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편 \"10억 대동아 민족의 지도자\"


수마트라(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일본군의 침공과 함께 일본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현재 인도네시아 서부에 위치한 섬이다) 파견 제25군(사령관 다나베 모리타케)에 속한 적성국인敵性國人 억류소 소장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네덜란드의 전사戰史에서는 일본 병사의 잔학성을 특히 강조하는데, 이 억류소는 국제법을 가장 잘 지킨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이케우에가 메단에서 열차를 타고 찾아간 곳은 산악지대의 종점 시링고링고였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막사와 같은 허술한 건물이 10여 채 늘어서 있었다. 이 건물에 ‘적성국인 2000명’이 수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수마트라의 메단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던 네덜란드인과 그 주변의 농장 경영자, 노동자 등을 포함해 민간인 남자만 2000명을 억류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군정부軍政部에서 관리하다가 나중에 제25군 관할로 넘어왔는데, 억류자들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스파이 활동을 차단하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습니다. 나는 소장으로서 그곳을 관리했을 뿐입니다. 이런 산속까지 와버렸으니 내가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갈 수나 있을지 참 개탄스러웠습니다.”

이케우에는 이렇게 말하면서 지도를 펼쳐 보여주었다. 북부 수마트라의 중앙부에 있는 정글 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각지를 점령하면 군인은 포로수용소에, 민간인은 적성국인 억류소에 수용했다. 그리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일상생활을 감시했다.  


“민간인 수용소이기 때문에 강제로 노역을 시키지는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원칙적으로 노역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단,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장을 만들게 했습니다. 나머지 시간은 억류소 안에서 한가롭게 보냈지요. 억류자는 독자적으로 자치 조직을 만들었는데, 그 조직에는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매일 만나 내일은 어떤 작업을 할지 상의하기도 하고, 그들의 희망 사항을 듣기도 했습니다.”


1943년 10월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그곳에서 소장으로 있었는데, 그때 학대 행위와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나는 학생 출신 장교라 일본군의 체벌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하에게도 절대로 폭력을 휘두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딱 한 번 네덜란드인 세 명을 때린 적이 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밤중에 억류소를 빠져나가 이웃 마을에서 자신들의 소지품과 먹을거리를 교환했습니다. 그것은 금지된 행위였기 때문에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소장실에서 그들을 때렸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나는 그들에게 사과했습니다. 그때는 내가 나빴다고 말이지요. 그러자 그들은 됐다며 그건 자신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고마웠습니다.”


시링고링고의 제5분견소에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아에쿠파민케에 적성국인 여성 억류소가 있었다. 이곳에도 2000명 정도의 여성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케우에의 억류소에 수용되어 있는 이들의 아내나 딸이 많았다. 어느 날, 이케우에는 여성 수용소에 가는 길에 억류자 자치 조직 위원장에게 아내에게 전할 말이 있으면 전해주겠노라며 메모장을 건넸다. 위원장은 메모장에 네덜란드어로 몇 마디 적었다. “건강하게 잘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아에쿠파민케 억류소에서 그의 아내에게 메모를 보여주었다. 답장을 쓰고 싶다고 했다. 이케우에는 그러라고 했다. 잇달아 여성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메모를 적었다. 메모장은 금세 온갖 메시지로 가득 찼다. 그것을 억류소로 가지고 돌아오자 억류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이케우에는 아에쿠파민케 억류소의 소장 니시 준위와 협의를 할 때마다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다.


한번은 열두세 살짜리 남자아이가 소장실로 와서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주셔서 정말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그 소년은 아버지가 네덜란드인이었고, 어머니가 일본인이었다.

소년의 어머니 하마자키 후사노는 메단에서 네덜란드인과 결혼했다. 네덜란드 국적이었다. 근위 제2사단 사단장이었던 무토 아키라가 하마자키 후사노에게 “당신은 일본인이니까 이 억류소에서 나가라”고 명했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네덜란드인과 결혼한 나는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니다. 이 억류소에서 나가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전후 하마자키는 네덜란드에서 살았는데, 네덜란드인 사이에서도 이때의 행위로 칭찬을 들었고 박해도 전혀 받지 않았다고 한다.

억류자끼리 글을 주고받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케우에는 위원장에게 “이렇게 기뻐하는데 글을 주고받는 것 말고 더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선물을 주는 게 좋겠다면서 고무나무로 샌들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케우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시링고링고와 아에쿠파민케 사이에 샌들이나 채소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이케우에는 북부 수마트라의 비룬에 있는 사단의 연습을 견학하러 갔다. 근위 제2사단은 연습 견학이라는 이름 아래 각 억류소의 소장들을 모아 패전 소식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케우에는 이곳에서 패전 소식을 들었으며, 사단 정보 참모의 지시를 받고 시링고링고로 돌아왔다.

다음 날, 사단에서 장교와 통역이 와서 이케우에와 함께 억류자 대표 십 수 명에게 종전 전달식을 거행했다. 일본군이 이겼는지 졌는지 상세한 내용은 일절 언급하지 않은 채 어쨌든 전쟁은 끝났다는 사실만 억류자들에게 알렸다. 억류자들은 빙 둘러서서 그 전달식을 지켜보았다. 식이 끝나자 억류자들은 앞 다투어 이케우에 앞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제각각 말했다.

“전쟁 중이라면 적군과 아군이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다면 오늘부터 우리는 친구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더니 악수를 청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은 무척 너그러웠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 후 내 인생관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일본인이었다면 이런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니 정말 부끄러워지더군요.”

이케우에는 이렇게 말하고 이때의 기억이 떠올라서였는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 후 이케우에는 전범용의자로서 메단 형무소에 수용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군사검찰청 소속 검사에게 불려가 “메단의 네덜란드인 사이에서 당신을 조기 석방하라는 서명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바타비야 총독의 허가가 내려오면 곧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탄원서를 보여주었다. 탄원서에는 시링고링고의 억류소에 있었다는, 이름도 모르는 인물이 솔선하여 탄원서를 돌리면서 서명을 받고 있다는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리하여 이케우에는 1946년 11월에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알라딘 eBook <쇼와 육군>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 정선태 옮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