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cee8773b6ed6af13eeb848a4785716d9c67fcfcf121629b921bc66356383e57



김 하사는 오늘도 메마른 나뭇가지를 집어들고 바위에 앉았다.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짬이 날 때마다 틈틈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기를 좋아했다.



자화상이라고 하면 대개 미술을 업으로 삼는 화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마련이었기에 주위의 전우들이 그런 김 하사를 특이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매번 이역만리 이국 땅에 그려나가는 그의 자화상은 늘 모습이 달랐다. 때로는 눈썹이 숯댕이가 되기도 했고 눈꼬리가 더 쳐지기도 하였으며 입술이 더 두툼해지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모습이 어떠하든 그런 것은 김 하사에게 있어서 별다른 의미는 없는 것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포탄과 네이팜 탄이 할퀴고 휩쓸며 불태우는 이 월남의 대지를 도화지 삼아 그려낸 자화상에서 그가 찾아 헤매이던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천명에 대한 답변이었다.



지천명. 나이 쉰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뜻을 알게 된다라는 그 세 글자를 앞에 두고 그는 의문을 품었다. 정말 꼬박 햇수로 쉰 해를 넘겨야 천명을 알게 되는 것일까.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대관절 이 사내의 나이가 몇이길래 벌써 이런 애늙은이나 가질 법한 의문을 가지느냐고 말이다. 물론, 김 하사의 나이는 지천명이 가리키는 쉰이라는 나이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정확히는 그의 반절에 조금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런 어린 나이의 그가 벌써부터 자신의 천명을 궁금해하는 것은 어쩌면 전쟁이라고 하는 극한의 환경에 몰려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곳 이역만리 월남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십수년 전 그가 어릴적 겪은 전쟁과 닮아 있었다. 적과 아군 구분할 것 없이 파리목숨처럼 죽어나가는 군인들, 무기력하고 부질없이 찢겨나간 팔다리, 그리고 코를 찌르는 매캐한 연기, 그 속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의 비명소리. 닮은 듯 하면서도 또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월남인들이 사는 이 월남 땅도 이념의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이념의 대립이 낳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두번째 내던져진 김 하사가 언제 어떻게 종지부를 찍게 될지 모를 자신의 삶에 대해 일말의 의미를 찾아내고 부여하고자 하였던 것은 그동안 목도해온 속절없이 죽어나가고 사라져간 부지기수의 여느 목숨들처럼 삶의 끝을 허망하게 맞이하고 싶지 않다라는 바램 때문이었다.



이는 총알 한 방으로도 쉽게 끊기는 나약하고도 하찮은 목숨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하늘이 부여한 값진 의미가 담긴 천명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에서 기인한 천명의 깨달음에 대한 염원이었으며, 이를 매일 같이 그리는 자화상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가다듬으며 부디 유의미하고 값지길 바라는 천명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림 그리십니까?"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소대장이 그의 곁에 서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앳된 웃음이 걸려있었다.



"청룡!"



김 하사는 나뭇가지를 내던지고 기립하여 경례하였다.



"에이, 경례하지 마시라니깐.. 베트콩들 저격수들이 경례하는걸 보고 지휘관만 저격한대요. 그렇게 미군 중대장들이 여럿 죽었다던데."



경례를 받은 소대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 예. 죄송합니다. 앞으로도 주의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얼굴형이 뭔가 좀 더 갸름해진 것이 더 잘생겨진 것 같은데, 이거... 너무 자기 자신에게 평가가 후하신거 아닙니까."



김 하사가 땅바닥에 그린 자화상과 김 하사를 번갈아보며 농을 던지는 소대장에게 김 하사도 멋쩍게 웃음 지었다.



"변변찮은 그림 실력이라서 매번 그릴 때마다 달라집니다. 하하."



"뭘요, 제가 보기엔 썩 잘 그린 그림인걸요. 김 하사님 나중에 전쟁 끝나고 돌아가시면 적극 소질 살리셔서 미술 쪽으로 직업 찾아보셔도 좋을 것 같은데요."



"과찬이십니다. 그냥 혼자 생각도 정리할 겸, 심심풀이로도 그릴 겸해서 겸사겸사 끄적이는 수준입니다."



김 하사의 겸손어린 대답에 소대장은 말없이 웃었다.



"뭐랄까, 혼자 자화상 그리고 계신 김 하사님 보노라면 뭔가 자기 수양하는 스님 보는 것 같다랄까요. 도 닦으시는 도인 같기도 하고 말이죠. 김 하사님은 모르시겠지만 남들이 보기엔 자화상 그리시는 모습이 경건해보입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그려나가는 모습이 숙연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습니까.."



소대장이 건넨 말에 김 하사는 내심 놀랐다. 소대장의 말처럼 김 하사가 그리는 자화상은 단순 그림이 아니지 않던가.



"자화상에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모쪼록 그 찾으시는 것을 찾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대개 우리가 찾아 헤매이는 무언가는 늘 불현듯 우리의 뜻과 무관하게 찾아오더군요. 때가 되면 하늘이 계시를 준다랄까요. 그리고 그것을 적시에 포착하고 취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 되겠지요."



김 하사는 말없이 소대장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두어살 많은 동년배였기에 평소 격의없이 지내던 그가 오늘따라 달리 보였던 것은 그가 쏟아내고 있는 이 진중한 말들 때문이었을까. 평소 글 깨나 읽은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는 유독 달라보이는 것이 마치 김 하사의 속내를 꿰뚫어보며 짐짓 모르는 체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 원, 애늙은이 같은 말을 쏟아냈네요. 뭐 아무튼, 그냥 제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곧 저녁인데 식사 드시지요. 저는 소대원들 경계근무 신고받으러 가봐야겠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소대장님도 식사 거르지 마십시오."



"예. 그럼 이만."



소대장은 빙긋 웃어 보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소대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 하사는 눈을 돌려 자신의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국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월남의 노을 풍경도 조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녁 노을로 붉게 물들은 논이 아열대 기후의 무더운 바람에 은은하게 물결이 일며 찰랑이고 있었고 그 위로는 지평선을 향하여 논과 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평야에 변화를 가미하려는 듯 군데군데에 들어서 있는 정글숲이 굴곡지듯 우뚝 솟아 있었다.



피가 적시고 있는 이 땅에 얼마만큼의 자화상을 그려내어야 나의 천명을 알 수 있을까. 정말 소대장의 말대로 그 천명이란 불현듯 내게 다가올까.



소대장이 남기고 간 말을 곱씹으며 김 하사는 시선을 돌려 주둔지의 남서쪽에 위치한 정글숲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정글숲은 어딘가 을씨년스러워보였다.


그리고 시선을 무심히 다시 옮기려는 찰나, 불빛이 정글숲에서 번쩍였다.



뭐지?



그리고 그 순간, 고막을 찢는 듯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기관총 소사소리.



그 소리에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급하게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트콩이다!"



누군가가 경고하듯 날카롭게 외쳤다.



"전부 위치로!"



주위에서 김 하사처럼 간만의 휴식시간을 평온하게 즐기던 병사들이 너나할 것 없이 철모와 총을 집어들고 황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김 하사도 신속하게 철모를 쓰고 M16을 집어 들고는 엎드려 불빛을 목격한 정글숲을 향해 사주경계 자세를 취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베트콩들이 다시금 주둔지를 기습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 무언가가 김 하사의 오른쪽에 툭하고 떨어져 데굴거리며 굴러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수류탄이었다.



안전핀도 완전히 뽑혀나간 것이 누군가가 살의를 갖고 던진 수류탄이 분명해보였다.



아, 애당초 소련제의 RG-42이니 영락없이 베트콩이 던진 것이겠구나.



RG-42의 매끈한 외면에 순간 김 하사가 그리던 자화상이 겹쳐 보인 것은 죽음을 앞둔 내면의 생존본능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 위한 마취제로서 만들어낸 환상이었을까.



'때가 되면 하늘이 계시를 준다랄까요.'



그리고 김 하사의 머리를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소대장의 한 마디.



소대장이 남긴 그 말이 돌연 떠오르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황망한 가운데 주위를 둘러보니 살상 범위에 들어와 있는 다른 병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더러는 전방의 적과 교전 중이라 자신의 인근에 떨어진 수류탄을 발견 못했고 더러는 김 하사처럼 조기에 발견하고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대로 경직되어 있었다. 어림잡아 대여섯명은 족히 되어보였다.



이것이 너의 천명이다.



총성과 고함소리가 떠들썩하게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문득 그가 그린 자화상이 떠올랐다.


자화상의 입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자화상이 건넨 말인 듯 했다.



의미가 담긴 값진 천명이군요.



김 하사는 머릿속의 자화상에게 대답했다. 김 하사 저도 모르게 바로 흘러나온 답변이었다.



선택은 너의 것이다.



자화상의 입이 달싹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대여섯명의 목숨과 나 혼자의 목숨을 바꾸는 것이라면, 망설일 것도 없겠군요. 내가 바라던 의미가 담긴 천명입니다.



훌륭하구나.



자화상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동안 한번도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입을 웃는 모습으로 그린 적이 없었건만, 자화상은 웃고 있었다.




김 하사도 자화상을 마주 보며 웃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이었지만 막상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비로소 자신의 천명을 찾았고 또한 그것이 값지고 의미가 있다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는 여한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이윽고 김 하사가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렸다. 수류탄 위에 포개진 김 하사의 곁에는 그가 그리다 만 자화상이 있었다.



잠시 후, 폭음과 함께 김 하사의 몸이 잠시 위로 떠오르듯 들썩였다.




폭발로 뿜어져 나온 먼지와 연기로 자화상이 일부 지워지거나 사라졌지만 그가 그린 자화상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