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가정이 맞다면, 현실은 예술에 담길 수 있을 만큼 대상으로서 명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대상이 경험적, 주관적으로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문학은 원칙적으로 불안정한 것이다. 불안정한 대상에 대한 범주화를 시도하는 것은 감성 구조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논리 구조로는 가능하지 않다"
조연호의 악기(惡記)를 읽다 말다 하고 있다.
서예를 좀 볼 줄 알게 되면 글씨만이 아니라 여백도 보인다고 한다.
조연호의 연옥 같은 글의 묘지는 움직임—숲을 흔들려는 정치적 움직임—을 외면함으로써 부끄러움을 간직한다.
그는 얼마나 수줍은 사람일까.
만약 고치가 찢어진다면, 그러니까 변신을 저지당한다면 얼마나 화를 낼까.
그의 글속에서 찾을 수 없는 붉은 화를 생각하면 살 것 같다.
안성기의 얼굴에서는 욕망과 부끄러움이 충돌하곤 했다.
당시 남자 배우들의 얼굴에서 으레 일어나는 현상이었지만 유독 안성기의 얼굴에서 부끄러움이 심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부끄러움은, 당신은 누구 편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어져 왔다.
여성이 대개 온전한 피해자로서 말 아래로 가라앉아 식민화돼 왔다면
남성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행해야 하는 모순을 감당해야 했고 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마주했을 때 뻔뻔하지 못할 것이면 부끄러워해야 했다.
안성기의 얼굴은 뻔뻔해지기엔 너무 긴 후회의 시간을 담고 있었으므로
전성기 그의 극단적 페르소나는 질문을 이해할 수 없거나 아예 받을 일이 없는 백치들이었다.
민주 정부와 경제 호황기의 90년대 남성은 훨씬 덜 부끄러웠던 것 같다.
한석규처럼 해롭지 않은 자신감과 쾌활함의 여유가 있었고, 주류 사회에 막 진입한 여성도 마치 사춘기 청소년처럼 개성이라는 미의 기준을 스스로 세우려고 했다.
정체 또는 퇴보가 지속된 2000년대에는 그것을 돌파할 날카롭고 뻔뻔한 얼굴이 필요했고, 그 얼굴의 장르화가 스릴러다.
물론, 스릴러 같은 장르물을 만들 수 있을 만큼 할리우드 키드가 늘어났고 영화 산업이 고도화된 점도 있겠지만 그 스릴러 유행의 초입에 당신은 누구며 어디 있는지를 묻는 영화, 살인의 추억이 있다는 것이 의미심장해 보인다.
범인은 누구인가? 다시 말해서, 나를 부끄럽게 만든 그는 누구인가.
살인의 추억에서는 이 질문이 송강호라는 얼굴에 막힌면서 반사된다.
책임 전가는 유예된다.
일일이 떠올릴 수는 없지만 26년 후, 국제시장, 명량, 변호인 등 흔히 우리가 신파라고 부르는 퇴행적 슬픔과 집단주의적 승리가 결합한 '억울민중서사'가 최근 수년 간 주류 영화계의 경향인 것 같다. 어쩌면 영화 내적으로는 별 상관 없겠지만 영화 바깥의 양상으로만 보면 디워를 이 대열의 선두에 세워도 될 것 같다.
우리는 사회적 위기를 인식하고 있으며 극복 역시 (적어도 결과만큼은)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데까지 이르렀다.
당연히 이 시리즈의 정점은 1987이다. 스릴러를 거쳐 오며 책임 전가 영웅으로 벼려진 남성 페르소나들의 뻔뻔한 연기, 유려한 호흡과 몽타주가 한 방향을 향해 '우리는 피해자며 동시에 승리자' 라고 합창하는 감/선동적인 작품이다.
딴소리로 들머리를 열었지만 이것은 버닝에 관한 이야기다.
종수가 알몸으로 트럭을 타고 이쪽으로 올 때
그 차는 억울한 민중들의 사회에 닿을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내가 벤을 죽였소'가 '내가 시저를 찔러 죽였소';'내가 박정희를 쏴 죽였소';'내가 안두희를 때려 죽였소' 등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처럼 정치화된 시인이 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종수의 트럭이 미스트나 은판 위의 여인(미개봉작)에서처럼 멈출 것임을 알고 있다.
만약 그 트럭이 계속 간다면, 우선 카메라가 앞에서 찍지도 않았을 테지만, 종수는 연쇄 살인마가 된다는 에필로그가 붙어야 한다.
(그것이 나쁜 남자의 트럭이 전진할 수 있게 하는 처참한 동력이다)
민중에 닿지 못함에도 종수의 알몸은 마치 로댕의 모델처럼 관객 각각의 구렁에 처박힌 채 기어를 넣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불명확한 안개 속에 있다는 말은 종수가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행하지 못한 채 말 못할 부끄러움 속에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다.
종수는 연기로부터 태어난다.
종수에겐 자신을 설명하거나 세계를 해석할 언어가 없다. 그는 배달부 또는 망한 농장 아들에서 소설가로 이행하는 중이다.
이에 반해 스스로를 해미라고 일컫는 해미는 딴판으로 행동한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탈바꿈한 사실을 스스럼없이 말하고 나레이터를 하면서 몸 쓰는 일이 좋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해미는 장률 영화 경주의 공윤희(신민아)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여자는 남자의 언어/거처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해미와 접촉하는 것이 종수의 가장 리얼한 삶이다.
하지만 버닝은 몇 가지 원형이 더 얽힌 복잡한 영화다.
공윤희가 나그네를 무덤가에 재웠다면 해미의 리얼한 몸은 비어 있는 곳을 가리킨다.
비어 있음을 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해미의 말은 해미가 건넨 추첨 번호처럼 마법 같다.
몸을 써서 먹고사는 일과 팬터마임 배우기와 해외 여행이 어떻게 동렬에 놓일 수 있나.
어떻게 바라는 것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눈앞에 있으며 그에 이르는 과정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종수는 해미의 리얼한 몸을 통해 빈집의 보일이를 본다.
빈집에서 종수가 자위하는 장면은 환상을 배태하는 부재와 당장의 부재 속에 남겨진 몸뚱이의 극명한 대비다.
(영화 밖에서 유아인은 비슷한 행동을 했다. 다만 그는 남산타워에서 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녀가 사랑했는데, 여자가 떠나자 남자는 여자의 빈 자리를 품어 진주로 바꾼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원형이다.
하지만 해미가 돌연 벤과 함께 나타나고부터 영화는 복잡하게 뒤틀린다.
그러니까 두 사람 사이에 끼여든 얼굴은 세계의 질서, 구조적 악몽이다.
이를 린치는 인랜드 엠파이어에서 그의 오랜 페르소나 자브리스키의 동유럽 억양으로 요약한 바 있다.
"한 소녀가 놀러 나갔다가 시장에서 길을 잃었다, 칠푼이처럼......"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것은 엄존하는 우주 질서의 한 단면이지만 종수처럼 한껏 쪼그라든 남성의 머릿속에서 한없이 증식하는 인랜드 엠파이어이기도 하다.
벤은 살인자인가, 벤의 집을 탈출했던 고양이가 보일인가, 해미는 어디로 사라졌나, 우물은 거기에 있었나 따위 물음들에 아무도 분명히 답할 수 없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답들이 종수에게 악몽으로, 현실 세계의 그림자로 이미 드리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분명해 보였던 언어의 실체(라고 말할 수 있)다.
1987에서 연희가 버스에 올라서며 세계를 한몸으로 묶는 크레인아웃이 하나의 적에 맞서 모두가 피해자로 편입된 승리 충만한 절대적 언어라면 해미의 빈집에서 마침내 글을 쓰기 시작한 종수로부터 세계로 빠지는 줌아웃은 언어 너머에 지옥이 있어, 존재는 벼랑 끝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다.
방안에 틀어박혀 있던 라스콜리니코프는 결국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한다. 그의 구원은 소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종수에겐 이 수순이 뒤바뀌어 있다. 해미가 사라졌기 때문에 벤을 살해한 것이고 그 죄과에 대한 구원은 없다.
그에게 남은 것은 몸뚱이와 기름뿐이다.
그리고 무엇이 보이나.
연기가 피어오른다.
나의 사랑 나의 바퀴 아직 고랑에 처박혀 있다.
나도썅년이되고싶다
퍄 - dc App
잘 읽었슴다 ㄱㅅㄱ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