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격돌> 
 공주 승리 
- 1909년 대전이 호남선 분기점으로 결정되면서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 상인 기성회(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상공회의소)가 도청 이전 공식 건의를 합니다.  물론, 공주에서는 결사 반대하고요. 아무리 대전이 일본인들 도시라고 하여도 공주의 숫자를 무시 못하기에 결국 공주의 승리로 끝납니다. (아직 우리 주권이 있던 때)도청 이전 이야기는 한동안 수면 아래로 들어갑니다. 최소한 20년 동안은 조용했습니다.  

<2차 격돌> 
 공주 승리 
 -1928년 무렵 조선 총독으로 재직한 야마나시 측근 뇌물 수수 사건이 조선을 뒤흔듭니다. 무려 뇌물 수수 금액은 4만원을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뇌물을 준 세력이 바로 대전의 일본 상인들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대전으로 도청 이전이었습니다. 이는 크게 문제 되면서 은밀하게 뇌물로 추진하던 대전으로 도청 이전은 다시 물거품이 됩니다. 

<3차 격돌> 
 대전 승리(역전) 
- 뇌물의 효과 일까요?  총독부에서 대전 이전을 적극 지지합니다. 그리고, 공주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 붙입니다. 거의 대전 이전이 99% 확정적이었습니다. 

<4차 격돌> 
 공주 승리(재역전) 
- 공주가 철저하게 준비된 반격을 합니다. 공주의 유지들이 일본까지 넘어가 그 당시 중의원(하원) 다수당인 민정당을 설득해 도청 이전 예산안을 백지화 시킵니다. (설득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로비를 했습니다. 돈도 제법 쓰고요.) 

<5차 격돌> 
대전 승리 
- 대전에서 다시 재반격을 합니다. 중의원과 견제 세력에 있었던 귀족원(상원)을 통해 도청 건립 예산안을 통과 시킵니다. 

<6차 격돌> 
대전의 최종 승리 
- 하마구치 일본 수상이 중재안을 냈지만 실패합니다. 
식민지인 조선의 한 도청 소재지 때문에 일본의 정국은 급격히 냉각 됩니다. 서로 삿대질하고 연일 서로를 성토합니다. 
 하지만 1(중의원) 대 2(총독부와 귀족원)라는 중과부적으로 공주는 최종적으로 대전에 무릎을 꿇습니다. 결국 대전은 자기보다 몇 배 이상 큰 공주를 이기고 도청을 가지고 옵니다. 


 결론: 당시 한국 4대 도시였던 공주시는 1930년 이후 급격히 인구가 줄면서 지방의 소도시로 바뀌게 됩니다. 대전은 물론 경부선에 위치한 충청도의 다른 도시인 천안 조치원(행정도시)에게 차례로 역전 당하는 처지가 되지요. 












퍼왔는데...
보통 대전의 성장과 공주의 몰락을 '철도 부설' 하나로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잖아? 교통의 발달로 인한 도시의 성쇠라는 틀로...
도청이전은 대전이 커지고 난 뒤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알고있었거든...
그런데 이 글 보니까, 철도만으로 두 도시의 성쇠를 이야기하기엔 한계가 있는거 같네
더 현실에 가까운 설명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
"철도 부설로 인해 대전에 일본인이 밀집하였고, 그 이후 공주는 대전에게 도청을 사수하는 정치적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함"

그리고 기사 검색해보니 이런것도 나오고.. 공주갑부 김갑순이 대전으로 이사가서 도청이전을 주도했다고..

이런 사례를 보면, 공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해야되나? 
암튼 지리에서도 사회, 정치, 경제 등의 관점을 빼놓으면 공간상의 현상을 설명하기 힘든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
물론 이런걸 다루면 중립을 지키기 힘든 경우가 많으니... 지리교과서에서는 굳이 이런 측면을 다루지 않고 중립적으로 서술하려고 하지만..
암튼 재밌는 사례인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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