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이 아냐. 여운을 즐기고 싶어.
그런데 극장이 멀어서 어쩔 수 없다.
어느 가족과 킬링 디어를 연달아 봤고
예상대로 기분을 잡쳤다.
하나 그리고 둘과 킬링 디어를 연달아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영화를 보면서 전자는 오즈와 나루세에, 후자는 큐브릭에 각각 비교해 따로 말하면 될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니 그냥 둘을 묶어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잡쳤다는 말을 풀어 써야겠다.
어느 가족은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킬링 디어를 보고 나니 애초에 감동이라는 게 무엇이었는지 그 감관이 마비된 느낌이다.
드뷔시의 빛을 받다가 스트라빈스키에게 쿵쾅쿵쾅을 당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잡쳤다는 말은 잊었다는 말 근처에 있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 정성일과 허문영이 그랬던 것 같은데 오즈 영화에서 아버지가 딸을 시집 보내는 것을 우주의 섭리로 보는 해석이 있다.
아버지는 딸을 곁에 두고 싶어도 계절이 바뀌듯 딸은 시집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오즈에 대한 글을 쓰거나 읽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염두에 둔, 그래서 지금은 다소 싱거운 얘기겠지만 宇宙는 집이라는 뜻이다.
오즈 비평에서 우주가 집을 가리키는 중의적 낱말이라면 역시 싱거운 표정으로 동의할 수 있다.
그 표정 뒤에서 꼬집고 싶은 것은 우주가 집과 집밖의 모든 세계를 한꺼번에 일컫는다면 오즈가 집에 들러붙어 있는 이유는 여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꽁치의 맛에서—
아버지가 옛 군대 동료와 함께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군함행진곡을 듣고 경례 놀이를 한다.
젊은 마담은 그런 남자들의 기분을 맞춰 주며 같이 경례하는 시늉을 한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가서 장남에게 술집에 죽은 아내, 아들의 어머니를 닮은 여자가 있다고 말한다.
너무 가까이는 아니고 어느 정도 거리에서 보면 비슷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 대목이 오즈의 미학을 프로이트-하스미 식으로 이/오해되곤 하는 항아리 숏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두 전직 군인과 전란의 아수라 사이에 행진곡은 울린다.
그들이 행진곡에 맞춰 아기자기한 경례 놀음을 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인가.
딸이 늙기 전에 시집 보낼 수 있다. (=술집에서 남의 딸을 시중 들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마치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나왔던 검은 옷 남자나 하하하의 거지처럼, 딸을 시집 보내지 못한 노선생은 꽁치의 맛의 유령이다.
오즈가 집과 형식에 주술적이라고 느낄 만큼 집착했던 것은 안정(된 규칙성)으로부터 나가떨어졌을 때 어떠한 사회 안전망도 없이 곧장 전쟁의 아수라로 휘말려버릴 수 있는 '차가운 우주'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우주의 냉혹한 섭리를 방어하지 못하면 여자의 몸이 가장 먼저 상하기 때문에 딸을 시집 보내는 것, 다시 말해서 아직 우주의 압력을 상대로 버틸 만큼 충분한 동력이 있는 다른 안정 체계로 여자를 인계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집을 일본의 분재나 정원처럼 우주의 축소판으로 해석하는 관점으로 보면, 집안에서 노인 류 치슈가 창밖을 향해 앉아 있는 동경 이야기의 마지막 씬은 그냥 집과 자연의 동어 반복이며 순응의 도다. 항아리 숏의 긴장감은 해소됐다. 하지만 집(과 양식)을 혼돈 속에서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한 인간적 저항의 산물로 보면, 자신의 아내를 끝까지 지켜냈(다가 결국 빼앗겼)으며 딸을 피신시키는 임무를 완수하고 동력이 다한 노인은, 느릿느릿 그러나 침착하게 엄습해 오는 우주를 홀로 맞이해
아직 버티고 있다.
나루세의 팔짱
이렇게 간단히 반문할 수 있겠다.
거기도 삶은 있는 것 아닌가?
술집 여자라고 좌절할 것 없어. 기운 내서 차곡차곡 돈을 벌자.
남자가 '정상적 가부장'의 지위를 획득하지 못하고 미끄러진 뒤 사로잡히는 우울증을
나루세의 페르소나 다카미네 히데코는 착실하게 이겨내고 취해 있는 남자까지 일으켜 세운다.
노부요 시바타 가족도 그와 비슷한 역사가 있었을 것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거기에 모계의 유산을 상속시킨다.
경제 성장기 일본 사회가 장려/보장하는 가부장제 하에서 연약한 여자를 인계했던 오즈의 부계에 비해 훨씬 위태한 사각지대에서 못난 남자를 달래서 가야 하는 고레에다의 모계는 가끔 표독스러운 야수성을 드러낸다.
집구석이라는 말도 아까운 아수라장에서 이뤄지는 가족들의 식사 장면은 정상 가족 외곽의 혼돈에 까치발 디딘 채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태연함, 또는 의연함을 한 프레임에 붙잡는다. 집을 강박적으로 청소하지 않듯이 일반적인 규범들이 해체돼 있기 때문에 이들은 더욱 임기응변과 감각에 의존해야 한다.
아이가 안돼 보이니 그 자리에서 유괴를 결정한다.
재밌는 점은 노부요가 아이를 안고 주저앉을 때 두려움과 저항으로 보여야 했을 안도 사쿠라의 얼굴에 어떤 게으름까지 비쳤다는 것이다.
'돌려주기 귀찮데스네'
이때 이 게으름이라는 것은 눈앞에 닥친 일을 하기 싫다는 게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앞의 나태다.
이를테면, 학생들 대부분은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숙제를 하지만 모든 학생이 구닥다리 사회가 규격화한 '꿈'을 목표로 학교를 경유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굴레를 거부할 힘이 없기 때문에 순응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숙제 또는 시험 공부 등이 당장 통제할 수 있는 눈앞에 닥친 일인지 그럴 수 없는 숙명인지를 구분하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시험 공부를 나태 외에는 대응 방도가 없는 운명의 숲에 편입시켰을 것이다. 어떤 아이의 운명은 숙제까지 삼켰다.
노부요와 그 식솔들에게 집안 청소는 일사불란한 집행 항목이 아니다. 집구석은 길거리의 혼돈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울타리 안에서 통제 받기 싫어서 길거리로 나왔고
쥬리를 린 시바타로 울타리 밖에 붙잡아 둘 때 노부요의 얼굴에 비쳤던 불가항력은 하츠에가 노부요와 아키를 포섭한 운명의 성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유괴-입양은 모계 상속의 정식이었던 것이다.
나루세에겐 아직 오지 않았거나 슬픔으로 정화할 수 있었고, 오즈는 정반대의 힘으로 막아 변증법적 지대에서 모호하게 버텨 왔던 운명이 고레에다 영화 속에서는 태연하게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책임질 수 없어 외곽으로 밀려난 이름 없는 자만이 결국 책임을 졌고, 그 책임의 내용은 책임질 수 없음이었다.
얼마 전 영국 해리 왕자와 배우 메간 마클의 결혼식에서 마클은 아버지로부터 신랑에게 배달되는 형식을 따르는 대신 스스로 걸어들어가 시아버지를 거쳐 신랑에게로 갔는데 이는 복종 선언을 하지 않은 것만큼이나 분명하게 여성 지위 향상을 보여준다.
전부터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를 보면 죽은 생선을 만지는 것 같았는데 이번엔 정말 죽은 생선을 다듬는 장면이 나온다.
큐브릭이 카프카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영화가 나올까.
아닐 것 같다.
불길한 줌인&아웃이나 트래킹 같은 촬영과 리게티 곡 사용은 비슷하지만 란티모스의 게임이 훨씬 부당하고, 부당해서 뻔한 게임이므로 싱겁다.
죽은 생선은 거의 형용 모순에 근접한 말이다.
生鮮, 갓 잡아 올렸다는 사실이 생사 여부에 우선하는 이유는 콜드 체인과 냉장고가 없던 시절, 몸의 쓸모가 미물에 붙은 생명의존엄 따위보다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란티모스는 쓸모의 정체를 탐구하거나 쓸모 없음을 찬미하지 않는다. 대신
'신선할 때 마시지 않으면 오렌지 주스는 아무 소용 없소'
파리대왕의 아이들이 만들어낸 것 같은 쓸모를 위해 인간을 해체한다.
이것을 강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표현은 강박적이지 않다.
린치와 비교하면,
멀홀랜드 드라이브에서 커피를 토하는 것은 커피 맛을 아는 사람의 강박이다.
트윈 픽스에서 네이딘이 무소음 커튼 걸이를 고집하는 이유는 절대적 침묵과 관련돼 있다.
린치 영화에서 발견되는 것, 강박적으로 추구되는 것은 신비 또는 비의와 통한다.
하지만 란티모스의 아이들은 커피나 오렌지 주스가 무슨 맛인지 모른다.
아빠가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런 구색을 갖춰야 한다.
그건 그냥 그렇게 하는 거다.
평론가들이 배우들의 말투가 인형 같다고 지적할 때, 그건 말투만 그렇게 설정됐거나 무슨 브레송의 연기 연출 전통을 잇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얄팍한 인간들을 연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도와 음악이 불길한 영화 초반, 동료와 대화하고 가족과 식사하고 농담하고 웃는 그들의 특별함을 딱히 집어낼 수 없는 것도 평범하기(banal)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계를 선물하는 것이 시간/삶을 넘기는 의례라는 김혜리의 감상에 공감할 수 없다. 만약 이게 홍상수나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시적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의 영화 같았으면 김혜리 외 평론가들의 의견도 그럴 법했을 것이다. 시계를 선물하는 것에 그런 의미가 있다면 방수 한계 수심과 가죽&쇠붙이 취향과 매튜의 똑같은 시계는 무슨 뜻인가? 간단히 말해서 별 뜻 없다. 손목시계는 남성의 가장 보편적이고 거의 유일한 액세서리다. 스티븐과 매튜는 방금 개복 수술을 끝내고 서로의 몸에 붙어 있는 액세서리 이야기를 한다. 스티븐 말대로 그들은 지루하다. 스티븐이 마틴에게 선물한 시계는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은 데 대한 보상이다. 그것도 그 비극의 무게에 걸맞는 성의를 들여 마련한 게 아니라 좀 전 매튜와 나눴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로부터 자기 취향을 더해 조립해 낸 것이다. 선물이라는 형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형식을 흉내냈을 뿐이다. 그들은 삶의 신비에 접속돼 있지 않으며 타자의 비의에 무심하다.
거기엔 (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
물론, 이게 문제는 아니다. 란티모스의 영화가 어딘가 감동적이라면 그것은 텅 빈 형식에 인간을 억지로 구겨넣었을 때 몸에서 나는 소리가 어떤 원초적인 울음이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의 문제는 먹잇감이 가족이라는 데 있다. 이런 결과라면 가족일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 란티모스 영화의 인물들을 싸잡아 '그들'이라고 칭한 것은 그들이 모두 근시안적이인 어린아이로 기본 설정돼 있어서다. 저주는 마틴이 내렸지만 마틴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저주 내린 자와 저주 받는 자들은 똑같이 이 설정 안에 있는 '아이들'이다. 이를 고려했을 때 어떤 해법도 없는 저주 앞에서 머피 가족의 몸은 어떻게 반응했나?
부모가 울었다.
여느 부모가 보일 법한 반응이다.
역시나 아이들은 별 문제 없다. 그들은 싸이코패스처럼 군다. 하지만 부모들의 설정은 일관적이지 못하고 갈팡질팡이다. 딱딱한 묘사가 선행되긴 했어도 아들이 쓰러진 후 그들은 자식을 걱정하는 보통 부모처럼 행동한다.
저주가 고지되고 난 후 내가 기대한 것은 스티븐이 결국 애나를 죽이려 할 때 두 사람 각각의 맘속에서, 또 둘 사이에서 끓어오를 갈등이었다. 자식을 품에 안아본 적 있는 아버지가 어떻게 멀쩡한 아이를 제 손으로 죽인단 말인가. 당연히 이 말못할 게임의 제물은 어머니 애나다. 그래야만 가족이라는 원초적 단위의 취약성을 성공적으로 공격한 셈이 될 것이다. 애나는 안과 의사고 스티븐에 비해 불평등한 지위는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저주가 스티븐에게 칼을 쥐어 주었으므로 이 현대적인 중산층 가족은 가부장제 가족의 문제로 회귀해야 한다. 그러나 영화는 가족을 깨부수는 데 엉성하고 어설프다. 자식들이 서로 살아남으려고 경쟁하는 모습을 보고 남 몰래 눈물 흘리는 아버지가 학교에 가서 누가 나은지 묻는다고? 뱀처럼 기어다니는 딸을 데리고, 마치 예수 같은 흑마법사의 발에 입 맞추는 어머니가 아이들 대신 살아남기 위해 최소 15년 이상 같이 산 배우자에게 성 로비를 한다고? 부부 관계에 대해 뭘 알기라도 하고 이런 각본을 쓴 걸까. 이런 부성과 모성은 전형적인 부모와 그들이 이룬 가족을 대표하지도 못하고, 란티모스의 근시안적인 아이가 집착하는 텅 빈 형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제 사람들이 흔히 거론하는 샤이닝—스페이스 오디세이, 아이즈 와이드 셧도 견줘 말할 수 있다—을 비교해 봐야겠다.
샤이닝은 가부장제 가족의 가장 끔찍한 가능성을 폐쇄된 공간에 저주로 걸어놓고, 어떤 무한한 신비를 통해 그것을 예고함으로써 가족이라는 위기의 단위를 두고 도박을 한다. 여기서 드러난 가족의 모순은 가족을 지켜야 할 아버지가 오히려 가족을 해친다는 것이다. 아메리칸 스나이퍼 마지막 장면에 짓궂은 장난으로 처리됐던 '가족에게 총을 들이대는 아버지'의 불안한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아버지가 가족을 보호하는 데 과몰입했기 때문에 돌발적으로 실현될 공포스러운 확률에까지 이른 것이다.
스티븐은 가족과 그 외부 사이에서 폭력을 수행하는, 그래서 언제든지 총을 쥔 채 뒤돌아설 가능성을 품은 모순적 아버지가 아닌 그저 정체가 모호한 4인 집단의 소심한 일원으로서 사형 집행을 뺑뺑이 돌린다.
마땅히 희생양으로 지목됐어야 할 애나는 작가가 저지른 태만(neglect)의 부작용으로 인한 페미니즘의 수혜를 누리게 됐다. 머피 가족은 가족이랄 수도 없고, 애나는 어쩔 수 없이 여성이 당해야 하는 희생의 굴레에서 벗어나 평등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똑같은 몫을 길트 셰어로 배당 받았다. 케찹 잔뜩 뿌린 감자 튀김을 즐긴 것은 킴이었지만 당장의 제 몸뚱이를 보전하는 것이 세상의 불가사의에 우선하는 근시안적 삶의 쾌락은 애나의 몫이다.
큐브릭이라면 그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사족인데, 최근 몰리 파커, 니브 캠벨 같은 90년대 말-2000년대 초 전성기를 누렸던 여자 배우들이 하나 둘 얼굴 내미는 분위기라 반갑다. 클루리스가 95년작인데 알리시아 실버스톤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그 동안 피부만 탄 것 같다.
안도 사쿠라는 나무 위키 보니까 남편 성 따른다고 돼 있던데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다. 송강호에 비견할 만한 리얼한 일본 배우다.
잼네요 뒷부분이 잘 읽었슴다
잘 읽었음. 뻥 뚤린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