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사회에 대한 개인의 우월성
2. 절대악인 국가
2.1 국가에 의한 전방위적 독점과 제약의 미비
2.2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과두정의 철칙
2.3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기생적 본성
3. 세금에 의한 국가의 두 계급

1. 사회에 대한 개인의 우월성
  자유지상주의 사상의 요체는 개인의 신체 및 그 개인이 자발적으로 획득한 사물에 대한 재산권을 침해하는 모든 형태의 행위에 반대하는 것이다. 개별 범죄자와 범죄 집단도 당연히 거부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유지상주의 신념이 여타 사상과 특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 어느 사상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대한 무작위적 폭력 행사를 용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죄행위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편적 견해에 대해서도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 강조점이 다르다. 자유지상주의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데도 그 실재하지도 않는 '사회'의 이름으로 가해자를 기소하는 '검찰'이 없다. 고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피해자 자신이다. 동면의 양면 같은 이야기지만, 더 나아가 자유지상주의 세계에서는 피해자가 검사에게 기소를 요청하지 않고도 잘못된 사람에 대해 직접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또한, 자유지상주의 형벌 체계에서 주안점은 '사회'로 하여금 범죄자를 감옥에 가두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범죄자로 하여금 범죄 피해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하도록 강제하는 데 있다. 이에 비해 현행제도는 피해 보상은커녕 가해자를 감금하는 데 드는 비용까지 피해자가 세금 형식으로 더 부담해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이는 재산권 보장은 근간으로 피해자를 배려하는 자유지상주의 세계에서는 분명 말이 안 되는 제도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유지상주의자들이 평화주의자는 아니지만, 평화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간섭하는 현행제도에는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평화주의자인 존스라는 사람이 범죄자인 스미스에 의해 침해를 당해했다고 해보자. 존스가 자기 신념에 기초해 폭력행사를 통한 자기 방어에 반대하고, 그에 따라 범죄에 대한 어떤 처벌도 거부한다면, 존스는 단순히 기소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그 사건은 그것으로 마감된다. 심지어 피해자가 원하지 않을 때에도 범죄자를 추적해 재판을 넘기는 현행 검찰과 같은 정부 기구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2. 절대악인 국가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자와 일반인의 가장 큰 특징적 차이는 개인적 범죄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 즉 정부의 역할과 관련한 양자 간의 견해에 있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국가를 국민과 국민의 재산을 침해하는 항구적이며 고도로 조직화한 최상위 침해자로 간주한다. 국가가 침해자라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체제의 종류에 상관없이 민주국가나 독재국가 또는 왕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국가의 이념이 빨간색이거나 흰색, 파란색, 또는 갈색이거나를 구별할 것도 없이 공통적으로 그러하다.
 
  국가라는 존재! 정부와 그 통치자 및 운영자들은 언제나 일반적인 도덕률 너머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개인으로서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국민을 상대로 해서는 서슴없이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놓는 예가 인류역사에는 허다하다. 왜 그런 것일까? '국가라는 이유' 때문이다. 일반시민에 의해 '사적'으로 자행되었다면 비도덕적이거나 범죄로 여겨질 행위라도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이유에서라면 모두 면책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의 특징은 일반적 도덕률을 국가기구의 일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냉철하고 비타협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예외를 두지 않는다. 수 세기 동안 국가는 (더 엄밀하게 말해서 정부의 일원으로 행세하는 소수의 개인은) 자신의 범죄행위를 고매한 수사법으로 포장해왔다. 수 세기 동안 국가는 대량 살상 행위를 '전쟁'이라고 부르면서 그에 수반되는 대규모 학살을 미화하였다. 또한, 국가는 오래전부터 국민을 노예화하여 무장집단으로 만들었고, 이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한 '징집'이라 불렀고, 국민을 총대로 위협하고 약탈하는 행위를 '세금 징수'라고 이름 붙였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국가와 국민의 모든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저 국가를 범죄 집단이라고 생각해보라. 그러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의 모든 입장이 그대로 이해될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사회의 다른조직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는 흔히 모든 조직과 단체를 위계적, 구조적, '정부적' 등이라 칭하며 이들 간의 중대한 구분을 흐리고 있다. 가령, 좌파 성향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정부뿐만 아니라 기업과 같은 사적 조직에 대해서도 '엘리트적'이고 '강제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할 것이다. 이에 비해 '우파'적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 같은 불평등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으며, '강제'라는 개념은 단지 폭력을 행사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으로 본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정부는 중앙이건, 주 또는 지방이건 간에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사회의 다른 모든 조직과 명백히 구분된다고 본다. 첫째, 정부를 제외한 다른 집단이나 개인은 자발적인 지급의 방식으로 소득을 획득한다, 예를 들어 지역공동체의 공동기금이나 취미 모임과 같이 자발적인 기부나 선물에의해 자금을 마련하며, 식료품점 주인이나 야구선수 또는 철강 제조업자 등은 시장에서 재화나 서비스를 자율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소득을 얻는다. 오직 정부만이 유일하게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소득을 얻는다. 즉 정부의 납부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몰수나 감금과 같은 직접적인 위협을 행사한다. 이러한 강제적 징수가 바로 '조세'인 것이다. 두 번째 차이점은 범죄를 저지르는 무법자를 제외하고, 오직 정부만이 자국민이나 또는 다른 대상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데 자체 재원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는 오직정부만이 포르노를 금지하고, 종교의식을 준수케 하며, 정부가 생각하는 적정 가격 수준보다 높은 가격에 재화를 판매한다고 해서 관련자들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 이 두 차이는 바로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있다. 사회에서 오직 정부만이 자국민의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세입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든, 도덕률을 강제하기 위해서이든 혹은 정부와 의견 차이가 있는 자를 처형하기 위해서이든 마찬가지이다. 더 나아가, 어떤 형태의 정부이건, 심지어 가장 비독재적인 정부라고 할지라도 대부분의 재정 수입은 항상 강제적인 징세권을 통해 확보해왔다. 또한, 과거 세계역사 속에서 자행된 살인과 노예적 예속화의 대부분은 정부의 손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미 앞에서 보았다시피 자유지상주의의 요체는 개인의 신체와 재산에 관한 권리를 침해하는 그 어떠한 것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지상주의자들은 필연적으로 국가를 이 귀중한 권리를 위협하는, 본질적으로 가장 장압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반대한다.
 
2.1 국가에 의한 전방위적 독점과 제약의 미비
  국가에 의한 침해가 개인 간의 사적인 침해보다 훨씬 더 중대하게 된 데는 국가의 지배자가 부과할 수 있는 중앙에서의 자원 동원 능력과 그 조직의 규모가 개인보다 월등히 크다는 것 외에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국가의 약탈을 견제할 어떠한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피아나 노상강도에 대해 우려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견제 말이다. 사적 범죄자로부터 보호받기 위해서 우리는 국가나 그 하부 조직인 경찰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국가자체로부터는 누가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가? 아무도 없다. 국가의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은 국가가 보호 서비스를 독점화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실질적으로 폭력 행사를 독점하고 사회 내에서의 최종 의사 결정권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국가의 법원에서 내리는 결정을 수용하기 어렵다면 우리가 의탁할 수 있는 또 다른 보호 기구는 어디에도 없다.
 
  최소한 미국에는 정부의 특정 권한에 대해 엄격한 제약을 가하는 헌법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 이미 경험했듯이, 어떤 헌법도 스스로 해석하거나 집행을 강제할 수 없다. 해석은 '사람'이 해야 한다. 따라서 헌법을 해석할 수 있는 최종 권한이 정부 자체의 대법원에 있다는 점을 참작하면 그 대법원이 자신의 정부를 위해 끊임없이 더 광범위한 권한을 승인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또한, 미국에서 크게 내세우는 정부 내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권력 분립'같은 것들은 사실 보잘것없는 것들이다. 분립이라고는 해도 결국은 같은 정부의 일부이고, 같은 부루의 사람들에 의해 통치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탁월한 정치 이론가 중 한 사람이자 부통령을 역임했던 존 칼훈은 성문 헌법의 제약을 무력화시키는 국가의 본연적 경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적으로 언급했다.
 
  성문 헌법은 분명 여러 장점이 있다. 그러나 보호 대상인 그 국민에게 헌법 준수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주지 않으면서 단순히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한계를 정하는 규정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우월적 지배자인 정부가 그 권한을 남용하지 못하도록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정부를 소유하고 있는 당사자인 그들은 헌법에 따라 부여된 권력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만 그것을 제한하고 하는 규제에 대해서는 반대할 것이다. 우월하고 지배적인 당사자인 그들은 자신들을 보호하려 이러한 규제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
  반면 작고 힘없는 자들은 반대의 입장을 취할 것이고, 우월한 상대에 대항하여 자신들을 보호하는 데는 이러한 규제가 필수적이라 여길 것이다. … 우월한 상대로 하여금 규제를 준수케 하는 방법이 없을 때 그들에게 남은 오직 유일한 수단을 헌법을 엄격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항하여 우월한 당사자는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시할 것이다. 즉 권한을 부여한다는 단어에 가능한 최대의 포괄적 의미를 허락하는 그런 헌법 말이다. 그러면, 양측이 서로 장군멍군하는 식이 될 것이다. 즉, 한 쪽은 정부의 권한을 최대한 확장하려는 것이고, 다른 쪽은 가능한 축소하려는 것이다. 그런 데 한 쪽이 만든 것을 실행하는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고, 다른 쪽은 자신의 것을 집행할 수단을 박탈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자의 자유로운 해석에 대항하여 약자가 엄격하게 헌법을 구성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게 상대가 되지 않는 대결에서의 결과는 뻔하다. 제한을 옹호하는 쪽이 힘에서 압도될 것이다. … 제한 규정은 결국 폐지되고, 정부는 일종의 무제한적 권력기구가 되고 말 것이다.
  정부를 서로 상호 독립적으로 대하는 별개의 부서로 분리한다고 해서 이러한 결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 전체 정부뿐 아니라 이들 개별 부서 모두가 수적 다수의 통제를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단순히 권력을 대리인이나 대표자 간에 배분하는 것으로는 권력 나묭과 억압의 경향을 전혀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그런데 왜 정부 권한에 대한 제약의 미비를 걱정해야 하는가? 특히 '민주국가'에서 말이다. 자유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해 서서히 의구심이 일기 시작하던 1960년대 중반 이전의 전성기 시절에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은 "우리가 바로 정부가 아니던가?"라는 문구를 자주 사용했다."우리가 정부다"라는 문구에서 사용된 '우리'라는 용어는 적나라한 착취의 정치 실태를 은폐하는 이념적 위장막을 드리우게 했다. 왜냐하면, 만약 진실로 우리가 정부라면 정부가 개인에게 하는 모든 행위는 정당하고 비억압적일 뿐 아니라, 관련 당사자인 개인으로는 '자발적인' 것이 된다. 정부가 일군의 집단을 위해서 다른 집단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갚아야 하는 공적 부채를 엄청난 규모로 발생시켰다고 하더라도, 이 현실적 부담은 '우리가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라는 허튼소리로 편리하게 가려졌다(그러나 '우리'라는 말은 누구이며 '우리 자신'은 누구를 말한단 말인가?). 정부가 누군가를 징집하든 또는 불온한 사상을 이유로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하는 짓"일 뿐이므로 어떤 부적절한 행위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나치 정부가 죽인 유대인은 살해당한 것이 아니다. 유대인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선택한 정부이므로 그들은 '자살'을 한 것임이 분명하며, 따라서 정부가 자행한 어떤 짓도 그들에게는 자발적인 일인 셈이다. 하지만 국가를 단지 국민의 자비롭고 자발적인 대리인으로만 보는 정부 옹호론자들로서는 이런 끔찍한 추론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도 정부가 아니고 정부도 '우리'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 정부는 대다수 국민을 '대표'하지 않는다.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예로 90%의 국민이 10%를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자고 결정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살해이며 노예화의 범죄인 것이지 억압된 소수 측에서 행한 자발적인 자살이나 예속화가 될 수는 없다. 아무리 많은 시민이 억압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범죄는 범죄이고, 권리에 대한 침해는 침해이다. 다수자라는 것에 그 어떤 신성함도 없으며 폭도 역시 자신의 영역에서는 다수일 뿐이다.
 
2.2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과두정의 철칙
  폭도와 같이 다수가 적극적이고 전제적이고 호전적이 될 수도 있지만, 국가는 일반적으로 지속하는 상태가 과두지배이다. 즉 국가 기구의 통제권을 얻게 된 엘리트들에 의한 강압적 지배인 것이다. 여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모든 인간의 행위에서 '과두정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 을 낳게 하는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불평등과 노동 분화이고, 둘째는 국가사업 자체의 기생적 속성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개인주의자는 평등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부분적인 이유는 인류에 내재하는 방대한 다양성, 즉 문명이 진보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만개하게 될 그런 다양성과 개별성에 대해 개인주의자가 보여준 통찰력 때문이다. 직업 간에서뿐 아니라 직업 내에서도 개개인은 각기 다른 능력과 관심이 있다. 그래서 모든 직업과 인간사에서는 그것이 철강 생산이든 아니면 취미 동호회 조직에서이든, 상대적으로 소수의 가장 능력 있고 활동적인 사람들이 지도층을 형성하게 되고 나머지 다수는 일반 추종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선의에 기초한 경우이거나 (범죄 조직에서와 같이) 악의에 기초한 경우이거나를 막론하고 언제나 적용되는 진리이다. 사실 과두정의 철칙은 독일 사민당이 표먼적으로는 평등주의를 추구하지만, 실제 기능에서는 엄격히 과두적이고 서열적임을 밝혀낸 이탈리아 사회학자 로베르트 미헬스가 발견했다.

2.3 강압적 지배의 이유 : 기생적 본성
  국가가 과두 지배가 되는 두 번째 이유는 국가의 기생적 본성, 즉 국가가 시민의 생산 활동에 강제적으로 빌붙어 산다는 사실이다. 이런 방식으로 잘 살아가려면 기생적 착취의 열매가 비교적 소수 사람들에게 한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별 의미 없이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의 약탈이 자행되고, 이것은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못한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위대한 사회학자 프란츠 오펜하이머는 국가의 강압적이며 기생적인 본질에 대해 그 누구보다 명확히 갈파했다. 오펜하이머는 인간이 부를 획득하는 데에는 두 가지 서로 배타적인 방법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나는 자유시장 방식인 생산과 자발적 교환의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폭력 사용에 의한 강탈의 방법이다. 오펜하이머는 전자를 '경제적 수단', 후자를 '정치적 수단'이라 각기 명명했다. 정치적 수단은 명백히 기생적인 속성을 가진다. 그 이유는 착취자가 징발하려면 그 이전에 생산이 있어야 하고, 징발한다는 것은 사회 내의 총생산에서 무엇인가를 더하는 대신 감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펜하이머는 국가를 '정치적 수단의 조직'이라고 정의했다. 즉, 특정 영토 내에서 약탈 과정을 체계화시키는 조직이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사적인 범죄는 기껏해야 산발적으로 발생하고 불확실하며, 기생적 삶이라고 해도 오래가지는 못하고, 기생의 강제적 생명선은 피해자의 저항으로 언제든지 끊어질 수 있다. 반면 국가는 생산자의 재산에 대해 합법적이고 조직적이며 체계적인 약탈의 경로를 구축하고, 사회 내의 개생 계급에 생명선을 제공하며, 이 생명선을 확실하고 안전하며 '평화로운' 것으로 만든다. 위대한 자유지상주의 작가인 앨버트 제이 녹은 "국가는 범죄의 독점을 요구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고 있다. … 국가는 사적 살인을 금한다. 하지만 스스로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조직적 살인을 범하고 있다. 사적인 도둑질은 벌한다. 하지만 자신은 시민의 재산이든 외국인의 재산이든 상관없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파렴치 하게 손을 댄다."라고 생생히 기술했다.
 
  물론 처음에는 누구도 선뜻 세금을 강도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를 강도 집단으로 보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금을 '자발적'납부의 일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조차 세금을 내지 않으면 발생할 일을 생각해본다면 마음이 변할 것이다. 절대 자유지상주의자라고는 볼 수 없는 위대한 경제학자 조셉 슘페터는 "국가는 사적 영역에서 사적 목적으로 창출된 수입을 정치적 폭력을 동원하여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먹고 산다. 세금을 클럽 회비나 진료비와 같은 서비스 비용에 비유하는 이론을 세금에 대한 사회과학적 설명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증명할 뿐이다."라고 했다. 빈의 저명한 '실증주의' 법학자 한스 켈젠은 그의 논문 『법과 국가의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Law and the State 에서 전적으로 '과학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기반 위에서 정치 이론, 즉 국가의 정당성에 관한 이론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책의 도입부에서 이미 '당나귀의 다리'Pons Asinorum1 라고 불리는 정치철학적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즉 도적의 명령과 국가의 칙령은 어떻게 다른가? 켈젠은 그저 국가의 칙령은 '정당하다'고 선언한 후, '정당성'을 설명하거나 정의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논지를 펼쳐 나갔다. 사실 자유지상주의자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고민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조세를 강탈과 구별하여 정의할 수 있는가?
 
  지난 19세기에 개인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한 위대한 헌법 법률가 라이샌더 스푸너Lysander Spooner 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자명한 것이었다. 그는 국가를 강도 집단으로 보았는데 그의 이러한 분석은 이제껏 개진된 비판 중에서 가장 신랄한 것이다.
 
  헌법 이론상으로는 모든 세금은 자발적으로 납부되는 것이며, 정부는 사람들의 상호협의 하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상호 보험 회사나 다름없다. …
  그러나 정부에 관한 이 이론은 현실과 매우 다르다. 현실 속의 정부는 노상강도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돈을 주든가 아니면 목숨을 내놓든가"라고 협박하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니더라도 많은 세금이 이러한 위협적 강제 하에 징수된다.
  정부가 실제로 한적한 곳에 숨어서 기다리다 갑자기 나타나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주머니를 뒤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세는 여전히 강도 행각이며 보기에 따라서는 훨씬 더 부끄럽고 비열한 강도질이다.
  노상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따르는 위험과 처벌을 혼자서 감당한다. 그는 당신의 돈을 빼앗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거나, 그돈을 당신의 이익을 위해 쓰는 체하며 가장하지도 않는다. 노상강도는 자신이 사람들의 의사에 반하여 돈을 갈취하는 것이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거나 강도가 제공하는 보호망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얼빠진 여행자를 보호해 주려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다. 노상강도도 그런 허언을 할 정도로 지각이 없지는 않다. 그뿐 아니라, 돈을 빼앗은 후에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놓아줄 것이다. '보호'를 빌미로 자신이 당신의 적법한 '주권자'라고 자처하며 원하지 않는데도 줄곧 쫓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보호를 자처하며 당신에게 엎드려 시중을 들라고 요구하거나,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거나,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자기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돈을 강탈하지도 않을 것이며, 자신의 권위에 반하거나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반영자로 낙인찍어 무자비하게 총살에 처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기, 모독 그리고 흉악 범죄에 비하면 노상강도조차 너무나 신사라 할 정도이다. 다시 말해, 강탈한 것도 모자라 다신을 얼간이나 노예로까지 만들려 하는 강도는 없다는 것이다.
 
3. 세금에 의한 국가의 두 계급
  만일 국가가 약탈자 집단이라면, 그 집단은 누구인가? 지배 엘리트는 언제나 (1) 국가를 담당하고 운영하는 전담기구, 즉 관료, 정치인, 왕 그리고 (2) 국가로부터 특권, 보조, 그리고 혜택을 획득하는 데 성공한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다. 사회의 나머지는 피지배자가 된다. 아무리 정부 권력이 미약하고 세금 부담이 적고 공평하게 배분된다고 하더라도 정부는 그 속성상 사회 내에 서로 갈등하는 불평등한 관계의 두 계급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을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간파해 낸 사람 역시 존 칼훈이었다. 감면 다 받아도 결국 세금을 내는 사람, 즉 '세금 납부자'와 낼 거 다 내고도 주로 세금으로 사는 사람, 즉 '세금 소비자'이다. 정부가 댐을 건설하려고 그다지 많지 않은 표면상으로 균등하게 배분된 세금을 부과한다고 가정해 보자. 바로 이 행위는 대다수 국민에게서 돈을 가져와서 순 '세금 소비자', 즉 사업 운영자인 관료와 댐을 건설하는 건설업자, 그리고 노동자에게 지급하려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결정 영역이 커지면 커질수록 재정 부담은 더 커지고, 그것이 초래하는 부담과 이 두 계급 사이의 인위적 불평등 역시 더욱더 확대된다고 칼훈은 지적한다.

  비록 소수이지만 정부의 대리인과 고용인은 공동체의 구성원 중에서 세금으로부터 나온 수익을 배타적으로 수혜받는 계층이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얼마를 공동체로부터 가져가든 중간에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용이나 지급금의 형태로 그들에게 들어간다. 조세와 지급금 이 둘은 정부의 재정을 구성하며 서로 상관관계를 가진다.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공동체에서 가져간 것을 지급금이라는 명목으로 공동체의 일원인 수혜자에게 이전시킨다. 그러나 수혜자는 공동체 일부분만을 구성하기 때문에, 재정 과정의 두 부분을 통합해 생각해보면, 세금을 내는 사람과 그 수입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불평등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셈이다. 세금이라는 형태로 각 개인에게서 징수된 돈이 지급금의 형태로 납부 당사자에게 돌아가지 않는 한 (그럴 때 그 과정 자체가 터무니 없고 부질없는 것이 되겠지만) 다른 관계가 나올 수 없다. …
  그래서 정부의 불평등한 재정행위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거대한 두 계급으로 분할시킨다. 즉 실제로 세금을 내며 전적으로 정부를 지탱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과 지급금을 통해 세수를 받음으로써 사실상 정부에 의해 보조되는 계급으로 나뉜다. 더 간단히 말해 세금 납부자와 세금 소비자로 양분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의 조세 행위를 중심으로 두 계급을 서로 적대적인 처지에 놓이게 하고, 정부 정책과정을 적대적인 두 계급의 이해관계와 직결되도록 한다. 조세와 지급금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한쪽이 이득이, 다른 쪽은 손해가 더욱 증대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매번 규모가 증대될 때마다 한쪽은 강해지고 부유해지지만, 다른 한쪽은 약해지고 빈곤해진다.
 
  만약 지구상 모든 국가가 약탈자인 소수 지배집단에 의해 운영됐다면 그들은 어떻게 민중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일까?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이미 두 세기 전에 지적했듯이, 모든 정부는 아무리 독재적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국민 다수의 지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라는 것이 국민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세금이나 또 다른 형태의 공권력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국가가 얼마나 많은 강제를 행사하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다수의 지지가 반드시 열성적이고 열렬한 승인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소극적인 수용이나 체념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죽음과 세금이 그것이다"라는 경구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징세를 불가피한 것으로 추정하여 채념하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암시한다.
 
  물론 국가로부터 혜택을 받은 집단인 세금 소비자는 소극적인 납부자와 달리 국가 체제의 열성적인 추종자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소수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일반 국민의 동의와 복종을 확보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화된 폭력행사의 문제, 즉 정치를 다루는 철학 분야인 정치철학에서의 중심 과제라고 할 수 있는 시민 복종이라는 불가사의한 문제와 마주한다. 왜 사람들은 지배 엘리트의 칙령이나 약탈행위에 복종하는가? 자유지상주의와는 반대편에 서 있는 보수주의 작가 제임스 버넘은 시민 복종을 정당화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매우 명쾌하게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정부의 기원이나 정당성을 전적으로 합리적인 방식으로 설명해낼 방법은 없으며 … 왜 세습 군주제, 민주주의 혹은 또 다른 정치체제를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나에 대한 특정인의 지배를 어떤 하나의 정치체제 또는 정치원칙을 통해 정당화해야 한다고 보는가?" 그의 답변은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원칙을 받아들인다. 글쎄 … 내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고, 지금까지도 그랬고 지금도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원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국민 대다수가 그것을 수용하는 데 동의하는가? 그 이유는 어용 지식인에 의한 국가의 선전·선동이 매우 성공적이어서, 국민들 대다수가 국가 체제의 와해이후 도래할 일시적 혼란에 대한 막연한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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