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질린 시민들과 흉악범 사이를 막아서는 경찰관
망아지를 구하기 위해 불 속으로 뛰어들어가는 소방관
죽어가는 전우를 살리기 위해 총알 사이를 뛰어다니는 군마

그들의 공통점은 죽음을 각오하고 위험속으로 뛰어들어가 알지도 못하는 포니들을 살린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 아름다운 마음에 감탄하며 그들을 영웅이라 부른다.


한때는 나도 그런 포니가 되고 싶었다.

그래… 포니.


나는 포니들을 구하는 포니가 되고싶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이야기에 등장하는 영웅처럼 모두를 구해주던 포니가.

여린 망아지가 괴롭힘을 당한 후 학교에서 쫓겨났을 때 발굽을 내밀어줄 수 있는 포니가.

성난 군중들이 죄없는 모자를 집 밖으로 끌어낼 때 앞을 막아서줄 수 있는 포니가…


잠깐 눈을 감고 추억을 떠올리던 나는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깜빡거리는 전구만이 유일한 광원인 어느 한 건물의 지하실.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을 위해 의자에 묶인 숫말의 머리에서 포대자루를 벗겨냈다.


“으읍! 음! 읍음!”

드러난 숫말의 입엔 재갈이 물려있었고,
나는 그런 그의 입에서 단단히 묶인 천을 풀어냈다.


“제.. 제발..! 살려주세요..! 저는 그냥 말단 연구원일 뿐이라고요!”

재갈이 풀리자 숫말은 침을 튀겨가며 내게 애원했고,
나는 그의 침을 닦아낸 후 숫말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가 넘긴 자료.
무엇을 넘겼는지, 누구에게 넘겼는지, 그놈은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말해”

“그.. 그건…”

숫말은 자신이 상관들 몰래 벌인 일을 아는듯한 내 질문을 듣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했고,
나는 그의 결정을 조금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단단히 밀봉되어있던 병의 뚜껑을 돌렸다.


“난 시간이 별로 없어, 이젠 자네도 마찬가지고”

나는 그 말과 함께 숫말의 왼쪽 뒷발에 액체를 몇방울 떨어뜨렸다.


내가 숫말에게 흘린 액체는 오염된 조직이나 악성 종양, 기생충 제거 같은곳에 쓰이는 물질이다.

부작용없이 신체 일부를 돌처럼 굳혀 조각하듯 깎아내거나 전부 제거할 수 있는 약물…
쉽게 말하자면 석화 용액이다.


“무.. 무슨… 윽! 으아아악!”

숫말은 자신의 발굽에 닿은 액체를 멍청하게 바라보다 액체가 닿았던 부위를 중심으로 딱딱하게 굳어가는것을 보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숫말의 비명에도 멈추지 않고 숫말의 몸을 잠식해나가던 회색 물결은 숫말의 다리 한쪽을 완전히 굳힌 뒤에야 만족한듯 확장을 멈췄다.


“다시한번 묻지… 자네가 아는것들, 솔직하게 다 말하게”

“크윽… 이런짓을 하고도… 으으.. 으아악!”

나는 위험한 액체가 들어있는 병의 뚜껑을 닫고 숫말에게 다시 질문했지만 숫말은 나를 노려보며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한숨을 쉬며 숫말의 다리를 내려찍었다.


그러자 숫말의 다리였던것은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내렸고,
찢어지는 살의 감촉도, 쏟아지는 피도 없었지만 숫말은 비명을 질러댔다.


“으아그으읍..!”

“엄살부리지 마! 자네 설마 이걸 목구멍으로 삼키고 싶은건 아니겠지..?”

방안이 비명으로 가득차자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숫말이 충분히 고통받기를 기다리다
적당한 시점에 그의 입을 막으며 겁에질려 마구 움직이는 그의 눈동자 앞에 내 발굽안에 있는 병을 흔들어보였다.


“한번만 더 비명을 지르면 목구멍에 이걸 꽂아줄거야.
질문했는데 대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고.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

찰랑이는 액체가 그를 설득시키는데 성공한 듯 숫말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서 발굽을 떼어냈다.


“내.. 내… 다리가…”

숫말은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며 허탈한듯 혼잣말을했고,
나는 다시한번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다른 다리들이 저렇게 되는걸 보고싶지 않다면… 말해”

“제.. 제가 넘긴건 이번에 개발한 전차의 설계도입니다! 아.. 아마 그리폰들에게 넘어갔을거에요!”

‘설득’ 덕분에 숫말은 순순히 자신이 벌인 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걸 왜 넘긴거지?”

“그건… 제가 빚을 져서…”

“그리폰들에게..?”

“아.. 아닙니다! 분명 포니였어요!”

숫말은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고, 나는 녀석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았다.


포니라… 포니들도 그렇지만 첩보원들은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잠입한 국가의 국민을 자신들의 정보원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그 포니는 그렇게 포섭된 포니들 중 하나일 것이다.
… 아니면 그런 부류인 척하는 중이었거나.


“… 그 녀석은 어디서 만날 수 있지?”

“그 포니는 은빛 자작나무 제약회사 소속입니다. 같은 대학 동기라서 믿었는데…”

은빛 자작나무 제약회사라. 약값이 비싸기로 유명한데다 소유주도 그리폰인것으로 알려져있는 회사다.


나는 돈을 좋아하는 그리폰들과 참 어울리는 회사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내게 자신의 비밀을 고백한 숫말은 내 행동을 보고 안심한듯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모든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듯 보였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이 지역에서 그리폰들을 위해 일하고있는건 나라는 사실이다.


나는 눈 앞의 숫말에게서 더이상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내 발굽안에 있는 병을 열었다.


“자.. 잠깐만요! 저는 제가 아는걸 다 말해르륵!”

나는 작은 병 안에 있는 액체를 숫말의 입안에 병째로 털어넣었고,
그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앉은자세 그대로 굳어가는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몸이 모두 회색으로 변하자
나는 그의 입을 막은 발굽을 떼어내고 잠시 이슬맺힌 회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그대로 앞발을 휘둘렀다.


지하실은 곧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찼고,
내 눈앞에 주변의 건설현장에서 쓰일 자갈들 한 무더기가 보일때 쯤 발굽을 멈췄다.


“… 이정도면 충분하겠네”

그 말과 함께 나는 적당히 부숴진 자갈들을 양동이에 담아 밖으로 가지고나갔다.


나는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조용한 건설현장에서 자갈들을 콘크리트 혼합기에 밀어넣고 은빛 자작나무 제약회사로 향하려다 누군가 내 뒤를 따라오고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행당하고있군’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연기하며 길을 걷다 갑자기 방향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간 다음 뒤를 돌아봤고,
골목 입구에 다른 포니의 그림자가 잠깐 비춰지다 다급히 사라지는것을 발견하자 확신을 얻고 반대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헉.. 헉…”

수십번의 기습적인 방향전환 끝에 나를 추격하는 포니들을 따돌렸다는 확신을 가진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시 대단하네? 코카트리스? 아니, 체이서”

그때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뿔이 부러진 암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네는… 누구지…”

“스카이! 스카이라고 불러”

나는 거친 숨을 내쉬며 내 이름을 알고있는 낯선 포니에게서 언제든지 도망칠 수 있도록 위치를 바꿨고,
그녀는 내 의도를 눈치챈 듯 내 움직임에 맞춰서 천천히 옆걸음질을 했다. 


“자네는 내 적인가?”

“나..? 나는 네 적이 아니야. 누구의 적도 아니지”

“그렇다면 비켜. 나는 바빠”

“왜..? 그리폰들에게 네가 추적당하고 있다는걸 알려주려고?”

나는 내가 그리폰들의 정보원이라는 걸 알고있는 스카이라는 암말에게 발굽을 날렸지만 그녀는 뒷걸음질로 발굽을 피했다.


“나랑 싸우고 있으면 스마일 요원들에게 잡힐걸!”

“…”

맞는말이었다.

지금은 감시망에서 벗어났지만 녀석들은 언제든지 다시 찾아낼 수 있었고,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데다 딱히 적의도 없어보이는 암말과 싸우느라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스카이는 내가 상황판단을 마친걸 눈치챘는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걸어왔다.


“역시 당신 상황판단이 빠르네? 마음에 들어! 나와 함께 일해보지 않을래?”

“… 자네도 내가 그리폰들을 위해 일하는걸 알텐데?”

“포니라면 종족과 관계없이 차별한다는 이유로 그리폰들 밑에 들어간것 정도는 알지.
속으로는 포니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하는것도”

“…”

스카이의 말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거의 다니지도 못한 학교에서 나를 비웃는 포니들에게 선언했던것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진심이 오늘 처음보는 암말의 입에서 나오다니…


“나는 모든 포니들… 아니, 모든 종족들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거야.
유니콘도, 페가수스도, 어스포니도… 그리고 당신같은 박쥐포니도!
그걸 위해선 유능한 포니들이 필요해 당신처럼!”

그 말을 듣자 스카이를 경계하던 나는 평온한 말투 속에 숨어있는 치명적인 단어들에 유혹당하고 말았다.

‘모든 종족들이 평등한 세상’
그 세상을 위해 내가 필요하다니!

거짓말일수도 있었지만 마음 속 기둥들이 무너져가던 나는 믿고싶었다.


“… 나는 뭘 하면 되는거지?”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자고!”

스카이는 그 말과 함께 어디론가 달려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꿈에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