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행'이 선사하는 장르적 쾌감을 만끽하던 관객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점차 처연해지게 된다. 한국 현대사의 환부가 저절로 하나씩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선명한 것은 어쩔 수 없이 세월호의 비극이다. 극중 참극은 고교생들이 탄 칸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고, 어른들은 이기심에 아이들을 돌보지 않으며, 뉴스 속 정부와 안내 방송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국민을 보호하는 대신 거짓말과 무능력으로 피해를 증폭시킨다. 마침내 친구들을 뒤에 둔 채 탈출해 혼자만 살아난 고교생이 눈물로 자책할 때 영화는 관객과 함께 조용히 흐느낀다.


여기엔 용석(김의성)처럼 지독한 인간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냉철하게 지켜보려고 하는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혐오감을 안기는 그런 도구적 악당이 아니다. 좀비영화에서의 진정간 갈등과 대립은 감염된 좀비와 감염되지 않은 인간들 사이에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 장르가 진짜 무서운 것은 '그들'과 '우리들'을 나눠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둘로 나눈 후 그 사이에 거울과 채찍을 놓아두기 때문이다. 용석의 처참할 정도로 이기적인 몸부림보다는 "공부 열심히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고 노숙자를 겨냥해 처음 본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려드는 흔해빠진 그의 훈계가 더 끔찍하다. 그리고 용석의 맹목적 선동보다는 그 선동에 편승해 일말의 죄책감을 감춘 채 타인을 거리낌없이 밀어내려 말을 얹는 익명의 승객 하나하나의 고함이 더 끔찍하다. 


그럴 때 노숙자 캐릭터는 편견과 배제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 이 영화는 도입부 여자화장실에서 기차 안의 첫 좀비가 모습을 드러낸 직후, 남자 화장실에 노숙자가 있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그를 (잠재적인) 좀비로 의심하게 한다. 석우의 통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된 노숙자가 대전역에서 그를 따라올 때 관객은 주인공의 행로에 방해가 되는 노숙자를 성가시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 터널 끝에서 기차 안이 다시 밝아져 좀비가 탐욕스럽게 희생자를 찾아나설 때 왼쪽 좌석 밑의 석우와 오른쪽 좌석 밑의 노숙자와 정가운데의 좀비를 하나의 프레임에 담아냄으로써, 그 순간 둘 중 누구를 살려내고 싶은지에 대한 관객의 무의식적인 바람에 회중전등을 갖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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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이런 부분들이 너무 유치할 정도로 일차원적으로, 직접적으로 박혀 있어서 더 욕먹는 거 같은데 저걸 어떤 미덕처럼 다루니까 당황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