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사람들 늙은사람이 얘기하는거 싫겠지만 옛날생각나서 몇자 적어봅니다.

이것은 196x년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하 말이 짧더라도 하해와 같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아니 그시절에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내가 다니던 데는 포항의 명문 중의 명문 풍출남자국민학교였다.

지금이야 널리고 널린게 대학생이지만 그때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고급인력이었고 돈이 없어서 국민학교도 못 나오는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그때는 중학교를 시험쳐서 가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우리 풍출남국은 돈이 있든 없든 졸업생 모두가 해병대에 입대하는 영광을 누렸다. 졸업식노래처럼 앞에서 빨아주고 뒤에서 박아주는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서로의 진학(眞虐)을 도왔다.

그시절엔 사람이 많아서 주간 야간반을 나눴고 학급도 10반이 넘었다. 나는 6학년 9반이었는데 한 반에 무려 74명이 있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별명이 하리마오였다. 왜정때 버마에서 싸웠는데 무다구찌인가 하는 엄청 무서운 일본 장군 밑에 있었다고 하셨다.

버마정글에서 땅크도 때려잡고 포신으로 코쟁이들을 도륙내셨다고 했다.

선생님은 학생들을 학쌔이 학쌔이 하고 부르셨다.

선생님은 암기를 중요하게 여기셨고 공부는 암기라는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시험은 교과서를 외워서 다 지우고 그대로 쓰는 것이 시험이었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박달나무를 깎아만든 육모방망이로 해병와플로 만들어서 학생들에게 특식으로 나누어주셨다.

암기 말고도 음악시간엔 악기도 중요하게 여기셨는데 급식으로 주는 옥수수빵(강냉이빵)을 물도 없이 한 가마니를 씹어넘겨야했다. 못하는 사람은 귓퉁뱅이가 날아갔다.

나도 실패했다가 뚜드려 맞았는데 너무 아파서 중정(中庭)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거리고 있었다. 내 옆으로 똑같이 쥐어터진 학생 몇이 앉았고 우린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를 위로했고 비누바른 손으로 서로 포신을 문지르면서 성적으로도 위로해주었다.

그렇게 개운하게 한발 뽑고 나서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누가 싸우고 있었다.

그때는 미국이 원조해준 가루우유를 급식으로 받았는데 그걸 더 가져가려고 싸움이 난 것이었다. 아주 치열하게 싸웠다. 그땐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짱똘 쇠파이푸 가깨목은 기본이고 째크나이프나 수류탄 황룡 크레모아 발목지뢰 같은걸 들고 싸우기도 했다.

약육강식이라 했던가. 결국 깡마른놈은 뚱뚱한놈을 이기지 못했고 사람들 앞에서 궁둥이가 발가벗겨져 따흐흥 따흐앙 따위 소리를  내지르며 전우애구멍을 따였다. 비엔나소세지나 들어갈 조막만 한 구멍에 전봇대가 들어가는 것이 여간 기합이 아니었다.

졸업이 다가오고 우리는 담임선생님의 후임들이 운영하는 해병캠프로 수학여행을 갔다.


혈기왕성한 남학생들을 한방에 우겨넣었으니 숫내가 그냥 진동을 했다.

여느 학생들처럼 먼저 잠든 애들에게 치약을 바르는 장난을 치는데 너무 꼴렸다.

결국 우리는 욕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정신없이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면서 집단갱뱅전우애로 뜨거운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잊지못할 썅갈내나는 추억을 쌓은 우리는 한 명의 낙오도자 없이 무사히 풍출남국을 졸업했고 모두 해병대로 진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도 은사님을 잊을 수 없다.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