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방일보 윤팔 기자의 뉴스를 겨냥한 일종의 고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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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는 복제, 위조, 변조, 모조를 포괄하는 유사개념이다. 즉, 모방과 위조의 형용사적 사용이며, 가치 개입적 의미를 내포한다. '가짜(Fake)'는 다의적이고 복합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특정 용어만을 지칭할 수 없다.


‘가짜 뉴스’는 ‘가짜(Fake)’와 ‘뉴스(news)’의 합성어이다.

뉴스는 사실과 진실을 추구한다는 기본 원칙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fake’라는 술어와 합성되는 순간 형식적 오류가 발생한다. 이는 자가 모순적 행위, 모순어법에 해당한다.

언론사회학자 셧슨은 말한다. “기자들은 뉴스를 만든다(make the news)”는 말은 “make the fake”를 의미하지 않는다.

즉, 언론은 본성상 fake를 배척해야 한다.


뉴스란 독립적이고 신뢰할만 하며, 정확하고 종합적인 정보다(Kovach & Rosenstiel, 2014).

그런데 뉴스라는 말에 주관과 허위성(Fake) 결합되면, 뉴스는 넌센스로 전락한다.


현재 ‘가짜 뉴스’라는 말은 루머(rumor), 유언비어, 허위지식(counterknowledge), 허위정보(misinformation), 왜곡된 정보(post-truths),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 지독한 거짓말(damned lies) 등 메타포적 개념과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가짜 뉴스'인가?

의도된 가짜 뉴스란, 뉴스의 형식을 빌려 검증된 사실인 것처럼 포장된 거짓 정보를 뜻한다.

즉, 의도적 허위성(falsity)과 뉴스의 형식성(formality), 이 두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한다.


지엽적으로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

명예 등에 손상을 입히기 위한 고의성, 거짓 또는 왜곡된 사실을 유포하는 허위성, 언론 보도로 오인하도록 꾸민 뉴스의 형식성, 그리고 이를 기획/조작한 작위성이다.

이 네 가지 요소가 충족된다면, 그것은 기만적 기사로 규정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누군가가 가짜(fake) 뉴스를 정당한 뉴스의 형식을 빌려 유포했다면, 그것은 ‘의도된 가짜 뉴스’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잘못된 정보와 ‘의도된 가짜 정보’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핵심은 기사 작성 과정에 불순한 의도성이 숨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뉴스의 외형을 갖추었는가 하는 점이다.

기만적 정보는 부정의적으로 조작되고 유통되었다는 점에서, 의도된 가짜 뉴스, 즉 허위조작정보라는 개념이 성립한다.


앞서말한 위 기사(들)는 모든 조건을 만족하므로, 기만적 기사로 정의 가능하다.


그러나, 윤팔의 기사는 그런 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

뉴스의 작위성과 기만성, 허위성과 고의성을 모두 기사의 형식성(formality)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앞선 사진에서, 윤팔 기자의 주관성을 배제한 뉴스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판단에서 윤팔 기자의 기사는 가짜 뉴스가 아니라, ‘가짜인 수필’로서 정의된다. 가짜의 수필. 가짜의 투정. 가짜의 글 => 작위적인 기만 글... 어디에서 본 적 있지 않은가?


"폭력의 사전적 정의 => 불법적 방법에서 행세되는 물리적 강제력."


위 명제는 폭력의 사전적 정의이다. 하지만 인간이 주체가 되는 폭력의 기고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폭력의 목적과 한계성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깊게 관조해볼 필요가 있다.


폭력이란 그 목적이 명료하다.

사회 질서의 유지를 목적으로 때때로 공권력은 물리력을 행세한다. 위희를 목적으로 폭력을 행세하기도 하며 세상의 비합리성의 도피를 위해 스스로에게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폭력은 도구이다. 즉,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쯤에서 나는 폭력의 조건에 관해서 말하고자 한다. 욕망 해소의 수단에 불과한 폭력. '인간 - 인간'에의 폭력은 피해자의 자유(목숨)을 주체가 가진 당장의 유희의 비중보다 낮게 측정할 때, 인간은 인간에게 폭력한다.


폭력은 두 가지의 양태가 존재한다. -굴종과 비굴종-

나는 폭력의 본질적 단초인 굴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인간은 폭력에 굴종한다. 제아무리 억센 인간에게도 폭력은 공평하게 아프지 않는가? 굴종한 인간은 폭력의 주체로 하여금 사람의 형상을 한 사물로서 관조된다. 노예인 것이다.


이쯤되면 인간에의 폭력이란 대상을 사물로서 전락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식할 수 있다. 과연 맞을까? 폭력은 그 자체로 무용성을 기고로한다.

절대적인 수단이 존재하는가? 만약 인간이 완전한 존재라면 납득 가능하다. 하지만 완벽이란 그야말로 신비주의 아닌가?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동시에 반항적 주체이기 때문에 폭력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세상에 절대 권력이 있고 그 기고에 폭력이 있다면, 더이상 사회가 아니라 정글임이 자명하다.


여기까지 보았다면 반드시 폭력의 두 번째 조건을 말해야 한다. 폭력은 폭력을 행하는 자와 대등하거나. 혹은 그보다 그의 이상에 가까운 자를 시선하면서 생성된다. 길가의 돌맹이에게 욕하고 주먹질하는 사람을 본 적 있는가? 만일 보았다면 그것은 정신병일 것이다.

앞선 추론에 따라 폭력은 인간을 사물로서 전락시키는 분명한 목적이 존재하고 그 타자는 자신과 대등하거나 이상과 가까울 경우를 조건으로 갖는 것이다.


폭력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상과 세상의 불합리성의 간극을 인식하며 폭력을 통해 이상을 사물로서 전락시키다보면 그 끝에는 스스로가 세상의 이상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인간의 사유는 멈춘다. 완벽에서의 추가적인 동태는 퇴보인 것처럼, 이상이 된 인간은 더이상 사유하지 않는다. 사유를 멈춘 인간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그저 인간의 형태를 한 사물이 아닌가? 폭력은 자발적 전락을 전제로 한다. 타인을 힐난하여 전락시키는 이와 그 사태를 비웃으며 아프리티프로서 즐기는 이. 모두 스스로의 실추를 부지중에 인정하며 순간의 위희만을 즐기는 것이 언어도단이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