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현상학은 존재론이니까 형이상학... 맞?겠지? 


1. 서론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교황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실존주의가 현상학에 기초해있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보인다. 대부분은 통속심리학의 영향 하에서 실존주의를 이해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를 철학사에서 탈각시키고 또 그의 주장이 갖는 함의를 희석시킬 위험이 존재한다. 이 글은 사르트르의 존재론을 현상학적 맥락에서 알리기 위해, 그리고 왜 사르트르가 현상학사(史)에서 후설 다음가는 하나의 변곡점인지 보이기 위해 씌어졌다. 


사르트르는 그의 대표작인 『존재와 무』에서 이렇게 첫 문장을 시작한다: "현대사상은 존재하는 것을, 이를 밝히는 나타냄들의 연쇄로 환원시킴으로써 뚜렷한 진보를 이룩했다."(장-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동서문화사, 15p.)


이 "현대사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상학이다. 그런데 현상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1.1. 현상학의 기획과 그 발원지


사르트르가 현상학이라는 사조에서 나왔듯이, 현상학도 그 근원을 가진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헤겔 사후로 올라가야 한다. 여기서는 현상학의 세부적인 내용이 아니라 그것의 기획이 무엇이었는지만을 짧게 다루겠다. 즉 모티브들의 변천사를 다루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헤겔 사후 헤겔 학파는 분열을 겪는다. 이 중 헤겔 좌파에서 그 유명한 마르크스가 나오지만, 이 글의 관심사는 마르크스주의에 묻혀있던 19세기 중후반 철학의 다른 부분이다. 헤겔 학파에는, 헤겔 좌파보다 훨씬 알려지지 않았던, 헤겔 우파, 노장 헤겔학파가 있다. 이들의 범위는 청년 헤겔학파보다 훨씬 불명료하고 신칸트주의와의 경계도 흐릿하다. 다만 우리는 빌헬름 딜타이를 하나의 인지도 있는 이름으로 내세울 수 있겠다. 이러한 헤겔 학파의 분열과 셸링의 죽음으로 인한 자연철학의 완전한 사멸로 - 흔히들 자연철학이 뉴턴에서 끝났다고 알고 있지만, 뉴턴식의 기계론적 자연학에 반발한 낭만주의자들은 다시금 자연철학을 세우기 시작했다. - 자연과학이 대두되고, 철학의 위치설정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연철학과 자연과학의 접합을 시도했지만, 아예 다른 길을 간 이들이 있었다. 신칸트주의자들.


신칸트주의와 노장 헤겔학파는 자연과학 자체의 지위를 철학이 되찾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아예 자연과학에 무너지지 않을 타당성을 가진 학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정신과학, 즉 인문학이었다. 이들은 정신과학의 철학이라고 범박하게나마 묶을 수 있는 철학을 전개했는데, 이들에 따르면 가치판단, 해석, 이해 등등의 것은 자연과학적 객관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이들은 그곳에서 철학을 다시금 정초하고자 했다. 정확히는 자연과학의 방법론 정초라는 것으로도 연명할 수 없을 정도로 철학이 자연과학에 밀리자, 아예 정신과학의 방법론을 정초하는 것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여기서 심리학 또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아직 유아기였기에 그 위치가 불명확했고, 이는 후술할 심리학주의 등의 원인이 된다. (이렇게 보면 논리실증주의와 현상학이 동일한 뿌리를 갖는다는 매우 재미있는 결론이 나온다.)


(헤겔 사후 철학에 어떠한 대혼란이 있었는지는 프레더릭 바이저의 『헤겔 이후』를 참조하면 좋을 것이다.)


아무튼 이 정신과학의 철학자들은 자연과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학문 영역을 탐구했고, 그 기획이 20세기 초반에 논리학 - 심리학 - 수학 사이의 관계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려하던 프레게나 후설 등에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렇게 신칸트주의의 기획을 계승한 후설은 신칸트주의자들이 물러섰던 자연과학의 정초 문제까지 발을 넒혀, 어떤 의미에서는 아예 학문의 나무 기획을 다시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이는 마흐나 오스트발트류의 실증주의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떻게? 후설은 현상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한다. 자연과학이든 정신과학이든 현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의식에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 지에 대한 연구는 근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초기 현상학의 기획이었다. 즉 자연과학으로부터 철학을 구출하겠다는 기획이 후설 현상학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가치철학의 영향을 후설보다 짙게 받았는데, 그래서 하이데거의 현상학 기획은 정신과학의 독립적 정초라는 노장 헤겔학파적 의도에 좀 더 정향해 있다. 


이것이 독일에서 현상학 기획의 발생과 전개였다. 그런데 후설 현상학이 프랑스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하나의 분리가 발생한다. 장 카바이예스나 레옹 브륀슈비크와 같이 수학적 방법론으로 현상학을 받아들인 이들이 정통적인 흐름이었지만, (이는 프랑스 과학철학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하나의 변곡점이 발생한다. 후설 현상학은 어디까지나 근본학의 정초였고, 그것을 위해 존재론에 접근한 것이었다. 후설 현상학의 체계에서 존재론이 차지하는 것은 하나의 분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존재론적 성격을 급진화시킨 하나의 변곡점이 발생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제 살펴볼 사르트르이다. 


1.2. 후설의 지향성 테제


구체적으로 사르트르는 도대체 후설의 어떤 면을 급진화시킨 것인가?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지항성 테제이다. 지향성 테제는 우리의 의식은 항상 무엇에 관한 의식일 수 밖에 없다는 테제이다. 후설은 이것을 주로 의식 아닌 대상에게만 적용하여 연구하였지만, 사르트르는 이것을 의식 자체에, 현상학 자체에 적용시킨다. 그리고 여기에 후설이 도입한 현상=존재 도식을 적용시키고, 마지막으로 칸트 철학에 흄을 섞어 초월론적 의식 역시 구성된 것임을 보이려 했다. 자세히 들어가보자.


2. 사르트르의 후설 비판


사르트르의 후설 비판은 『자아의 초월성』이라는 초기 저작에 가장 잘 개진되어 있다. 여기서 사르트르는 자아가 의식 외부에 있음을 보이려 시도한다. 사르트르의 핵심 문제제기는 다음의 인용구에서 잘 나타난다. 한번 보자:


"칸트에 따르면 "나는 생각한다는 우리의 모든 표상에 동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가 '시실상' 우리의 모든 의식의 상태에 거주하고, 실제로 우리 경험의 최상의 종합을 수행한다고 결론 내려야만 할까? 비판의 문제는 권리의 문제이다. 칸트는 '나는 생각한다'의 사실상의 현존에 관해서는 결코 확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칸트는 "나"가 없는 의식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나는 생각한다가] "동반'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하기 떄문이다. 내가 나의 지각 또는 사유를 항상 '나의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조건들 둥 하나라는 것, 이것이 전부이다. 그러나 비판에 의해 규정된 가능 조건들을 '현실화'하는 것은 현대철학의 위험한 한 경향이며..." (장-폴 사르트르, 『자아의 초월성』, 민음사, 18~19p.)


이것은 자아에 대한 흄적 공격을 다시금 부활시키는 것이다. 칸트는 매 순간들의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그 어떤 초월적 통각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칸트는 그것이 있어야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것이지, 실제로 있는지는 확언하지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초월적 통각이 산출하는 자아동일성은 사후적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매 순간에 "나는 생각한다"가 동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요구되는 것에 불과하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후설은 자아동일성에 관한 이 문제를 "초월론적 의식"을 통해 해결하려고 했다. 이 "초월론적 의식"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다. 후설의 이 환원은 충분했는가? 그렇다면 초월론적 의식은 전(pre)인격적일 것이고, "나는 생각한다"는 동반될 수 있게 된다. 즉 초월론적 자기가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초월론적 자기는 초월론적 나에 의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초월론적 나란 무엇인가? 그것은 유아론을 부활시키는 것이 아닌가? 


이 초월론적 자기의 구성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나가 타당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초월론적 나는 절대적으로 의식에 현존하는가? 우리의 모든 체험들에 초월론적 나는 동반되는가?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초월론적 나는, 초월론적 자아는 필요없는 것이다. 후설은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을 이유로 초월론적 나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은 지향성과 시간의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대상은 초월적이고, 그러한 초월적 대상을 통해, 그리고 후설에 따르면 과거지향을 통해 그 스스로를 통일하는 시간의식을 통해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이 가능해진다. 후설에 따르면 의식의 주관적 통일은 나의 종합하는 힘에 호소하지 않아도 성립한다. 즉 초월론적 나는 필요없고, 환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나아가 반성의 문제로 들어간다. 데카르트와 후설의 코기토는 사실상 반성된 의식이다. 그런데 반성된 의식은 반성하는 의식에 대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반성적 인식이 아니라 비반성적 인식이다. 비반성적 의식에는 내가 현존하지 않는다. 사르트르는 후설의 지향성 테제를 급진화하여, 사과룰 볼 때는 오직 사과에 대한 의식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 부분은 필자가 후설 자체의 현상학을 잘 모르기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르트르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지향성은 우리 의식이 항상 '초월적'인 대상에 대한 의식이란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아는 반성을 통해 가능한데, 반성된 나는 비필증적이고 불투명하며 비충전적이기에 초월적이다. 따라서 의식은 항상 의식 바깥에 있는 것과 관계하며, 그 자신과는 관계할 수 없다. 그 자신과 관계하는 순간 의식은 의식을 그대로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의식 외부에 구성하는 것이다. 자아는 의식 외부에 존재하며, 의식은 항상 무이다. 현상학적 환원 이후에 의식에 남는 것은 지향성 뿐이다. 그 어떤 의식 내용도 전부 의식이 정립한 것이기에 환원되어야 한다. 따라서 환원 후에 얻어지는 순수의식은 무이다. 무규정적이고 무정립적이다. 그렇기에 자유롭지만, 항상 어떤 초월적인 대상에 대한 것일 수 밖에 없고, 순수의식의 존재 자체가 초월적 대상을 전제한다. 그렇게 사르트르는 유아론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사르트르의 존재론은 대상과 대상에 기생적인 의식으로 나뉜다. 대상은 자체로 존재이유가 충분하지만, 의식은 아니다. 전자를 즉자존재, 후자를 대자존재라 한다. 


쓰다보니 형이상학과 관련 없는 글이 되어버린 것 같지만, 대충 인식론이라고 치자. 자아동일성은 형이상학의 오래된 주제가 아닌가.


3. 사르트르 현상학의 의의


후설에게서 타자의 존재는 유추될 수 밖에 없었고, 하이데거에게서 존재자들은 현존재에 구속되는 그 무엇에 불과했다. 반면 사르트르는 의식을 이차적인 것, 대상에 기생적인 것으로 놓음으로서 우리 의식의 수동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관념론과 유아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현상학의 변곡점인 이유는 이전의 신칸트주의적 잔재와 단절함으로서 현상학을 해방시킨 것에 있다. 아도르노의 지적대로, 현상학은 존재자들을 주관의 구조에 종속시킬 위험이 항상 존재했고, 하이데거의 경우에는 실제로 그러했다. 후설이 만일 상호주관성을 제대로 세웠다고 한들, 그것은 주관 속에서 골몰하는 철학이 주관들 속에서 골몰하는 철학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상호주관론 역시 주관주의이다. 반면 사르트르는 의식이 초월적인 대상을 전제한다는 것으로 나아갔고, 객관으로 나아갔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르트르는 하나의 변곡점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현상 자체가 존재란 선언으로 주관주의를 틀어막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성공한 것은 사르트르에서이다. 의식의 구조를 통해 학문을 정초하겠다는 것은 주관주의에 빠질 위험이 농후한 기획이었고, 사르트르에 이르러서야 존재 구조의 해명으로 현상학의 방향성이 옳게 잡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