곳에서는 필 콜린스의 음악과 햇살이 동시에 나온다.

잠시 동안 토이랜드를 여행하고 온 나는 다른 음악을 틀었다. 귀 속에서 생동감 넘치는 황홀함이 떠돌았다. 그리곤 어렴풋이 기억나는 지우를 생각했다.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자 그의 모습이 또렷해졌다. 그리곤 그의 미소와 수줍음을 기억할 때면 그가 내 옆에서 살갑게 웃어주는 것만 같았다. 그의 1인 과외 자원봉사를 맡은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순수함 자체였다. 집 안 곳곳에 놓여있는 야생화와 잡초들의 화분을 보며 계속 물어댔다. 그 때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워했다. 나와 관심사가 너무나도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경상도의 깊은 우림 입구에서 피는, 연한 노란색의 국화를 특히 좋아했다. 나는 그에게 국화꽃 잎 한 송이를 떼어 선물해 주었다. 그는 웃었다.

토이랜드의 어린 광대처럼.

한가로운 화요일 오후다. 나 홀로 집을 보기엔, 집은 너무나 컸다. 내가 서 있지 않은 곳은 어디든 쓸쓸함이 불어왔다. 나 홀로 그 쓸쓸함과 맞서 싸웠다. 하지만 오늘은 무기력하게 밀리진 않을 것이다. 부엌 창문을 열었다. 향기로움에 취해 창문턱에 기대었다. 서울 외곽의 고급 주택가가 기세 좋게 펼쳐져 있었다. 군집된 고급 주택들이 산기슭을 따라 다닥다닥 위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초라해 보이는 주택을 바라보았다. 3층짜리 현대식 집이었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한 쪽엔 백일송이 높게 솟아 있었다. 집 주인인 것 같은 아저씨가 마당에서 잔디를 깎고 있었는데, 그는 거칠게 인생을 산 것처럼 느껴지는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싱크대 옆에 있는 아버지 사진과 함께 보았다. 햇빛을 계속 쬐고 있어도 외로움은 좀처럼 증발되지 않았다. 나는 지우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러주기를 한참 그렇게 앉아서 기다렸다. 어느덧 따사로운 산풍이 불어왔다. 나는 먹이를 줍느라 노곤한 다람쥐처럼 몸을 굽혔다. 그리곤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었다. 내가 마음으로 향한 곳은 토이랜드였지만, 알루미늄 재질처럼 보이는 철책이 사방에 올라선 미로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