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절 전반부





아무 말도 울리지 않는 길이(링 위)


걸어도 걸어도 어딜 가는지 몰라(알고 싶지 않아)


불 꺼진 창문 너머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 그림자만(괴물만)








1. 아무 말도 울리지 않는 길이(링 위)







‘링 위’라는 것에서부터, 제작자는 이 노래의 배경이



(은어로서의) WWE (또는 UFC) 경기장임을 밝히고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WWE와 UFC는 피 튀기는 설전으로 시끌벅적한 일련의 과정이다





그럼에도 가사에서는 ‘아무 말도 울리지 않는’으로서 기묘한 고요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1절 전반부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었다






물론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트래픽이 뜸한 오전 10시 같은, 사람 없는 시기의 메커뮤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1절부터 연결되는 '고요'하고 '정적'인 듯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끝까지 끌어가는 데에는




제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모종의 의도가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시끌벅적하고 역동적인 원숭이 비유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말 없이 서 있는 존재들’로 이미 환치했던 것에서 보았을 때,






이는 다수 쌀숭이들의 과격하고 폭력적이며 저급한 언동들이,




공기 매질을 진동시키는 소음으로서의 ‘물리적 실체’는 있으되



지성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유의미하거나 어떤 일관적인 논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아무 말도 울리지 않는’은, 정말로 어떠한 소리도 없이 고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파편화된 소음들로 가득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일련의 'noise'일 뿐 ‘conversation’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 걸어도 걸어도 어딜 가는지 몰라(알고 싶지 않아)







이는 다음 줄에서 '어딜 가는지 모른다'는 방향감 상실로서 뒷받침되는데,





‘알고 싶지 않아’가 '몰라'에 의해 감춰지고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방향감을 상실하게 된 것이 의도적인 선택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가령, 창팝 장르 안에서 표류하는 리선족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만,




반대로 쌀숭이들은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 싶지 않기에,



그러한 사고작용을 스스로 포기하고, 방기해 버렸다는 의미가 된다








3. 불 꺼진 창문 너머에, 아무도 없는 방 안에 그림자만(괴물만)







이런 식으로 화자는 ‘쌀숭이’에 관하여,



소음을 내는 것이 전부인 텅 빈 존재,



자아의 주체성을 스스로 포기한 존재로 설정하였으며,





이를 ‘아무도 없는 방에 그림자(괴물)’만 있다고 묘사함으로써, 한 문장 안에 역설적으로 정리해내고 있다













즉, ‘괴물’은 실체가 없이 다른 실체를 흉내내는 ‘그림자’에 불과하기에,




‘괴물이 있는 방'은 ‘아무도 없는 방’과 같다는 의미를 암시하는 것이다









2절 후반부





그들의 입술은(입 속은) 닫혀있고

그들의 손끝은 차갑고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내 목을 조이고)

나는 홀로 멈춰 있어






1. 그들의 입술은(입 속은) 닫혀있고






제작자의 역설적 표현법은 후반부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입술이 닫혔다’고 표현하면서도, 잠시 ‘입 속’이라는 가사를 화면에 비춰주는데,



만약 입술이 닫혀있다면 입 속을 관측할 수 없기에 입 속에 관한 언급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입 속’을 잠시 띄우는 것은 몇 가지 가능성이 있는데,



첫 번째는 입술이 닫혀있으면서도 실제로 입 속이 보이는 경우이다





이 경우 ‘닫힌 입술’은 ‘가면에 그려진 입술’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그 가면의 크기가 작거나 비뚤어졌거나 깨져서 크게 벌린 입 속이 보인다고 상상해볼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입 속인 줄 알았는데 사실 닫힌 입술이었다고 수정했을 수 있다





입술로 판단하기에는 지나치게 검붉은 형체를 보고 ‘입술이 아니라 크게 벌린 입 속이 보이는 것이다’라고 판단했으나,



자세히 확인해보니 그것이 입술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닫힌 입술이 매우 붉게 물들어 있으리라는 상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그들의 입술이 닫혀있음에도 화자가 ‘입 속 상황을 예측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나,



그 언급을 유보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괴물의 입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뻔히 알겠으나,



입술이 닫혀있으므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겠다’고 간접적으로 선언한 셈이 된다





이 경우, 입 속은 대체로 '탐식', '집착'(voracity, gluttony)의 이미지와 직결되기 때문에, 



'부거' 등의 사적 이익을 노려보며, 기회가 닿으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것을 연상시켜보면 좋을 것 같다







어느 쪽이든 간에, ‘괴물’과 ‘입 속’을 연속적으로 화면에 비춤으로써



감상자에게 어떠한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에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서론에서 '하얀 장갑 공동체'를 설명하면서 언급했던,




‘내면을 감춤으로써 내면을 드러내는 서술 스킬’을 다시 고하며 떠올려보자








2. 그들의 손끝은 차갑고







‘차갑다’는 것을 화자는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실제로 그들의 손을 만져본(=괴물과 직접 접촉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키보드를 사용한다는 점을 묘사하기 위해 동원한) 단순 비유적 표현일까? 






만약 전자라면, 화자와 괴물 간의 거리가 (길 위, 방 안, 입술, 손끝을 거치며) 점점 좁아져 가고 있음을 손쉽게 느낄 수 있는 지점이 된다






촉각적인 표현을 처음으로 끌어오면서 사물과의 거리감을 완전히 없애버렸는데, 





이렇게 '그들'과의 거리감이 가까워지고 있으며, '그들'에게 점점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을,




직접제시(telling)가 아니라 간접제시(showing)로 꾸준히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가사를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3. 시간은 흘러가지 않고(내 목을 조이고), 나는 홀로 멈춰 있어






더 나아가, 이제는 화자 자신마저도 동작을 점점 멈추고,




‘괴물’처럼 정적인 상태로 빠져드는 것 같다는 말로써 2절을 마무리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지 않고, 시간이 내 목을 조임으로써




나의 활력을 점점 빼앗기고 있는 것을 무기력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과의 교감을 시도하던 화자마저도 ‘홀로’ ‘멈춰’버려,




감정교환도 상호작용도 없이 서 있기만 하는 ‘그들’과 동일시되어버리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2절을 가장 흥미롭게 봤기 때문에, 이것저것 쓰다 보니 글이 굉장히 길어지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웃트로에서 화자의 상태 변화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곡에 대한 총평(?) 같은 것으로 마무리하고자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