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
친구들에게 경원시 되고,
가시같은 가족들의 시선을 하루하루 견뎌가면서
나는 왜 창작의 업을 놓아줄 수 없었을까.



내 어린 시절은 집안부터가 후지노랑 똑같았음.


"입시에만 집중해라. 그래야 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건 알지만 남들과 다른 길을 걸으려 하는 어린애에겐 용기는커녕 분노와 좌절감만 안겨주는 폭언이고, 나중엔 결국 흉터로 남게 됨. 특히 한국에서는 그렇지.


그런데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달랐음.


교내 백일장에서 내가 쓴 글을 보고 예전부터 글 써왔던 거 같다고 칭찬해 주시고, 오늘도 글 써온 거 있냐고 먼저 물어봐 주시고, 심지어 나중엔 르포 기자가 되어보라고 권유도 해주셨거든.


쿄모토가 나타나 학보에 만화를 게재하기 전 홀로 유유자적하던 시절의 후지노처럼, 이전에도 내 글을 보고 칭찬해 준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빛으로 읽어주고, 심지어 선물이라고까지 표현해 준 사람은 생애 처음이었음. 내겐 당신이 선물인데… 그렇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꿈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었음.

나한테도 쿄모토가 생긴거야!


후지노가 쿄모토에게 팬이라는 말을 듣고 신나하면서 귀가하던 거 얼마나 행복하고 기적같은 일인지 잘 알기 때문에 흐뭇하게 보게 되더라. 심지어 후지노는 아직 중학생이 되기 전에도 팬이 생겼으니 얼마나 좋았을지?


글고 난생처음 공모전으로 받은 상금을 쿄모토에게 선물로 쓰는 장면도 똑같더라 ㅋㅋ


이땐 정말 날 보는 거 같아서 살짝 부끄럽기도 하고 무언가 만드는 사람들은 다 똑같구나 싶기도 하고, 소중한 추억이 다시 기억나서 영화관에서 숨죽여 웃기도 했음.

난 상금 들어온 게 12월이라서 바로 백화점에 가서 선생님 드릴 머플러 사갖고 크리스마스 선물로 드렸었는데,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 BEST3중 하나야.



그리고 쿄모토가 오열하며 후회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갤엔 일본 애니메식 오버라고 하는 리뷰도 있던데 나한텐 다르게 다가왔음.


나의 선생님이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떨까.
그것도 아무런 관련 없는 제3자의 테러로 인해서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그건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기분일 거야.

선생님이 그 칭찬의 말을 건넨 이후로 나의 삶은 철저하게 선생님과 함께 쌓아간 것이라, 쿄모토를 잃은 후지노의 아픔이 더욱 절절히 와닿았고 눈물샘이 왈칵 터지는 순간이었음. 나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린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 가늠이 안 돼.

죽지 않고 몸부림치며 우는 것으로 그쳤던 쿄모토는 아마 일생일대의 모든 용기를 끌어 쓴 게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원작자 후지모토가 후지노와 쿄모토의 입을 빌려 했던 클로징 멘트도 너무 공감됐었음.


"만화는 힘들고 느리고 귀찮은 일이라 그리기보단 그저 보는 게 낫다."

"그러면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리는 거야?"

「너.」


나도 후지노 정도는 아니지만 쓰는 것 보다 읽는 걸 더 좋아함 ㅋㅋ

아주 어렸을 땐 글이라는 건 그저 신나고 재미있는 놀이에 불과했지만

점차 나이를 먹어가니 글은 내 안의 것을 깎고 깎고 또 깎아 억지로 끄집어낸 뒤 또 한바탕 따로 빚어야 하기까지 하는 중노동이 되어버려 막상 꿈을 이룬 뒤에도 마냥 기쁨이 이어지지는 않더라.


하지만 내겐 책의 헌사에 본인 이름 적지 말라고 장난스레 말씀해주시는 선생님이 계시니까

항상 붙어 있던 학창 시절처럼은 아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처럼 응원해 주는 팬이 있어서 매번 다시 기합을 넣고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음.




이 영화는 타츠키 화백의 자전적 이야기와 쿄애니 스튜디오 방화 사건을 추모하는 두가지 플롯이 병치된 원작을 애니메이션화 한 거지만, 평소 후지모토 타츠키의 작품에 관심이 없었다거나 직접적으로 쿄애니 참사와 연관된 아픔을 겪지 않은 이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으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으면서도 불안해하고, 앞이 보이지 않아 떨고 있던 '과거의 어린 나'가 결국엔 뮤즈의 도움으로 딛고 일어났듯

무너져내린 '어른이 된 나'가 다시 꿈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격려해 주는 작품이기도 했음.



쿄모토가 샤크 킥을 시전하는 후지노를 그리고 「등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을 붙인 네컷 만화를 소중히 간직했듯이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해준 이 꿈과 삶을 소중히 아끼면서 더 꽃피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