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세르게이

어제 세르게이를 죽였다. 아니 어쩌면 오늘일지도 모르겠다. 어저께에도 세르게이를 죽였기 때문이다. 사실 언제 세르게이들을 죽였는지 헷갈린다. 세르게이라는 이름을 가진 놈들은 왜 이리 하나같이 재수가 없는지. 오늘 또 새로운 세르게이가 들어왔다. 이쯤 되면 간수들은 처리하기 귀찮은 놈들을 내게 보내는지 모른다. 귀찮은 놈들을 일컬어 세르게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헌데, 오늘 세르게이는 좀 특이하다. 여태까지 만났던 세르게이들은 내게 말을 걸지 않으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는지 만남의 시작부터

숨통의 끝까지 말을 해왔다. 내가 여기서 무슨 권력이라도 가진 것 마냥 보였는지, 어떻게든 친해지려 들었다. 쓸데없는 말만 하는 세르게이들뿐이었어서 모두 죽여놨다. 그래야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내 맞은편 먼지 묵은 침대에 벽을 향해 누워있는 세르게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건 질색인 나에게 딱 맞는

죄수 친구가 들어온 셈이다.

저러고 금방 친해지고 싶어서 말을 걸겠지 싶었지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내게 아무런 말도 아니, 그 어떤 말도 누구에게 건네지 않았다.

이쯤 되니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그의 특징이라곤 세르게이라는 이름과, 미국인이라는 것.

그에게 말을 건네봤다. 아니, 그 전에 마지막으로 말을 먼저 건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늘 대답만 해왔다. 이 얼어붙을 거 같은 보르쿠타 수용소에서 태어나고 자라나, 어릴 땐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말을 걸자마자 내게 주먹과 발길질, 욕지거리가 날라왔으니까. 그래서 숨죽여 살았고, 대답만 하면서 자랐다. 18살이 되고, 여전히 대답만 했다. 더 이상 내가 먼저 말을 걸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먼저 내게설설 기었고, 간수들도 함부로 날 건들지 않았다. 혹시라도 귀찮은 놈들이 새로 들어오면 어김없이 날 귀찮게 해 내가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일단 저 재수 없는 세르게이라는 이름부터 바꿔보자 마음 먹었다.

.”

아쎄이.”

무슨 소린가 싶었다.

뭐라고?”

아쎄이, 내 이름이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이 녀석이 들어올 때만 해도 간수들이 세르게이라고 설명해줬었다. 주변 죄수들도 먼저 나서 세르게이라고 귀띔해줬는데, 아쎄이라니.

씨발, 뭔 개소리야. 너 내 소문 이미 들었냐?”

왜 지랄이지? 러시아인들은 자기소개라는 걸 다른 식으로 하나?”

나한테 욕을 한 녀석은 오랜만이다. 원래라면 벌써 반쯤 죽여놨지만, 왠지 이 녀석이 재밌어지기 시작했기에, 그를 반으로 접는 건 잠시 미루기로 했다.

됐고, 아쎄이가 뭐냐, 양키 놈들 중에서 그런 이름은 못 들어봤는데.”

한국인들이 지어준 이름이야. 태어나자마자 부모한테서 버려져서 이름이 없었거든. 전쟁 중에 태어났고, 갓난아기였던 나를 한국군이 구해줬어.”

한국? 거긴 어디냐?”

있어, 지네끼리 치고 박고 싸운 나라. 아무튼 거기 미군 시설 안 보육원에서 자랐고, 교회에서 지원받아서 이름도 마이클같은 시덥잖은 이름이 붙었지. 군 부대 심부름꾼같은 걸 했는데, 한국인들이 다들 나를 아쎄이라고 부르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미군들까지. 생각보다 맘에 들어서 아쎄이라 스스로 정했어.”

그게 무슨 뜻인데?”

몰라, 나도. 한국말이겠지. 근데 폼 나잖아. 아쎄이(I say), 존나 하나님 말씀 같고.”

그게 왜 하나님 말씀이지?”

너 영어 할 줄 아는 거 아니야?”

여기 양키새끼들 몇 마디 하는 거, 그거 좀 듣고 배운 게 다라.”

성경도 모르겠네.”

그 책 말하는 거냐? 양키 새끼들 갖고 온 성경 뺏어서 떨 마는 종이로 쓴 적은 있다만.”

지저스, 우리 목사님이 보셨다면 예초기로 패셨겠네.”

세르게이도 아니고, 미국도 아닌 웬 처음 들어보는 나라에서 태어난 데다 처음부터 부모에게 버려진 이 미국인 놈에게,

왠지 모를 흥미가 돋아났다.

똑같이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없었다는 것에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었는지 모른다. 물론 부모가 나를 버린 건 아니지만, 기억이 전혀 없다.

태어나자마자 내 부모는 어딘지 모를 노역장으로 끌려갔다느니, 능욕당하다 생체 실험 당했다느니 하는 출처 모를 이야기들을 들은 건 내가 8살 때였다어쩌면 그 전부터 들어왔는지 모르지만, 결국 뭐가 진실인지는 모른 채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8살 때의 소문들뿐이었다.

무엇보다, 이름이 세르게이가 아니라는 점이 아쎄이가 맘에 들었다. 이 녀석을 죽일 이유가 딱히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