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립제는 1898년 평양에서 조임선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립제의 가문은 본래 유서깊은 경기 남인 계열의 명문가였으나, 19세기 초반 신유박해를 피해 평안도로 이주해 정착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1] 하지만 조부가 서양 문물에 많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조임선은 육영공원에서 근대 학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조임선이 광무개혁기 탁지부에서 관리로 일하게 되면서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고 이 덕분에 조립제는 비교적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조립제는 어려서부터 수리적 감각이 뛰어나, 당시의 정부 기관지인 조선총독부 관보에 신동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2] 이 때 일본 유학 제의를 받기도 하였지만 아버지 조임선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않았다.[3]
당시 조선에는 전문적인 수학 교육 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조립제는 1924년부터 서울 중동중등학교(현재의 중동등학교)에서 산술과 교원으로 일했다. 이 시절 재학생이던 어린 양주동과의 일화는 양주동의 수필 〈몇 어찌〉에 잘 나타나 있다.[4]
미국 유학
1925년 경성제국대학이 개교되자 조립제는 학교를 그만 두고 물리학과에 입학하였다. 조립제가 물리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후배인 이임학과 마찬가지 이유였는데, 당시에는 수학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립제가 훗날 회고한대로, 물리학은 조립제가 흥미를 가졌던 대수학과 수론에 큰 영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에 조립제는 대학 생활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조립제는 여러 후원인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올라, 다트머스 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조립제법
조립제는 박사과정을 레비 L. 코넌트 교수의 연구실에서 보냈는데, 그의 연구 과제는 인류학 및 심리학과 수론의 초근원적 연계성에 대한 것이었다. 코넌트 교수의 목표는 이 연구를 통해서 화성인의 인류학적 실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코넌트 교수의 연구실은 수많은 고차 다항식의 인수분해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이러한 작업은 대입 또는 직관력에 의존하는 방법 뿐이었다.
연구에 참여하던 조립제는 이 과정을 간소화하기 위해 고민한 끝에 나머지정리를 응용한 알고리즘을 개발하였다. 조립제는 이 새로운 알고리즘의 효율성에 매료된 코넌트 교수의 권고에 따라 이 정리를 1938년 A Study of Polynomial Equation이라는 제목으로 American Journal of Mathematics[5]에 기고하였다. 발표 당시에서는 이 알고리즘에 대한 이름이 없었는데, 연구자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조립제 매서드(Jo-rip-je Method) 라고 불리게 되었다.
조립제법은 미국 중등 수학 교육 과정에 소개됨으로써 곧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당시 조선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었다.[6][7]
정권과의 불화
광복 직후 귀국한 조립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학 및 수학교육계의 성립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이념 문제로 인해 미국으로 영구 귀국하게 된다. 이후 1961년 5.16 정변이 일어나자 조립제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여 한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조립제를 반체제인사로 분류, 입국을 금지하였다.[8] (조립제의 일가는 한국전쟁 당시 모두 월남한 상태였다.)
분노한 조립제는 미주를 중심으로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곧 정권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조립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였으며, 심지어 유신 시기에 있었던 교육 과정 개편에서 중등 수학 교과 과정에서 조립제법을 삭제하기까지 하였다.
이 조치는 1988년 이후에야 시정되었다.
조립제법 파동
일부 교사들은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조립제법이 인수분해 시간을 줄여 주므로 대입 시험에서 고득점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립제법을 불법적으로 비밀리에 가르쳤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8호 \'극악무도한반민족반국가반정부반유신친북좌익사범조립제및그심정적동조자일체의영구정화를통한국가안전과공공질서도모를위한대통령긴급조치\'(일명 \'조립제조치\')를 발동하여 전국 중등 수학 교사 18명 및 대학생 28명을(과외를 하면서 몰래 조립제법을 가르쳤다) 구속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제1차 조립제법 파동) (1978) [9] 다음해 2월 31일, 해직된 교사와 학생들의 복직, 복학 허용을 촉구하는 부산 경남 지역 대학 교수들의 성명서가 발표되는 과정에서, 정부측이 고용한 폭력배들이 개입하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하였다. (제2차 조립제법 파동) 이 날 성명서 발표를 주도한 부산대학교 어묵공학과 교수 김병수가 둔기에 의해 후두부를 강타당하여 식물인간이 되었다.
김병수 교수의 비극을 포함한 이러한 사건의 경과는 당시 언론에 중점적으로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부산, 경남 지역의 민심은 크게 흉흉해졌다. 왜냐하면 김병수는 부산 경남지역 오뎅 상인 협회 고문으로 일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한몫 하던 중형급 인사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건은 때마침 대두된 정치인 김영삼의 복권 문제와 맞물려 부마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10]
할게 없어서 이런 장난하냐;;;; 조립제법은 synthetic division임 사람이름딴거 ㄴㄴ
혹했다 ㅅㅂ..
고전...노잼...민주화..
뭐야 이게 ㅋㅋㅋㅋ
노력 보소ㅋㅋㅋ
부산대학교 어묵공학과 ㅋㅋㅋㅋㅋㅋ
백괴사전이냐 ㅋㅋ 혹했다 ㅋㅋ
슈발 진짠줄 알았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