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날아라 님을 무척 존경하지만 이 영화에 대한 감상만큼은 동의되지 않는 부분이 꽤 있다.
이민자들의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에 이 영화의 초점이 있다고 말하는 날아라의 의견에
동의는 하지만, 나는 영화의 초점이 국적과 문화와 관련된 이민자들의 정체성 문제보다는
인간의 자기혐오와 구원을 향한 몸부림에 관한 문제 쪽으로 더욱 기울어져 있다고 본다.
확실히 브루노와 올란도의 관계, 그리고 에바와 마그다의 관계는 영화 속 극장의 벽면에 걸려있는
쌍둥이 그림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의도적인 구성임이 확실한데,
그것은 날아라의 의견처럼 이민자로서 겪어내야 하는 정체성의 절연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자아의 분열이나 그리고 분열된 자아의 반목, 그리고 분열된 두 개의 자아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은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고 본다.
아마도 브루노와 올란도 역시 처음 미국에 들어왔을 때는 에바와 마그다처럼 절실한
관계였을 것이다. 쌍둥이 같은 존재였던 이들은, 미국 땅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며
드디어 행복을 찾은 자신의 모습을 서로에게 확인시켜주는 자아상 같은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하나의 꿈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왔지만 미국은 브루노와 올란도에게
척박하고 가혹한 땅이었고, 브루노와 올란도의 영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브루노는 더 이상 푸른 희망을 꿈꾸기보다는, 흔히 '타락'이라 말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을 택해서
교활하게 보이며, 질펀하고 끈적끈적한 생존본능을 키워갔을 것이고, 올란도는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져버린 영혼의 공백 상태를 '마술'이라는 기적적인 세계를 통해서, 그리고 도박과 술이라는
판타지적인 욕망의 추구를 통해서 채워갔을 것이다.
그리고 썀쌍둥이처럼 서로를 비추는 존재인 브루노와 올란도 간의 반목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올란도는 포주가 되어버린 브루노를 잔인한 방식으로 혐오하고, 브루노는 자신을 혐오하는 올란도를
오만하고 비열한 인간으로 보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신을 혐오하는 올란도를 증오하면서도 브루노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자라나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며, 브루노에 대한 올란도의 혐오 역시 가족으로서, 그리고 같은 이민자로서
자기 혐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브루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브루노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확인시키려는 잔인한 장난을 치는
올란도의 혐오는 결국에 자기 학대이며, 에바에게 키스를 하려다가 에바가 저항하자 갑자기
화를 내며 에바를 비난하는 브루노의 행동은 자기 혐오감에 지배당하고 있는 브루노가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절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미국 이민자들이 택해야 했던 타락한 삶과 죄의식이 곧 이민자들의 자기 정체성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이민자들이 겪어야 했던 자기 혐오로서의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영화는, 현실 속 그 어디에서도 자신들이 의지할 안정적 실존의 토대를 주어지지 않은
인간들. 척박한 현실을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고는 마술적인 기적에 대한
기다림. 삶과 구원을 긍정하는 '믿음' 밖에 없는 상태로 냉엄한 세계에 던져진 존재들이 타락하고,
여전히 행복하기를 꿈꾸고, 좌절하는 모습, 그리고 용서와 구원의 가능성을 통해
인간 보편적인 실존의 문제를 불러오고 있으며 그러기에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비록 그 주제의식의 방향은 다르지만 이창동 감독의 '밀양'이 줄곧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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