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땐 항상 수학이 쉬웠다.

뭐가 그렇게 다 쉬웠는지 모르겠다.
모든게 직관적으로 당연했고, 어느순간 마치
태어날때부터 알고있었는듯한 착각마저도 들었다.
고2때 수능날 그 어렵다던 09수능 뽑아서 풀어도 1개 틀렸고
결국 정시로 남들 다 좋다고하는 모대학교 수학과 입학했다.

그럼 뭐해.

입학후에 나는 속된말로 박살이 났다.
개박살이 난것이다. 그리고 세상은 넓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때 수업을 가르치던 교수님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그걸 다 소화하는 학생들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아니였다.
나는 입실론델타의 정의를 막 배워 끙끙대는데
어떤 애들은 Spivak에 나오는 고급문제들도 쓱쓱 풀고있더라.
시험은 100점만점에 평균은 40점이였고 내가
55점을 받았지만 1등은 98점 2등은 83점이였던가.
어이가 없었다.

뭐 그 이후로도 쉬운과목도 듣고 어려운 과목도 들었는데
쉬운과목은 어찌저찌 잘 본다해도
여러 하드한 과목들에선 난 딱히 빛을 보이는 학생이 아니였다.
선배들은 쭉쭉 잘나가고
나는 책을 봐도봐도 잘 이해가 안되고
예뻐하던 후배들은 이미 나를 넘어선지 오래다.
마음은 엉망진창이였고, 여러번 포기할까 고민도 많이했지만

그럴때마다 조언은 이런 식이였다.

\"수학이 즐거워야한다. 점수는 신경쓰지마라.\"

그래 난 수학을 좋아하니깐. 난 수학을 좋아하니깐.
요새 학부때 배웠던걸 정리하는 마음으로 찬찬히
다시 보고있긴한데 참 이게 왜 쉽다는 생각이 다 든다.
그땐 왜 그렇게 이게 어려웠지.
2~3학년때 학부에서 어렵다는 과목은 다 들어서 그런가
대학원 기초과목정도는 요새는 뭐 별로 어렵지도 않고 그렇긴하다.
진짜 6~7년전에 비하면 실력이 많이 늘긴했다.
그런데 요샌 수학이 싫다.
지난학기에 논문을 받아서 보는데 그냥 갑자기 맥이 빠지고
더 읽고싶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지금 당장 이게 너무 어려워서 그런가보다하는 생각에
방학이 되면 다시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아니더라.
그동안 나도 모르게 마음 고생이 너무 심했나.
뭔가 이리저리 많이 치었던걸까.
불투명하고 가능성이 낮은 미래를 보며 생존하는데
전력을 투구해야만 일자리를 잡을 수 있는게 현재 수학계 현실인데,
나는 학부시절동안 나에게서 신뢰를 잃었나보다.
재능이나 실력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문제같긴하다.)
이제 더 이상 나를 못 믿겠다.

아마 진로를 응용부분으로 바꾸지 않을까 싶다.
참 아쉽다.
나도한때는 낭만적인걸 꿈꿨는데.
나도 저 거인들이 쌓아올린 역사에 내 이름을 싣고싶었는데.
감히 나같은 놈에겐 허락되지않을 일이였나.
골드바흐의 추측을 증명하겠다고 패기를 부리던 철모르는 신입생은 이제 온데간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