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연
6.1. 구체성과 객관
기실 피히테로부터 시작하는 독일 관념론을 이끌어왔던 것은 구체적 자기관계라는 테마이다. 이 특징은 심지어 마르크스에 이르러서도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그것은 독일 관념론이, 아니 근대철학이 감각적인 것을 사상하고 주관에서 시작하기에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이다. 이러한 이념에, 특히 헤겔의 철학에 따르면 주관은 객관에 의해 정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객관은 주관에서 연역되어 나와야 하는데, 그 주관에서 연역된 객관이 어떻게 자기만의 구조를 가지고 주관과 구체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이다. 포이어바흐는 이를 사이비문제라고 보고, 처음부터 객관에서 시작하는 길을 선택한다. 포이어바흐가 보기에 객관, 감성적 존재자, 즉 자연은 처음부터 구체적이기에 주관을 산출하여도 주관은 구체적으로 객관과 관계할 수 있다. 자연은 그 자체 즉자대자적이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는 어떠한가? 헤겔은 자연이 이념 없이는 무력하고 우연으로 가득 차 있다 규정한다. 헤겔에게서 자연은 자체적인 원리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원리를 가지지 못하는 것은 자연이 이념의 소외이기에 그렇다. 자연은 이념의 부산물이고, 구체적이지 못하기에 자연과 주관이 관계를 맺어도 그것은 주관의 추상적 자기관계이다.
“자연은 타자존재의 형식으로 있는 이념으로 나타난다. 이념이 이와 같이 제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것이고 자신에게 외면적이기 때문에, 자연은 이 이념에 대해서 단지 상대적으로만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외면성은 자연이 자연으로 존재하는 규정을 이룬다.”(헤겔, 『엔치클로페디』, 나남, 제247절)
“개념규정들을 다만 추상적으로만 지니고 있으면서 특수한 것에 대한 상세한 서술을 외적 규정 가능성에 방치하는 것이 자연의 무력이다.”(앞의 책, 제250절)
여기서 문제가 되는 타재(Anderssein), 즉 타자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논리의 학』의 설명을 따르자면 “특정한 현존재에 생소한 규정을 가진 것이거나 혹은 현존재의 외부에 있는 타자로 나타”나는(헤겔, 『논리의 학』, 자유아카데미, 126p) 것이다. 헤겔의 사변철학은 앞서 설명하였듯이 구체적 자기관계, 구체적 동일성을 요구한다. 그것을 위해 이념은 이념의 타자로 이행하고 그것이 다시 이념으로 이행하여 구체적 동일성을 이루는 체계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구체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이념이 타재로, 즉 “생소한 규정”을 가진 것으로 되어야 한다. 허나 헤겔의 자연은 “무력”한 것, 그 자체 원리를 지니지 않은 것이다. 헤겔의 자연은 『논리의 학』의 구조를 반복하여 진행할 뿐이다. 그러한 점에서, 헤겔의 자연은 진정한 이념의 타재가 아니라 이념의 타재에 대한 이념이다. 물론 타재를 어떻게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포이어바흐는 비철학을 주장한다.
더 자세히 다루자면, 타재는 외면적인 것이고 상호몰교섭적인 것이어서 그 자체의 역사와 다른 이념에 따른 구조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헤겔에게서 자연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헤겔의 자연철학은 자연이 가지는 범주들의 발전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공간이라는 규정 내에서 이념의 발전의 체계에 따라 관념적으로 서술한 것에 불과하다. 이는 이념의 충분한 외화가 아니다.
대안으로 포이어바흐는 다시금 『논리의 학』의 순수 무에 문제를 제기하며 무는 무의미이기에 존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동어반복은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사유는 존재로부터 나오지만, 존재는 사유로부터 나오지 않”기에(포이어바흐, 「철학의 개혁을 위한 예비 명제」, 민음사, 223p) 구체적인 자기 관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통일로, 주관과 객관의, 아니 객관과 주관의 통일로 인간을 제시한다. 즉 사유는 사유의 자기 인식이 아니라, 존재의 자기 인식인 것이다. 존재가 사유를 통해 존재 자신을 인식하고 구체적 동일성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모티브는 철학이 현실에서 자신을 실현해야 한다는 마르크스로 이어진다.)
“매개 개념에 담긴 불균등성으로 인해 주체는 객체가 주체에 귀속되는 것과 완전히 다르게 객체에 귀속된다. 객체는 단지 주체를 통해 사유될 수 있지만, 주체에 대해 언제나 타자로 보존된다. 하지만 주체는 그 자체의 특성상 미리부터 객체이기도 하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한길사, 264p)
객관과 주관, 존재와 사유의 이러한 비대칭성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보이며, 헤겔 철학 체계 내재적으로도 객관이 주관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근거가 있다. 구체적인 것에서 인간은 추상을 통해 추상적인 것을 가질 수 있지만,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들어가자면, 감성적 존재자를 인식하는 감성은 항상 감각할 타자를 필요로 하고, 또 감성은 언제나 구체적인 질을 가지기 때문이다. 포이어바흐에게는 감성이 곧 현실이다.
6.2. 한계
그러나 포이어바흐의 감각론은 한계를 가진다. 포이어바흐는 사변을 철학에서 완전히 때어놓고 결국에는 소박실재론으로 귀착하기에, 회의주의를 다시 부활시키고 만다. 사변철학에는 회의주의가 대립시킬 타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회의주의는 무력해지나, 포이어바흐의 감각론은 그렇지 않다. 나아가 포이어바흐는 자연을 수동적으로 파악하기에 자연이 스스로 변화될 수 있음을 모른다. 『정신현상학』의 감성적 확신 장에 대한 반박은 유의미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모든 매개를 거부해버리고 만 것이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와 사회라는 지평을 통해 헤겔의 변증법이 가지는 유동성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결합하려고 시도했지만, 잘 알다시피 경제학의 엄청난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본』의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렇기에 마르크스와 포이어바흐의 기획은, 슈티르너의 기획은, 나아가 헤겔의 기획은, 피히테가 『지식론』에서 요청한 독일 관념론 전체의, 주객의 구체적 동일성이라는 기획은, 칸트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기획은 아직도 문제로 남아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