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시절 황군 장교들은 명령을 받으면, 그게 가라인지 의심해보는 습관을 길러야 했음. 군령권을 사유화해서 지들 멋대로 써먹는 상관들이 있었기 때문임. ① 군령이 아닌 걸 멋대로 명령하거나, ② 실제 상관이 지시하지 않은 명령을 날조하거나 하는 식임.
① 경리 소위는 H 대위와 같은 대대 본부 소속이었는데 “그 자식은 정말 지독했지”라고 회상했다. 사치스러웠던 H 대위는, 군내에서 지급되는 담배 ‘호마레’로 만족하지 못하고 시판되는 ‘히카리光’를 매일 아침 3갑씩 사놓을 것을 경리 소위에게 명했다. 그러나 당시 담배는 모두 배급제로 군대에서 ‘호마레’가 지급되는 만큼 일반 사회에서는 담배가 풍족하지 못했으며, 전국적으로 상황이 악화되면서 아무리 주위에 수소문을 해도 ‘암거래’로조차도 히카리를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경리 소위는 이런 대대장의 사사로운 요구에 지칠 만큼 지쳐서는 히카리 사재기를 그만뒀다. 그리하여 이윽고 대대장실 책상 위에 히카리 3갑 대신 호마레가 등장하는 날이 왔다.
H 대위는 화를 냈다. “히카리를 사라고 명령했을 텐데 왜 명령에 따르지 않았나.” 이 말에 경리 소위 역시 울컥해서 말했다.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명령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라고?” “네.” “그래, 그럼 지금부터 대대 명령을 내리겠다!” H 대위는 당당하게 매일 아침 히카리를 3갑씩 ‘구입할 것’이라는 정식 대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② 이쿠타生田 사령관으로부터 바로 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돌아오니 이쿠타가 “진보 군, 큰일이야. 이런 명령이 내려왔다”며 한 통의 문서를 보여줬다. 그건 정식 명령 문서였는데 ‘마닐라 군사령부 참모장 발송. 지금 귀하의 부대에서 체포한 전 재무 장관이자 하원의장 마누엘 로하스(이후에 대통령이 됨)를 즉시 처형할 것. 처형한 뒤 전보가 아닌 서류로 하야시林 군정부장에게 보고할 것이며 군사령관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의 명령에 따라 이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바탄 작전이 끝났을 때 제1선 부대로 포로를 죽이라는 군의 명령이 내려왔던 상황이 문득 생각났다. 그런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 당시에는 끝끝내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구두 명령이 아닌 필기 명령이지만 그때와 똑같이 누군가가 멋대로 만들어 낸 명령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일본 성전의 의의와 국제적 인도정신에 어긋난다고 느꼈다. “이 명령은 진짜일까요. 로하스를 잠시 어딘가에 숨겨놓을까요”라고 말하자 이쿠타도 “군 명령일지라도 어떻게든 도와줄 방법이 있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
마닐라 군사령부에서는 혼마 군사령관이 경질될 상황으로 어수선했기 때문에 그와 직접 만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2층의 와치和知 참모장 방으로 갔다. “일본군이 군정적으로 필리핀을 장악하려면 대중의 신망을 받는 이런 인물을 살려두고 활용해야 합니다. 죽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 어떻게든 살려만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와치는 “나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명령이 내려진 날인 6월 22일에는 도쿄 출장 중이라 자리에 없었다”는 겁니다.
-알라딘 eBook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최용우 옮김) 중에서
정식 명령으로 할 일이 아닌 걸 명령하거나, 명령을 날조하거나. 이게 황군 놈들 클라스임.
가짜 명령인지, 잡아떼는 건지도 알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