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중에 다시 보려고 옮기다가 좋은 글이라 공유함

나머지는 여기 따로 올리진 않고 혼자서 볼듯


------------


2 피카소 미술관에서 생각했던 것

피카소와 호쿠사이

요즘은 일부 백화점에 전람회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장소와 예전부터 있던 미술관과의 차이 중 하나는 전시의 종류로, 독립된 미술관에는 다양한 시대의 여러 종류의 작품이 모여있는 것과 다르게 전람회는 특정 인물의 작품만을 전시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피카소 미술관 같은 곳은 오히려 백화점의 전람회에 가깝다. 필자와 같은 문외한에게는 현대의 작품을 보는 것보다 오히려 특정 인물의 그림이 몇 장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쪽이 편하다.

예컨대, 다빈치나 반 아이크, 호쿠사이의 그림은 한 장 보는 것 만으로도 "잘 그렸다"는 것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 시대의 작품을 한 장 (예비지식 없이) 보고 이것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남다른 감수성이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필자는 그런 걸 알 수 없다. 허나 그럼에도 10장이고 20장이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회화의 표현에 혁명적인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과학자가 가져야 할 능력

이러한 20세기 예술과 19세기까지의 예술의 양식의 차이는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문화적 생산물로부터 자립한 작품 그 자체의 가치가 흐려짐으로써, 작품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상황이나 끼친 영향과 같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의미'를 차치하고서는 작품을 이야기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으로도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문화적 가치의 생산을 위해 요구되는 능력도 다양해졌다. 예컨대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실험실을 빌려준 것 만으로도 노벨상을 받았다는 둥의 이야기가 있고는 하다. 필요한 실험을 적절하게 판단하고, 그것이 실현 가능하도록 예산을 확보하고, 다시 그것이 잘 진행될 수 있게끔 인력을 모으고... 와 같은 것들이 과학자로서 가져야 할 능력으로서 작지 않은 부분이 된 시대가 된 셈이다. 사람과 떨어져 홀로 연구실 골방에서 주변에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엄청난 연구를 완성한다, 와 같은 이야기는 SF 속 세계에나 남았고,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투른 과학자는 자금을 구하지 못해 결국 한 편의 영화도 찍지 못하는 '천재 영화감독'과 같은 전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학자의 세계

수학과 관계 없어보이는 소리를 길게 적은 것은, 아마 수학자의 세계야말로 사회적 상태와 무관하게 가치가 정해지는 문화적 생산물이 존재하며 ,그저 수학"만" 잘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한 마지막 장소가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아직 그 말 그대로이다. 갈루아나 아벨의 이야기는 이미 옛날 이야기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빼어난 가치를 가진 업적은 설령 아무리 서투르게 설명되었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는 이해되고 평가되며, 우수한 업적을 내는 데에 고가의 실험설비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과의 교류는 분명 도움이 되지만, 제대로 정보를 얻지 못하는 세상의 구석에 있는 무명의 수학자가 대정리를 발견하는 것도 아직 가능하다.

SF에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수학자도 아직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학생을 상대로 하는 강의에서든 공동연구자를 상대로 하는 세미나에서든 똑같은 기세로 이야기한다. 화려한 퍼포먼스 따위와는 연이 없고, 학회에서 발표할 때에도 자신의 연구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좋은 선전문구를 생각한다거나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도 알기 쉽게 다소 불명확하더라도 비유를 들어가며 설명한다거나 하는 일이 없다. 언제나 엄밀하게 논문에 쓴 그대로 정리를 적고, 논문에 쓰는 것과 똑같이 증명을 한다 (필자가 하고 있는 것처럼 논문 이외의 잡문을 쓴다거나 하는 '타락'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런 수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아탑 안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는 은둔 연구자라고 불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수학의 진보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그런 연구자들이며, 그런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세계가 되어버린다면 수학의 세계의 매력은 반감되어 버릴 것이다. 키튼의 영화는 그냥 시끌벅적하고 우스울 뿐 채플린과 같은 깊이가 없다, 같은 말을 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영화 팬으로서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며, 진정한 영화광이라면 키튼의 '예(芸)'야말로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이다. 정리와 증명을 일견 무미건조하도록 반복하는 일에도 프로의 예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수학에서라면 올바르다고 증명해버리면 누구도 불평할 수 없다. 선전을 잘 하든 못 하든, '사회적 상황'이 어떻든 간에, 뛰어난 정리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한, 말하자면 채점식 피겨스케이팅에 비교했을 때 100미터 달리기가 가지는 깨끗함, 그것을 시원하다고 느껴 수학자가 된 사람은 (필자를 포함해) 적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수학의 세계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어가고 있다.

현대수학의 리더들

이전 회의 교토 국제수학자회의 (1990)에서 위튼이 필즈상을 수상했을 때, 에구치 테츠 씨는 일본 수학회 회지에 실린 소개문에서 위튼을 통해 물리학자들의 현대수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교육적 효과에 대해 언급했다. 수학 쪽에서 보자면 위튼에 의해 수학자가 현대의 소립자론의 방법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 위튼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또한,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수학자 아티야의 1980년 이후의 업적을 보자면, 아티야 자신이 새로이 증명한 정리도 물론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티야가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수학의 진보의 방향을 이끌었다는 그 영향력이었다.

다른 붕야에서는 그것이 당연할 지 모르지만, 수학의 세계에서 무언가 정리를 증명했다거나 정의했다거나 하는 것 이외의 일이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는 적은 오히려 드물다. 그러한, 예를들어 교육적 효과 같은 것은, 지금까지는 오히려 일류수학자의 여기 같은 것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즉 그것이 가능해서 나쁠 건 없지만, 그러지 못한다고 해도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식으로 평가되었던 것 같다. 물론 힐베르트의 '수학의 문제들'의 제안과 같은 예외도 있으나). 그렇게 만약 영향력이 수학자의 능력의 주요 부분이 된다고 하면, 상아탑에서 느긋하게 수학을 하고 있을 수도 없게 된다. 아티야도 위튼도 강연의 명수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그만한 영향력을 가지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수학의 세계의 매력

그렇다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패러다이스도 붕괴를 목전에 둔 것은 아닐까? 필자로서는 모르겠다.

정리를 그저 증명하는 것 이외의 부분도 중요하고, 그러한 부분도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겠다. 예컨대 전문가 이외의 사람을 상대로 하는 서베이를 쓰는 일이나 수학자 이외의 사람에게 수학을 설명하는 일 따위가 수학의 세계에서 이류가 하는 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엄밀하게 증명된 정리와 그것이 가지는 객관적 가치로 승부할 수 있다는 것이 수학의 세계의 매력의 큰 부분을 형성해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요새

20세기의 많은 예술은 예술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첫째로는 작품 개개의 자립된 가치가 옅어지고, 새로운 표현양식의 제시라고 하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작업이 창조의 전면에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과연 20세기의 예술에 있어 좋은 것이었는지를 논할 자격은 필자에게는 없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빼놓고 말하자면, 결국,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들려오는 말로는 거대과학이 발전하며, 연구하는 것이 자립된 가치관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창조에서 조직 속에서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역할을 다하는 일로 변화하면서, 영향력을 가지고자 하니 정치적 능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순수수학을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창조의 마지막 요새로서 지키는 일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생각했었다. IHES에 머물 때 방문했던 파리의 피카소 박물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