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이창동 영화에서, 가장 부족했던 것은 여유였다.
이미지들은 늘 겹겹이 짜여져 있었으며, 관객의 해석도 울타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인조적으로 설정되어왔다.
「박하사탕 (1999)」의 처음에서, 영호의 불안정함에 대한 관객의 정당한 의문을, 일단은 묵살하는 듯이 간결하게 구성된 테이크들. 또한 「밀양 (2007)」의 마지막 장면, 주제의식의 강조 - 햇빛이 비치는 땅 - 만을 위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단 그 이질적인 카메라워크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버닝 (2017)」에서는, 이창동 자신의 오랜 공백만큼이나 (이창동감독 치고는) 넓적한 여유가 엿보인다.
원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들을 반영하는 듯한 장면들이 수차레 얇게 화면에 분무되는데,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대해 능동적 해석을 할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내포한다
또한 버닝은 신세대적이다. 그 전까지의 영화에서 짙게 드리워진 나이 든 거장의 그림자는 옅어지고, 젊은 묘사들이 등장한다. 옥타곤, 택배물류허브, 씨스타의 음악. 각기 다른 속성을 가졌지만, 모두 2010년대를 살아가는 젊음들의 요소이다. 카메라 워크도 훨씬 젊어져, 마치 80살의 나이로 「악마가 너의 죽1음을 알기전에 (2007)」로 변모에 성공한 시드니 루멧을 연상시킨다. 사회에 맞추어 스스로 기민하게 변화하는것을 갈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거장은 여전히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창동 자신의 문학적 뿌리는 여전히 영화에 깊이 내려있다. 특유의 사회적 주제의식과 그것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열망. 긴 롱테이크와 몽환적인 분위기들, 몇몇 이야기적 장치(약한 주제의식의 방향성만을 띄고, 성기게 연결된 장치들. 종수의 어머니, 우물등을 통해 완화되는 긴장감)들은 그저 환기의 역할에 충실할 뿐, 그것 자체가 주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변화한 이창동이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이창동이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백수다. 문창과를 나와 소설가라는 이상을 꿈꾸지만, 썩 잘되지는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적 집을 나갔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남은것이라곤 자존심과 암송아지 한마리뿐이다. 그런 종수에게 다가오는 매력적인 여성, 해미. 가족에게서조차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하고 마는 그녀는 이 영화의 열쇠이다. 그녀 스스로가 사회구조의 하류에 속하면서, 같은 도태된 인생인 종수와 사회의 특권층인 개츠비, 벤(스티븐 연)사이에서 접착재의 역할을 하고, 이때, 잔잔했던 영화에 주제의식이라는 불똥이 튀기 시작한다.
그렇게 탄생한 이 세 사람의 조합. 마치 양성자들이 중성자가 있어야 다같이 결합할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공존은 오직 해미의 핵력에 의해서만 불완전하게 가능하다. 벤과 종수만이 존재할 때는, 그 둘은모든 면에서 대립되어 강한 진동을 내뿜는다. 이는 슬픔과 기쁨, 축구와 야구같은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충실한 삶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성향 안에서의 강한 대립, 음식안에 숨은 상반되는 이유(종수의 된장국은 필수불가결적이며, 벤의 파스타는 여유이다)그리고 소주와 와인, 담배와 대마, 포터와 포르쉐.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춤을 추며 삶의 목적을 구하는 해미를 함께 바라보지만서도, 종수는 그의 삶의 조건 때문에 늘 벤에게서 필연적인 괴리만을 직면한다. 진정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가장 큰 괴리는, 해미를 대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나타난다. 벤에게 해미는 결국 그저 한때 내리는 즐거움의 비를 위해 불타기를 기다리는 헛간일 뿐이지만, 종수에게는 비록 찌질하지만 소박한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가 사라질 때, 그 차디찬 간극이 드러난다.
그 간극을 사이에 두고, 여유가 있는 것은, 벤이다. 그는 그저 삶을 관망하며 즐길 뿐이다. 그러나 종수, 우리네 인생은 간절하고, 여유가 없다. 늘 하랄없이 뒤를 쫒기만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불에 탈것만 같은 헛간들을 미리 찾아다닌다. 전망좋은 곳에서 멀찍이 풍경을 바라보는 그를, 무릎을 꿇고 숨어서, 고개를 들어 훔처볼 뿐이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는 종수의 시각에서 이야기 되어진다. 성숙하지 못한 그는,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한 것 같아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해미의 실종, 그 오싹한 간극의 원인마저 벤의 한때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자, 상기된 눈으로 소설을 써내려 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서글픈 간극을 폭력으로써 메우고, 불태워 버린다.
영화내내 카메라를 통해 드러나는 노골적인 은유들,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은유체계로써만 작동하는 이야기. 이는 분명 이창동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여러 변화를 모색했음에도, 버닝은 역시나, 여전히 이창동이다.
이제 영화는 다시한번 이창동 자신의 물음이 되었고, 혹은 될 뿐이다. 이것에 대답하는 것이 각자의 관객의 몫일 뿐인 것처럼, 이창동의 영화가 그저 철학적 도구로만 보이게 되는 것도 나의 몫이라 말할수 있을까.
이미지들은 늘 겹겹이 짜여져 있었으며, 관객의 해석도 울타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인조적으로 설정되어왔다.
「박하사탕 (1999)」의 처음에서, 영호의 불안정함에 대한 관객의 정당한 의문을, 일단은 묵살하는 듯이 간결하게 구성된 테이크들. 또한 「밀양 (2007)」의 마지막 장면, 주제의식의 강조 - 햇빛이 비치는 땅 - 만을 위해 강압적으로 진행되었단 그 이질적인 카메라워크를 생각해보라.
그러나 「버닝 (2017)」에서는, 이창동 자신의 오랜 공백만큼이나 (이창동감독 치고는) 넓적한 여유가 엿보인다.
원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특유의 감각적인 묘사들을 반영하는 듯한 장면들이 수차레 얇게 화면에 분무되는데,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대해 능동적 해석을 할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내포한다
또한 버닝은 신세대적이다. 그 전까지의 영화에서 짙게 드리워진 나이 든 거장의 그림자는 옅어지고, 젊은 묘사들이 등장한다. 옥타곤, 택배물류허브, 씨스타의 음악. 각기 다른 속성을 가졌지만, 모두 2010년대를 살아가는 젊음들의 요소이다. 카메라 워크도 훨씬 젊어져, 마치 80살의 나이로 「악마가 너의 죽1음을 알기전에 (2007)」로 변모에 성공한 시드니 루멧을 연상시킨다. 사회에 맞추어 스스로 기민하게 변화하는것을 갈망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거장은 여전히 날카롭게 날이 서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창동 자신의 문학적 뿌리는 여전히 영화에 깊이 내려있다. 특유의 사회적 주제의식과 그것에 대한 집착과도 같은 열망. 긴 롱테이크와 몽환적인 분위기들, 몇몇 이야기적 장치(약한 주제의식의 방향성만을 띄고, 성기게 연결된 장치들. 종수의 어머니, 우물등을 통해 완화되는 긴장감)들은 그저 환기의 역할에 충실할 뿐, 그것 자체가 주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결국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변화한 이창동이 아니라, 여전히 지속되는 이창동이다.
주인공 종수(유아인)는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년백수다. 문창과를 나와 소설가라는 이상을 꿈꾸지만, 썩 잘되지는 않는다. 그의 어머니는 어릴적 집을 나갔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남은것이라곤 자존심과 암송아지 한마리뿐이다. 그런 종수에게 다가오는 매력적인 여성, 해미. 가족에게서조차 거짓말쟁이로 매도당하고 마는 그녀는 이 영화의 열쇠이다. 그녀 스스로가 사회구조의 하류에 속하면서, 같은 도태된 인생인 종수와 사회의 특권층인 개츠비, 벤(스티븐 연)사이에서 접착재의 역할을 하고, 이때, 잔잔했던 영화에 주제의식이라는 불똥이 튀기 시작한다.
그렇게 탄생한 이 세 사람의 조합. 마치 양성자들이 중성자가 있어야 다같이 결합할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공존은 오직 해미의 핵력에 의해서만 불완전하게 가능하다. 벤과 종수만이 존재할 때는, 그 둘은모든 면에서 대립되어 강한 진동을 내뿜는다. 이는 슬픔과 기쁨, 축구와 야구같은 단순한 차이가 아니다. 충실한 삶보다는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성향 안에서의 강한 대립, 음식안에 숨은 상반되는 이유(종수의 된장국은 필수불가결적이며, 벤의 파스타는 여유이다)그리고 소주와 와인, 담배와 대마, 포터와 포르쉐.
아름다운 노을을 배경으로, 춤을 추며 삶의 목적을 구하는 해미를 함께 바라보지만서도, 종수는 그의 삶의 조건 때문에 늘 벤에게서 필연적인 괴리만을 직면한다. 진정한 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것이다.
가장 큰 괴리는, 해미를 대하는 그들의 시선에서 나타난다. 벤에게 해미는 결국 그저 한때 내리는 즐거움의 비를 위해 불타기를 기다리는 헛간일 뿐이지만, 종수에게는 비록 찌질하지만 소박한 사랑의 대상이다. 그녀가 사라질 때, 그 차디찬 간극이 드러난다.
그 간극을 사이에 두고, 여유가 있는 것은, 벤이다. 그는 그저 삶을 관망하며 즐길 뿐이다. 그러나 종수, 우리네 인생은 간절하고, 여유가 없다. 늘 하랄없이 뒤를 쫒기만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불에 탈것만 같은 헛간들을 미리 찾아다닌다. 전망좋은 곳에서 멀찍이 풍경을 바라보는 그를, 무릎을 꿇고 숨어서, 고개를 들어 훔처볼 뿐이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는 종수의 시각에서 이야기 되어진다. 성숙하지 못한 그는, 아직 세상을 알지 못한 것 같아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해미의 실종, 그 오싹한 간극의 원인마저 벤의 한때의 즐거움이라는 것을 깨닫자, 상기된 눈으로 소설을 써내려 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 서글픈 간극을 폭력으로써 메우고, 불태워 버린다.
영화내내 카메라를 통해 드러나는 노골적인 은유들,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은유체계로써만 작동하는 이야기. 이는 분명 이창동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의심할 나위가 없다. 여러 변화를 모색했음에도, 버닝은 역시나, 여전히 이창동이다.
이제 영화는 다시한번 이창동 자신의 물음이 되었고, 혹은 될 뿐이다. 이것에 대답하는 것이 각자의 관객의 몫일 뿐인 것처럼, 이창동의 영화가 그저 철학적 도구로만 보이게 되는 것도 나의 몫이라 말할수 있을까.
오 ㅊㅊ 궁금하다
니가쓴거?
일단 ㅊㅊ
누갤에도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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