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필자는 글을 조금 돌아서 시작하고자 한다. 헤겔은 흔히 근대철학의 완성자로 취급되며,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그 어떤 무엇으로 대우된다. 이러한 대우는 그저 전관예우에 불과한가? 오늘 날 "죽은 개"가 된 헤겔을 보아한다면 당연해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헤겔을 필연적인 장벽으로 여기는 이들도 대부분 동일하게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날 헤겔의 중요성은 어디에서 찾아져야 하는가? 만일 헤겔이 아직도 중요하다면, 헤겔은 과연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는가? 그의 체계는 정당하게 극복되었는가?
여기서 회의주의가 고개를 든다. 2500년이라는 기나긴 철학사에서 회의주의가 (후술할 헤겔의 그것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격퇴되지 못했다면, 이는 즉 회의주의를 제외한 모든 철학적 학설이 결과론적으로는 폐기처분되었다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헤겔 이후의 철학사를 한번 따라가보자.
상식을 전투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는 회의주의에 대한 반박을 소박실재론적으로 반박하고자 했다. 그리고 나아가 실천으로의 비약을 통해 회의주의를 격퇴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그러한 비약의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소박실재론적인 반박은 순환논증에 불과한 것이었다. 물론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서 자연과학에 근거하는 형태의 회의주의와 유아론을 반박할 길을 제시하기는 했으나, 그 회의주의가 순수하게 구성된다면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회의주의에 대한 유효한 반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요한 경향으로 되지 못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마르크스주의가 발흥한 이후 철학사에 있어서 큰 변화라고 한다면 언어적 전회일 것이다. 그러나 언어적 전회란 결국 광의의 (신)칸트주의의, 그리고 퓌론주의의 변주가 아닌가?
언어로 표상될 수 없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그러한 대상에 관한 의문은 무의미하며, 사실 실재란 언어 내부에 존재한다는 것. 객관성은 언어라는 우리 인식의 틀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
"...회의주의는 체계라고 부를 수도 없고 또 체계이고자 하지도 않는 철학이다." (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09p)
"일반적으로 말해서 회의주의의 목적은... ...자기 의식에게 마음의 평정과 안정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마음의 부동과 안정이 자기 의식의 아타락시아다."(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26p)
퓌론주의가 판단중지를 통해 형이상학에서 벗어나 아타락시아를 얻으려 했듯이 형이상학에서, 그리고 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에서 보이듯이 체계에서 벗어나 언어적 혼동이 낳은 철학적 질병을 "치료"하려 한다는 것. 이것이 칸트주의와 퓌론주의의 변종이 아니고 무엇인가. 텍스트 외부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데리다'주의'의 선언이, 언어가 존재라는 가다머의 선언이 이의 바깥에 있을 수 있는가.
또한 우리는 현대철학에서 언어적 전회의 자장 바깥에 있는 몇 안되는 철학자로 후설과 들뢰즈를 꼽을 수 있겠다.
후설은 회의주의를 모든 것이 의심스럽다고 하여도 의식에 드러나는 현상 자체는, 정확히 말하자면 의식에 어떠어떠하게 현상이 드러나는지는 의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적 해결책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익히 알려져있듯이, "현전의 형이상학"으로 단죄되었다.
들뢰즈의 차이 자체의 형이상학에 대해 회의주의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차이 자체는 동일성 자체와 무엇이 다른가? 차이 자신이 차이-임이라는 동일성을 갖지 않는가? 아니라면 그것을 차이라고 생각해야할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다만 푸코를 이 글 전체의 예외로 두고 싶다.)
따라서 회의주의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것은 회의주의가 아닌 모든 철학적 학설을 무화시키고 있는 채로 남아있다.
2. 회의주의 일반의 논변 형식
헤겔에 따르면 회의주의자는 어떠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제출하는 학설에 대해 그 어떠한 것의 타자를 대립시켜 제출한다. 그를 통해 모순을 보여준다.
"즉, 그에게 동일성이 제시되면, 그는 비동일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가 방금 언표한 비동일성을 이제 그에게 돌려주면, 그는 동일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넘어간다." (헤겔, 『정신현상학』, 아카넷, 201p)
"회의주의자들은... ...모든 내용은 그와 대립하는 것을 갖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들은 이렇게 동일한 것에서 모순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이 제출되든 간에 그와 대립되는 것 역시 타당하다는 것이다. (...) 회의주의자들의 논변 방식에서 보편적인 원리는 모든 규정된 것, 주장된 것, 사유된 것에 타자를 대립시키는 것이다."(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32~133p)
2.1. 철학의 한 계기로서의 회의주의
헤겔은 특정한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체계(의식)에서는 그 특정한 것의 반대항 또한 절대적인 것으로 제출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회의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회의주의는 참 된 철학이 포함해야할 한 계기인 것이다.
"부정적인 것에 관해 이런 의식을 획득하고 부정적인 것의 형식을 이렇게 명확하게 사유했다는 것은 회의주의에게 돌려야 할 영예다."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65p)
"말하자면, 회의주의는 본래적으로 사변적인 이념들을 다루었고 그것들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유한한 것에서 모순의 제시는 사변적으로 철학하는 방법의 본질적인 요점이다."(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68~169p)
그러나 회의주의는 그저 모든 것을 무화함으로서 아타락시아를 찾는 것에 안주하여 A와 ~A간의 연관을 보지 못한다. 순수 존재를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독단론자에 대해 순수 무를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움으로서 (그러나 자기지시적 모순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내세움은 일시적으로만 유지된다) 독단론을 반박할 수는 있겠지만, 순수 존재 내부에 순수 무가 있음을 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2.2. 사변과 회의주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A와 ~A의 교호성을 부정하는 형식논리학적 사고에 대해서만 효력을 발휘한다. 헤겔에 따르면 회의주의는 모든 타자를 포섭하여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변적 사유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회의주의는 사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무력하다. (...) 그것은 자기 내에서 둥글고, 이 규정된 것과 더불어 이 규정된 것과 대립하는 것을 자기 곁에 포함한다. (...) 사변적인 것에는 타자가 이미 그 자체 포함되어 있다."(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69p)
예를 들어 헤겔에게 차이는 동일성과 부정적인 자기관계, 즉 차이는 동일성을 자기 내의 타자로 포함함으로서 차이로 성립하고, 그 역도 그러하기에, 회의주의가 동일성을 차이의 타자로 제출하여도 그것이 이미 차이에 포섭되어 있기에 효력을 상실한다.
회의주의가 사변철학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사변 아닌 것으로 만드는 일종의 쉐도우복싱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이념으로서의 사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어떤 해도 끼칠 수 없다. 회의주의의 공격이란 참된 무한한 것[사변적인 것]에 대해서는 불충분하다. (...) 따라서 회의주의는 무한한 것에 옮을 묻힌 후에야 무한한 것을 할퀼 수 있을 뿐이다."(헤겔, 『변증법과 회의주의』, 철학과현실, 170p)
3. 헤겔적인 것의 필연성
이러한 헤겔의 논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헤겔을 내재적으로 비판하거나 헤겔을 받아들이거나의 양자택일을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헤겔리안이 되거나 그를 변증법적으로 초극하거나 둘 중에서 택일해야하는 운명이다. 마르크스의 표현을 뒤집어 사용하자면, 헤겔은 "이 시대의 연옥"이요, "불의-강(Feuer-bach)"이다.
"...진리와 자유에 도달하려면 불의-강(Feuer-bach)를 통과하는 수 밖에 없다. 포이어바흐(Feuerbach)는 이 시대의 연옥이다."
만일 헤겔을 넘어서고자 한다면 우리는 헤겔에 대한 내재적 비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고 헤겔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라 함은, 헤겔이 충분히 사변적이지 않음을 폭로하는 작업이어야 한다. 즉 헤겔을 극복한 뒤에도 철학은 사변 없이 해나갈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엄격하게 헤겔적인 의미에서의 사변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철학은 관념론을 거부한 후에도, 지나치게 긍정적인 헤겔식 사변보다 더 넒은 의미의 사변 없이는 곤란에 처한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71p)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쓰여왔던 "사변"이라는 용어는 다시금 정당하게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사변철학은 회의주의의 유일한 탈출구이다. 철학은 헤겔적인 것을 승인하던 내파하던지 간에 여하튼 그것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헤겔의 체계를 진정으로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해, 우리가 그 체계에 대한 지적인 자기굴복이라는 극단뿐 아니라 동시에 그것을 싸잡아서 무조건 거부하는 극단 역시 피해가고자 한다면, 이제 남는 것은 그것을 오로지 내재적 비판을 통해 다루는 것이다…” (회슬레, 『헤겔의 체계 1』, 한길사, 62p)
그 “내재적 비판”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우리는 여기서 속류화된 마르크스주의가 그러하듯이 성급하게 자연과학을 ‘바로’ 들이대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보통 유물론에 대한 논박을 주도하는 전통적인 논증적 논리학은 그러한 방법을 선결문제 요구의 허위라고 비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278p)
우리는 그것을 포이어바흐에게서 찾을 수 있다.
4. 포이어바흐의 비판의 개요와 한계
4.1. 헤겔의 체계
헤겔의 체계 구조는 논란이 많지만 내가 이해하기로 그것은 『정신현상학』에서 체계 자신의 정당화를 거치고 논리학 - 자연철학 - 정신철학의 삼분적 구조로 전개된다.
“그러나 학의 정의, 더 자세히 말해서 논리학의 정의는 오직 이 학이 출현하게 되는 필연성 속에서만 스스로를 입증한다. (....) 결국 여기서는 순수한 학의 개념과 그 개념의 연역이 전제되어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보다 앞서서 저술된 『정신현상학』은 바로 그와 같은 개념을 연역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기 떄문이다. (...) 이러한 객관적 사유가 순수 학문의 내용을 이룬다.” (헤겔, 『논리의 학』, 자유아카데미, 42~44p)
그리고 이 세개의 학은 자기 내에서 원환적 구조를 가지고, 또 서로 원환적 구조를 가진다.
“철학의 각 부분들은 하나의 철학적인 전체, 즉 자기 자신 속에서 완결된 하나의 원환(Kreis)이다. (...) 그리하여 전체는 원환들로 된 하나의 원환으로 드러나며, 이러한 원환 각각은 필연적인 계기라 할 수 있다.” (헤겔, 『엔치클로페디』, 책세상, 제15절)
각각의 규정은 “I. 즉자대자적인 이념의 학문으로서 논리학, II, 타자 존재 내에서의 이념의 학문으로서의 자연철학, III. 타자 존재에서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이념으로서의 정신철학.”이다. (같은 책, 제18절)
그렇다면 헤겔의 방법이 사변인 바 헤겔은 사변적으로 각 학문의 이행을 이끌어내어야 할 것이고, 즉 『정신현상학』과 각각의 이행 즉 전개 그리고 결론에 사활이 달린 셈이다.
“그런데 이 중에 두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는 범주들의 ‘전개’는 출발이나 종결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문제일 수 있다. (...) …’전개’의 문제는 일단 하나의 확고한 출발근거와 방법론이 확립되면 저자가 자신의 저술행위를 당분간 ‘사상의 본성’에 맡기면 되기 때문이다.” (권대중, 『헤겔의 체계 1』, 「간주관성의 범주를 통한 헤겔 체계의 혁신」, 한길사, 15~16p)
그러나 헤겔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포이어바흐의 지적은 그것이 “상대적으로 덜 까다로운 문제”가 아니게 하는 듯 한다.
4.2. 자연철학으로의 이행 문제
포이어바흐의 비판은 헤겔이 논리학의 결론인 절대이념에서 자연으로의 이행이 엄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념의 타재인 자연이란 감성적인 것으로 개념적으로 그리고 사변적으로는 제대로 다뤄질 수 없다. 헤겔의 삼분적 학문체계가 구체적이기 위해서는 자연철학이 그 만의 원리를 내함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논리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 포이어바흐의 비판이다. 즉 논리학과 자연철학 사이에 변증법적 대립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논리학의 마지막에서 절대이념은 신학의 하늘로부터의 도래를 직접 기록하기 위한 애매한 결단으로 된다.” (포이어바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 명제」, 민음사, 223p.)
물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포이어바흐의 비판은 감각주의에 어느정도 기초하기에 그것은 내재적 비판이 일정부분 당장은 아니고, 또 그러한 감각주의가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신 장에서 비판될 수 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정신현상학』을 공격한다. 『정신현상학』의 시작점인 감성적 확신은 헤겔에 따르면 이미 보편자에 매개된 것으로 드러나는데,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이는 “보편자를 미리부터 실재적인 것으로 확신하는 사람에게는 물론 증명되었겠지만, 감각적 의식에게는, 그런 입장에 세워져야 될 또는 그런 입장에 맞춰져야 될 우리에게는 .. …그렇지 않다!” (포이어바흐, 『19세기 독일 사회철학』,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 민음사, 197p. 이하 페이지 수만 표시.)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정신현상학』은 이미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전제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동어반복이다. 따라서 이행만이 아니라 시작인 순수지도 문제가 된다.
(어떤 비트겐슈타인-헤겔주의자들은 헤겔이 하나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식의 “철학적 치료”를 개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감성적 확신 자체가 다뤄지지 않았음은 변함이 없다.)
그렇게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체계를 내파하고, 감성적 존재, 즉 자연에서 시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4.3. 한계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감각주의는 반대로 말하자면 우리가 자연을 아무런 매개 없이 경험한다는, 이른바 “소여의 신화”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요 문제로 된다. 맑스가 극복하려 한 것은 헤겔이 아니라 포이어바흐다. 아울러 이는 자연의 역사적 변화를 무시하여 자연이 추상적으로 된다는 슈티르너적 지적으로도 촉발된 문제의식이다.
“1. 지금까지의 모든 유물론 - 포이어바흐를 포함하여 - 의 주요 결함은 대상, 현실, 감각을 다만 객체 또는 지각의 형식으로만 파악하고 인간의 감성적인 행위로서, 실천으로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으며 주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 돌베개, 121p)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는 자연의 선차성, “객체의 우위”와 매개된 인식이라는 두 상반된 테마를 어떻게 조합시킬지가 문제가 되고, 이것이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양 저작에서 포이어바흐에 대한 태도는 조금 상반된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자본』 또한 일차적으로는 이것의 해명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물질은 물질로서의 사회에 매개되어 인식된다는 것이 맑스의 결론이었다.
5. “학의 시초는 무엇으로써 마련되어야 하는가?”
5.1. 순수존재는 가능한가, 혹은 보편자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가.
“정신의 현상학으로부터, 달리 말하면 현상화되는 정신으로서의 의식의 학을 기점으로 하여 전제되는 것은, 이 의식이 도달한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곧 순수지라는 것이다. 바로 논리학이야말로 순수 학문이며, 광역화되고 확장된 상태에서의 순수지이다. (...) …순수지의 개념이야 말로 존재로 하여금 절대적 학문의 시원이 되도록 하는 근거이다. (...) 시초는… …그 어떤 것도 전제로 삼아서는 안된다. (...) 그러므로 시초는 곧 순수 존재이다.” (헤겔, 『논리의 학』, 자유아카데미, 69~70p)
매우 거칠게 『정신현상학』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사유와 존재는 동일하므로 사유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한 사유인데, 무전제의 사유는 곧 무전제의 존재, 순수한 존재이고, 즉 순수 존재는 순수한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얼핏 보면 걸고 넘어지기 힘들어 보이지만, 포이어바흐는 아예 근거, 시초 자체를 비판한다. 왜 학이 자체 내에 순수한 근거를 마련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시초의 개념은 더이상 비판 대상이 되지 않고 직접적으로 참되고 보편타당한 것인가?”(179~180p)
포이어바흐는 그러한 시초가 사실상 불가하다고 말한다. 시초의 제시에 사유행위가 선행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순수 존재를 무규정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무규정함 역시 “사상규정”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논리의 학』이 그러한 모순을 제거해나가는 과정임을 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이렇게 말한다. “존재는 결말에 가서는 철회된다. 존재는 참된 시초가 아닌 것으로 증명된다.” 그러나 존재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절대 이념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절대 이념은 절대 이념이라는 동어반복이 아닌가?
거기에다, 순수 존재에 반대되는 것인 순수 무를 사유함은 가능한가?
“무의 사유는 자기 자신을 반박하는 사유이다. 무를 사유하는 자는 사유하지 않는다. 무는 사유의 부정이다. 따라서 무는 어떤 것으로 만들어짐으로써만 사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무는 그것이 사유되는 바로 그 순간에 사유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무의 반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는 자기 자신과의 단순한 동등성이다.> 그럴까? 하지만 단순성이나 자기와의 동등성은 실재적 규정들이 아닌가?”(205p)
포이어바흐는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다면 “...내게 우선 보편 개념들의 실재성을 증명해보라!”(190p)고 말한다. 즉 『논리의 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규정된, 순수한 존재 자체를, 존재라는 개념 자체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한다. 감성적 직관은 존재란 언제나 규정된 것이기에 순수한 존재란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헤겔은 이러한 감성적 직관을 미리 반박해놓아야 한다. 아니라면 “사변의 자기 자신과의 독백”(191p)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존재자 없는 존재란 없다는 아도르노의 하이데거 비판을 본다.)
5.2. 헤겔의 형식주의
포이어바흐에게 순수 존재에 대립하는 것은 구체적이고 감성적인 존재이다. “감각적 존재는 논리적 존재를 부인한다.”(191p) 이러한 모순은 구체적으로 해소되었는가?
포이어바흐는 절대 이념이라는 개념에 이미 자기 증명이 들어 있기에 헤겔의 논리는 동어반복이고, 절대 이념은 절대 이념이라는 추상성이라고 말한다. “절대 이념이 타자로서 정립하는 것은 본질상 이미 다시 이념을 전제한다. 그래서 증명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다.”(193p) 진정한 증명은 절대 이념과 이념 아닌 감성적 존재자와의 합일이다. 그런데 헤겔은 그러한 존재자를 미리 추방하고 시작한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러한 반론이 미리 반박되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정신현상학』으로 넘어간다.
“헤겔은 사상의 타재 또는 일반적으로 이념의 타재로부터 이념이나 사상을 산출했는가? 한번 보자!” (195p)
5.3. 『정신현상학』의 동어반복
포이어바흐는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신 장이 감성적 확신을 이미 보편에 매개된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감성적 확신에 대한 헤겔의 말을 들어보자.
“최초에 또는 직접적으로 우리의 대상이 되는 지는 그 자체가 직접적인 지, 즉 직접적인 것 또는 존재자에 관한 지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헤겔, 『정신현상학』, 아카넷, 93p)
이러한 직접적인 지가 감성적 확신이다. 감성적 확신은 “이것”, “지금”, “여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여기”, 이 “지금”의 지시체는 주변이 변하면 변한다. 그러나 “여기”, “지금”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다시금 자신이 매개된 단순성이거나 보편성임을 스스로 드러낸다.”(헤겔, 『정신현상학』, 아카넷, 97p)
허나 포이어바흐는 지시체가 실제적인 행동을 해야만 변한다는 점에서 지속적으로 실재성을 입증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헤겔의 논리는 언어의 영역에서나 옳은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언어적 전회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나, 언어의 영역에서만 갇혀있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포이어바흐가 혐의를 제기하는 동어반복이다. 감성적 의식에게 “여기”는 전혀 보편자가 아니다. 그런데 헤겔의 논변은 위에서 보다시피 “여기”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야, 그러니까 보편자여야 성립한다. 그런 의미에서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현상학적 여기는 내가 고정시키는 다른 여기와 어떤 점에서도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상학적 여기는 사실상 이미 보편자이기 때문에 역시 보편자임이 증명되는 것이다. (...) 헤겔이 반박하는 것은… …논리적인 여기이고 논리적인 지금이다. (...) 『현상학』은 오로지 현상학적 『논리학』일 따름이다-이 관점에서만 감각적 확신에 관한 장은 변호될 수 있다.”(197p)
즉 『정신현상학』은 전혀 감각적 확신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이다. 『정신현상학』은 “사상의 타재가 아니라 사상의 타재에 대한 사상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197p)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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