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과 가까운 각본으로 연출됐으면 좋았겠다고 언급한건 텍스트를 그대로 옮겨야했다는 주장이 절대아니다

나도 물론 당연히 텍스트를 영상으로 그대로 옮기는게 불가능하다는 건 알지

전달하는 매체 자체도 다르고 대상도 달라... 영화관에서 페르마의 원리를 설명하거나, 언어학자들의 구체적 연구를 보여주리라고 기대도 안했고 그랬으면 정말 전문적이고 지루한 다큐가 됐을꺼임

그래서 변분원리가 설명 안된건 단지 원작의 팬으로서 아쉬웠던 것 뿐임

가장 실망스러웠던건 미래를 보는것이 어떻게 모순 없이 설명되는지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는 거다

소설에서 쓰인 비유를 가져와보자면.. 니가 경마장에서 1번말에 판돈을 걸고 10배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얻게되는 미래를 보았다고 치자

넌 그냥 청개구리 심보로 "난 돈안걸건데?" 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도 있음

그래서 돈을 안걸고 배당금을 얻지 못한다면 여기서 패러독스가 생겨버림

미래를 보았는데 바뀌어버린다면 그건 미래를 봤다고 말할수 없는 거거든

하지만 미래를 안다는게 사람의 성격을 바꿔놓는다고 생각해봐

할 일을 그대로 수행해야한다는 절박감, 의무감을 불러일으킨다고...

그래서 미래를 알게된 사람은 일어나는 일들을 그저 짜여진 연극처럼 인식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인다는게 원작의 설명임

그래서 원작에서는 주인공이 미래를 본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언급하지 않음...

그걸 발설한다는건 미래가 바뀌게될 여지를 주는거고 그건 모순을 일으키니까

소설에선 다른 체경(영화에선 쉘)을 담당하는 언어학자도 동시성을 체득했는데 주인공이 이 사람을 만났을 때에도 마치 서로 신분을 숨기는 스파이들처럼 담담하게 대화함

소설엔 없는 중국 장성과 통화하는 씬은 마치 주인공이 과거와 현재를 순차적으로 왔다갔다 하는것처럼 연출되었고 주인공은 매우 다급해보였음

근데 소설에서 헵타포드의 사고방식을 갖는건 단지 예언가가 되는게 아님

의식은 현재에 머물러 있지만 기억은 헵타포드 언어를 체득한 전 생애에 걸쳐 뻗어있다는 거지

즉 주인공은 자신이 헵타포드 언어를 배우고 나서부터 죽기까지 50년의 고정된 기억을 인식하고 그걸 그대로 수행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음

미래의 일을 과거의 기억과 동등하게 인식한다면 그렇게 다급할 이유가 없다...

소설과 영화에서 미래를 보는 방식이 다를 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영화 초반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함 "내게 시작과 끝은 의미가 없어" 그래서 이건 명백한 오류가 아닐까

소설에서는 딸이 암벽등반을 하다 실족사한다고 나오는데 미래를 막지 못한다는 절박감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했음

주인공은 딸이 어렸을 때 개구장이처럼 행동하는 것을 막으려하지만 이게 오히려 딸이 활동적인 성격이 되는 걸 부추기고 그래서 결국은 그게 딸을 죽게한다는 것도 깨닫지.. 동시적인 사고를 통해서...

영화에서 딸이 불치병에 걸려 죽는건 아무래도 패러독스에 대한 설명을 생략하면서 같이 바꾼 거같다

소설처럼 이렇게 예언가 패러독스?가 해결되는 과정을 설명하는게 페르마의 변분 원리를 설명하는 것 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려웠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음...

또한 소설 내용을 아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가 관객들이 원하는 흥행요소(외계인이 지구에 온 이유를 꼭 알아야한다던가 주인공이 영웅적인 업적을 달성한다던가 하는거)를 어거지로 끼워 넣은 게 너무 빤히보였다

영상화 최대 피해자인 앨런 무어 선생님도 생각나고 그랬음...

이상 오타쿠의 푸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