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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님이 올린 시<!--StartFragment-->詩입니다.

(원글: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literature&no=82037&page=1)

 

읽다가 묘하게 좋아서 뻘글로 몇 자 더 붙여봤습니다.

승화이길 바라지만, 퇴행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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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 위의 고혹蠱惑은, 나를 천천히 사로잡았다. 기다란 듯 보이면서 뭉툭한 손가락이 움켜잡은 식재료가 칼질에 썰려나갈 때, 그리고 손목 위로 퍼렇게 올라온 주방장의 힘줄에 나는 침을 꼴딱 삼켰다. 가지런히 잘려나간 식재료엔 질서를 찾은 듯한 안정감이, 이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엔 만족스러움보단 탐스러움이, 그리고 이들을 끓는 냄비 안으로 밀어 넣을 때 기울어진 도마 위론 묘한 박자감이 실려 있었다. 이 모든 일련의 순서엔 복닥거림이라기 보단 섞이지 않는 정교함이 느껴졌다. 주방장이 칼을 잡은 채로 뻐근한 손목을 돌릴 때, 형광등 아래 부딪치던 칼날의 빛 속엔 순간의 영원함이 있었다. 조상 중에 미군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래— 꼭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그의 이마 위로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은, 마치 적들과 한바탕하고 온 더티 해리의 느낌이 베여있었다. 어쩌면 그의 고혹함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빚지고 있는 게 팔할인지도 모르겠다.

 

 마, 멀뚱이 서갓고 그서 뭐하노. 저 가서 마늘이나 빠아라.

 

 멍하게 주방장을 쳐다보고 있을 때 중견이가 와 뒤통수를 때렸다. 중견이는 왜 J호텔관광학과에 입학했고, 나는 왜 J호텔관광학과에 입학했으며, 또한 나는 왜 하필이면 중견이보다 후배로 학교에 들어왔을까? 이미 엎질러진 물이란 말은, 세상의 몇 가지 일들은 그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나는 중견이가 턱 끝을 까딱해서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번에 견습으로 들어온 애들이 식재료를 꺼내놓고 쓸데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분주함엔 정교함이 없었다.

 

 오셨습니꺼.

 

 내가 다가가자 견습들이 인사를 했다. 나중에 담배나 태우면서 같이 중견 뒷담이라도 까야겠다는 생각을 하려는 차에, 견습들이 손에 들고 있는 이상한 쇠 모양 집게 같은 것을 발견했다. 도대체 뭐에 쓰는 물건인고?

 

 야, 그 뭣꼬?

 아, 이거 마늘 빻는 깁니더. 엊그저께 이마트에서 팔길래 함 사봤십니더.

 이마트?

 예, 이마트.

 

 문득 이마트 수산과에서 일하는 인수가 떠올랐다. 같은 동기로 들어와 1년쯤 같이 학교를 다녔지만, 여기서 흔히 있는 일이듯 군대를 갔다 온 뒤론 훌쩍 사라져버린, 대충 그런 동기. 재작년에 퇴근하다가 잠시 이마트에 들렸을 때 수산코너에서 일하고 있던 녀석과 재회했다. 사시미칼을 들고 생선머리를 댕강댕강 자르던 그의 눈빛엔 공허가 담겨있었고, 나는 그런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눴다. 그건 공허에 대처하는 자세였다.

 

 아따, 야, 오랜만이네. 은제 마지막으로 봤드라?

 그니까 니 학교 때리치고 대충 3년만이지.

 뭐하노?

 저짝 C호텔에서 일한다. 정규직은 아니고 일단은 계약직으로—.

 거 뭐, 요새 다 그릏치. 내도 이거 계약직인디.

 

 영수가 사시미칼을 도마에 치며 칼날에 묻은 생선살쪼까리를 털어냈다. 우린 번호를 교환했고 몇 번인가 퇴근 후 포장마차에서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전역 후 살아온 짧은 몇 년에 대한 얘기들이 진술서마냥 펼쳐졌고, 두어 잔 마실 때마다 거기에 이런저런 각주들을 달아주었다. 때론 동정이었고, 때론 꼰대질이었다. 영수는 1년 째 수산코너에서 생선대가리를 자르고 있었다고 했다. 선수급이 월400을 받아갔고, 영수 같이 일 배우는 초보자는 160선에서 일이 잡혔다. 이마저도 중퇴한 J호텔관광학과를 졸업했다고 거짓말을 해서야 따낸 자리라고 했다. 나는 졸업증명서를 요구하지 않더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소주나 마셨다. 녀석은 무슨 할 말이 더 남았는지 술자리를 파하지 않고 안주와 술을 더 시켰다. 그리고 남은 얘기를 꺼내기 위한 몇 잔의 소주를 다 비웠을 때 말랑말랑해진 혀를 다시 굴렸다.

 

 니미, 문제가 뭔지 아냐?

 

 아직 문제가 남았나, 싶었다. 그리고 문제 밖에 없으면 그걸 문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잡념도 들었다. 취한 자의 어법은 호흡이 길거나 지나치게 빠르거나, 이 둘 중의 하나인데, 영수는 전자였다. 질문을 던진 영수는 내가 주인아줌마한테 소주를 한 병 더 시킬 동안 멍하니 다 굽힌 불판의 뒷고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나한테 던진 질문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문제는, 배울 기 읎다는 거지. 으이? 생선 부위마다 손질하는 아들이 다 따로 있거든. 무슨 공장처럼 말이제. 내는 기냥 생선 대갈통만 자꾸 자르면 되는 기라.

 좀 지나서 직급 올라가면 이것저것 더 배우겠지.

 뭐라노. 내 때는 아마 큰 데선 선수급이건 나발이건 다 필요 없을 기야. 글찮냐? 고기 한메리 지 혼자 다 쪼물딱하는 선수가 인자 뭐이 필요하갓노? 부위 별로 툭툭툭 다 자르면 되는 기지.

 …….

 

 견습에게 받은 마늘 빻는 도구에 마늘을 넣고 양 집게를 모으니까 곧바로 마늘이 짜져서 나왔다. 내가 할 일은 마늘을 짜는 것과, 짜져 나오는 틀에 달라붙은 마늘쪼가리들을 도마에 툭툭툭 쳐서 떨어뜨리는 일이 전부였다. 그 편리에선 묘한 슬픔의 냄새가 났다. 그렇게 마늘을 4,50개 쯤 빻았을 때, 돌아다니던 중견이 다가와서 지금 그게 뭐하냐는 거냐고 물어왔다. 견습이 내게 말한 대로 이마트에서 새로 들어온 마늘 빻는 도구라고 설명하니까, 중견은 누가 그걸 모르냐는 표정으로 입을 실룩였다. 그리곤 뭣하러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냐면 도마판에 마늘을 올려놓고 칼 손잡이 뒷굽으로 마늘을 빻는 시험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누가 그걸 몰라서 안 했느냐는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영수 생각에 입술을 비틀다 말았다. 글찮냐? 고기 한메리 지 혼자 다 쪼물딱하는 선수가 인자 뭐이 필요하갓노? 나는 그 질문에 뭐라도 던져볼 답 한 줄 없었다.

 

 바로 그때 멀찍이서 중견과 나를 쳐다보던 주방장이 중견이가 애들 데리고 꼴사나운 짓을 하고 있구만 하는, 그래— 꼭 더티 해리를 연기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짓던 세상만사 다 하찮아 보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시선을 느낀 주방장은 도마 위에 마늘 몇 개를 올려놓고 칼편으로 유유히 마늘을 빻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의 눈빛은 마치 더티 해리에서 이스트우드가 범인들에게 내뱉었던 말처럼, 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내가 6번을 썰었나, 5번을 썰었나 생각 하겠지? 실은 나도 몰라, 신나게 썰다보니 잊어먹었어— 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 때는 아마 큰 데선 선수급이건 나발이건 다 필요 없을 기야. 글찮냐?

 

 나는 들고 있던 마늘 빻는 도구를 내려놓고 중견에게 나도 한번 칼로 마늘을 빻아보겠노라고 했다. 중견이 칼을 넘겨주자, 나는 주방장이 했던 것처럼 칼편으로 마늘을 빻아보려 했지만, 곧바로 도마에 튕겨져 나온 칼날에 손이 비었다. 중견이는 비웃으면서 쓸데없는 짓거리하지 말고 손잡이 뒤편으로 빻으라고 말하고는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피가 새어 나오는 비인 부분을 꾹 누르며 나는 주방장을 쳐다봤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빙그레 웃으면서 빻은 마늘을 냄비 안으로 쓸어 넣었다. 도마 위에서 칼로 썰고 빻는 그 유려한 모든 일련의 과정은, 오롯이 쇠로 된 칼춤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정교하게 단순했다.

 

 니미, 문제가 뭔지 아냐?

 도마 위의 고혹蠱惑은, 나를 천천히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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