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이단심문관은 종교법을 근거로 많은 사람을 죽인 악명 높은 집단으로 마녀사냥을 비롯한 악행들로 유명한데
사실 초기 이단심문관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체계적이고 잘 정비된 로마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봉건법과 관습법이 차지하면서 크고 작은 문제가 생기게되자
로마식 법체계를 간직하고 있으며 국경을 초월하는 교회법이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헌법으로 적용되었다
지역 교회는 자금과 인력이 항상 부족했기에 행정 업무, 학문 연구, 예배와 의식, 지역 복지 같은 기본적인 일에도 벅찼고
이단 교회의 싹을 자르고 올바른 교회법 적용을 위한 전문가들이 필요하게 되자
교황청은 1231년 종교재판을 정비하고 이단심문소을 만들었는데 가장 학구적인 수도원인 도미니코회의 인력을 차출하여 이단심문관을 뽑았다
초기 이단심문관은 우리가 아는거처럼 마녀를 때려잡지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내린 명령 중에 하나가 '이단심문관이 입회하지 않은 마녀재판을 금지한다'였다
이들은 고문이나 강압에 의한 자백을 선호하지 않았다
교리와 교회법으로 상대의 논리를 논파하여 죄를 입증하게 한 후 정해진 교회법에 따른 판결을 내리는걸 선호했으며 오히려 무고하게 신고당한 '마녀'들을 구제하기도 했다
'이단'심문관의 주적은 알비파 같은 이단이고 교회법 판결은 부수적인 업무었기 때문이다
이단심문관은 수가 적었기에 한 곳에 정착하는 대신 지역을 순회하기도 했으며
교회법 이하의 수준을 가진 봉건법과 관습법이 적용되는 지역에 선진적인 교회법을 전파했다
봉건법에 따르면 '장애인이 아닌 사람이 구걸을 할시 신체 일부를 잘라 불구로 만든다'라는 가혹한 처벌이 있는데
종교재판에서는 "너는 죽을때까지 땀흘려 일하라는 창세기 3장 19절 말씀을 어겼으니 고해성사를 드린후 성당에 와서 주기도문을 100번 외워라!"라는 식으로 잔혹한 처벌을 막아주었다고 한다
이런식으로 봉건법이 너무 잔혹할 경우 이단심문관들은 교회의 권한으로 종교재판을 해서 훨씬 가벼운 처벌을 내리고 사건을 무마시키곤 해서 왕과 영주의 원한을 사기도 했다
아직 이단심문관이 등장하기 수십년 전 일이지만 런던의 종교재판관이었던 토마스 베켓은 원래 헨리 2세의 측근이었는데
봉건법을 거스르며 관대한 판결을 내리자 왕과 왕의 기사들에게 찍혔고 왕의 기사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이후 교황은 베켓을 성인으로 시성했고 헨리 2세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했다고한다
이후에도 순회를 나간 이단심문관이 영주의 습격을 받거나 사회 질서를 회복하던 중 살해당하는 일들이 터지게 되니
초기 이단심문관은 사명감 없으면 할수 없었던 직업이었고 결국 호위병과 교회기사들을 데리고 다니게 되었다
사실 이단심문관들은 신학과 교회법, 교리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신실한 엘리트 요원들이었고 이단과 싸우기위해 평생을 바친 사람들인데 세속적인 일들까지 교회법에 따라 판결해주는 판사 노릇 하는걸 싫어했다
(당시 이혼은 교회법 관할이었기에 이혼소송도 이단심문관과 종교재판관의 담당이었다)
오죽하면 이단심문관을 가장 많이 배출한 도미니코회 총장이 '형제님들, 이단심문관 일은 되도록 빠질 수 있으면 빠지세요'라는 편지를 남겼을까...
이렇게 이단심문관이 왕의 의도와 달리 피고인을 구제하는 경우가 많아지자
잔 다르크의 재판은 아예 교황청이 인증하는 '이단심문관 자격을 가지지 못한' 쿄송 주교가 주관하였으며 교황청의 힘이 닿지 않는 영국군 점령지에서 진행되었다
몇몇 수도사들과 인가된 이단심문관들이 잔 다르크 재판에 이의를 제기하자 살해협박을 받고 도망쳤다
이단심문관 자격없이, 정해진 교구를 이탈한 곳에 종교재판을 연 코숑 신부가 오히려 교회법을 어긴 것이었다
이단심문관은 암행어사나 서부개척시대의 순회 판사와 비슷한 위치였고
종교가 행정을 거들어야했던 중세 특성상 수도사들이 그 일을 했다는게 맞는것같다
중간에 역으로 두들겨맞거나 납치당해 실종되는것도 좀 비슷하고...
중세 중반까지 이단들은 꾸준히 잡아 족쳤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모습도 보여줬던 이단심문관들은 말기부터 과격화되고 폭력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종교재판의 처형판결과 실제로 집행된 횟수의 대부분이 중세 말기와 근세에 집중되었는데
발전한 세속법과 과학이 기존 종교가 차지하던 자리를 좁혔고,
교황청의 통제력이 약해지며 재산을 노린 무고한 마녀사냥이 성행했고,(그래서 그나마 통제력이 남아있던 스페인과 아틸리아에서 마녀사냥의 피해가 적었다)
개신교가 가톨릭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점점 세력을 불리자 이단심문이 강압적인 탄압으로 노선을 바꿨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온갖 비이성적이고 엽기적인 심문법들과 그런 심문법들이 집대성된 '마녀의 망치'라는 가이드 북이 만들어졌다
(오늘날 이단심문관의 막장 이미지를 만들어낸 마녀의 망치)
이렇게 막장화된 이단심문소는 1858년 마지막 종교재판 이후에 폐쇄되었다
개추
사실 교회법이 로마법의 후신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이해는 감. 아니 무슨 교회법이 사유재산의 침해와 손해배상 정도까지 관할하냐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교회법 보다가 손상된 물건을 팔았을 때 배상규정에서 악의(알고 팔았음), 선의(모르고 팔았음)를 구분하고 손상정도에 따라 배상범위가 달라지는 거 보고 시발 교회새끼들이 진퉁이구나 싶었지.
중세가 옜날에 연구된걸로 이미지가 너무 고정된것도 있음 농노가 완전 노예처럼 표현된것도 그렇고
개추
중세 역사 갤러리
지식이 늘엇다 콘
킹덤컴 해보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이단심문관을 잘 볼 수 있지 ㅇㅇ
창 이야기 써줘
창 이야기는 예전에 꽤 많이 썼는데;;;
링크점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mandb&no=105540&_rk=Zxh&s_type=search_all&s_keyword=%EA%BB%84%EB%A3%A9%EB%8C%95&page=2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mandb&no=102506&_rk=JRL&s_type=search_all&s_keyword=%EA%BB%84%EB%A3%A9%EB%8C%95&page=4
유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