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만족스럽게 관람한 영화들은 역시 <베테랑>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일 것이다. 두 영화엔 흥미롭게도 비슷한 설정이 똑같이 등장한다. 전신마비 상태의 캐릭터가 오랜 시간 누워있다 발가락을 움찔, 하고 움직이는 장면이 그것인데, 두 영화가 이 같은 설정을 다루는 태도는 전혀 다르다. <베테랑>에서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캐릭터의 회생, 즉 놓치는 것 하나 없는 완벽한 해피엔딩의 완성이다. 반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이를 본 의사는 "이거 그냥 발가락에 생기는 경련이에요. 이런걸로 희망 가지시면 더 힘들어지십니다."라고 툭 내뱉는다. 이 차이는 두 영화가 대상을 다루는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베테랑>은 겉으론 현실을 그대로 옮긴 영화로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판타지를, 대리만족에서 오는 쾌감을 추구하는 영화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겉으론 판타지스럽고 과장된 표현으로 일관된 영화로 보이지만, 오히려 '진짜' 한국 사회에 대해서 끝까지 파고들려 하는 영화다.
이 두 영화의 차이는 한국 사회의 '어디'를 바라보느냐에 있어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베테랑>은 한국 사회를 보기 위해 상부 구조를 천착한다. 재벌가의 엽기적인 행각들을 부각시키며 이를 단죄하는 방식으로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재벌가를 묘사할때든 그에 대한 단죄를 묘사할때든 거의 판타지스러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이를 실패라고 볼 순 없을 것이다. 이 판타지스러움이 영화의 미덕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베테랑>의 판타지는 능숙하게 쾌감을 제조해낸다. 반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국 사회의 하부 구조에 집중하는 영화다. 영화의 착취도, 복수도, 처벌도, 폭력도 모두 사회의 밑바닥에서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하는 잔인한 복수는 <베테랑>의 조태오나 대기업과 같은 대상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모를 모시는 분노조절장애 청년이나 죄 없는 말단 경찰들, 재개발에 목매는 동네 주민들을 향한다. 영화가 보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 속에서 불가피하게 서로를 착취하는 사람들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단 한 번도 분노를 '위쪽'을 향해 터뜨릴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리고 살기 위해 서로를 상처입히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오는 판타지적 폭력들은 쾌감 대신 깊은 한숨을 남긴다. 아마 <앨리스>의 만듦새를 <베테랑>에 비교하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앨리스>가 한국 사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그리고 그 이야기의 방식은 어떤 한국식 '대리만족형', 혹은 '분노유발형'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지점들을 형성해낸다.
<사도>는 내게 꽤 실망스러운 경우였다. 영화는 의외로 '정사'에 충실하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있었던 일의 전체적인 맥락 뿐 아니라 세부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영화는 충실한 고증을 보여준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힐 때의 상황이나, 영조와 사도세자의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개별 사건들에 대해서도 영화는 거의 그대로 묘사해낸다. 하지만 이 거의 정사 그대로의 묘사가 영화의 결말부가 주장하는 바를 강화하는 데 그닥 도움이 된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정사 속의 영조와 사도세자의 행동에는 분명 어떤 기준에서도 '비정상적인' 판단과 행동들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이 요소들을 영화가 거의 그대로 차용하고 있음에도, 결말부는 이를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이나 가족애적인 감정이 결합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으로 포장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에 설득당하는 것은 내겐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가 '우리가 이미 아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이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만한 충분히 흥미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도 영화를 즐기지 못한 이유가 될 것이다. 영화는 핵심적인 사건이 종료된 후에야 어떤 적극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는 너무 뒤늦을 뿐 아니라 너무 길고, 너무 감정적으로 과잉이라 공감하기 힘들 지경이다. 이런 마무리를 포함해 영화의 연출 방식이 유연성이 없어 지리하다는 인상도 강하다. 영화의 연기나 특정 장면들은 감탄할 만한 구석도 있는데, 전체적인 합은 그렇지 못해 아쉬웠다.
<협녀>는 뒤늦게 IPTV로 감상했다. 좆같았다. 이병헌은 오래 보고싶다. 그러기 위해 성욕은 자제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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