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에


 뉴욕라이브러리에서 광고에서 눈에 띄는 점.

 홍보지, 예고편 모두에서 리처드 도킨스는 호흡의 정점에 배치돼 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영화는 도킨스를 대변하려고 만든 영화가 전혀 아니다.

 랍스터칩은 이름에라도 바닷가재가 들어 있지만 이 영화는 이름은커녕, 강연 부분에서 도킨스가 재닛 잭슨으로 바뀌어도 아무 상관 없다.

 수입사 측에선 그게 문제인 것 같다.

 도서관도 지루하고 다큐도 지루한데 도서관을 찍은 3시간짜리 다큐라니.

 그러니까 애초에 이 영화에 관심을 가질 법한 부류를 겨눠 홍보를 기획한 모양이다.

 어쩌면 그 부류가 도킨스를 '스테디 셀러이자 서울대학교 추천 도서인 이기적 유전자를 썼고 온라인 종교 조롱 밈들의 원작자인 세계적 석학, 무신론의 체 게바라' 정도로 여기는 젊은이들이 아닐까.

 조언하건대, 도킨스가 종교와 종교인들 조롱하고 나무라는 거 보고 싶으면 TED나 여타 대학 강의를 검색해 보길 바란다.

 아니지.

 그게 아니다. 도킨스가 무슨 말을 하건 그를 영접하고 싶은 것은 예수 옷깃을 만지는 혈루병 환자의 마음 같은 것이다. 그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한 단계 나아진 것처럼 뿌듯하고 내 지식이 늘어난 것마냥 든든하다. 모세가 홍해 가르는 기적을 확인하려고 극장에 가는 기독교인처럼.

 리처드 도킨스나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공격적 무신론자 운동을 주도하면서 그에 대한 비판이 진화심리학 내부에서 쏟아졌다는 것은 아마 그 부류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중 가장 통렬한 비판은, 그 운동이 정확히 도킨스가 비판하는 근본주의 조직 종교의 내/외집단 구분 기준 강화 양상과 똑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이쪽 분야의 큰 어르신이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드 윌슨이 폐기된 지 오래된 집단 선택 가설을 부활시키며 '이기적 유전자'를 비판했다. 도킨스의 팬이며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의 입장은 뭔지 좀 궁금해진다. 촘스키도 공격적 무신론자들이 광신적인 세속주의 종교인들이라고 비판한 적 있다. 이 사이에 끼인 스티븐 핑커의 입장도 재밌는데......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라... 요컨대, 도킨스는 세상을 유/무신론자로 나눈 뒤에도 무신론자들로부터 전적으로 지지 받는 처지는 아니다.



 퍼스트맨.

 어쩐지 젊은 나이에 너무 끝내주게 잘 만든다 했다.

 드디어 나무에서 떨어지는 꼴을 보니 반갑다.

 물론 성층권 진입도 못 하고 곤두박질쳤다고 조롱하기엔 특별한 단점없이 그런 대로 선방한 편이다.

 음악 영화가 아니라서 그럴까.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 이유는 아니다.

 인터스텔라와 비교하면 퍼스트맨은 시종일관 노잼이다. 왜 그럴까?

 라라랜드에서 두 남녀는 왜 헤어졌을까?

 이 질문에 답이 있을 것 같다.

 인터스텔라에서 아버지 쿠퍼가 수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위기를 겪을 때 지구에서 머피도 난관을 만나고 마법 같은 출구도 동시에 발견한다.

 이 장면들은 기하학적인 비율의 편집으로 연결된다.

 퍼스트맨에서 닐 암스트롱이 위기를 겪을 때 평행으로 제시됐던 부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나.

 그냥 라디오 들고 어쩔 줄 몰라한 게 다다.

 리듬이 전혀 다른 두 장면을 왜 교차 편집으로 배열했을까.

 두 장면은 마술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퍼스트맨에서 마술은 오직 라이언 고슬링의 침묵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며 그건 배트맨 포에버가 짐 캐리에게 정신없는 마스크 연기를 다시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이 나온 김에 칭찬하자면, 라이언 고슬링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안정된 남성 페르소나다. 그의 성적 매력도 상당 부분 안정성에서 기인한다. 복잡한 질문도 그의 과묵한 얼굴에서는 간단히 답변된다. 간단히 말하여질 수 없는 것은 비밀이 된다. 고슬링은 당대 최고 엘리트인 우주비행사일 때는 물론이고, 하층 노동자 계급, 심지어 강도일 때도 날라리 놈팡이로 전락하기 어려운 성실한 얼굴이다. 실패작인 블레이드 러너2049 역시 기묘하게도 타르코프스키 영화 같은 분위기를 풍긴 것은 물, 거대한 건물 벽에 부딪히는 소리, 롱숏, 그리고 고슬링의 침묵이 만든 효과였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취하는 태도는 이런 것이다.

 지금은 일부 음모론자들을 제외하곤 모두에게 그저 역사적 사건이 된 인간 달 착륙이라는 당대의 정치적 사건을, 라이언 고슬링의 침묵이 굳게 지키고 있는 개인적 또는 가정적 비밀 수준으로 축소해 이야기한다.

 시종 핸드헬드 클로스업으로 진행되는 이야기가,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재밌는 부분이었던 '내가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동안 백인은 달에' 간다고 비판하는 시(slam)나 보네거트 같은 지식인, 불신이 팽만했을 의회와 충돌하지 않고 흘려버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정치적 반응이라곤 TV에서 본 소련의 추가 득점에 역정을 내는 장면 정도인데, 이는 할리우드가 소련을 나치 독일과 함께 거의 어떤 죄든 다 뒤집어 씌울 수 있는 만악의 축으로 취급하고 있는 관습 때문에 더 이상 정치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뻔하기도 한 데다가, 그 역정이라는 게 복잡한 사태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코앞에서 자신보다 더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는 연주자에 대한 불같은 경쟁심처럼 보인다.

 나와 너, 2인칭의 거리 안에서는 놀랍도록 밀도 있는 긴장감을 만들어 내던 셔젤은 단순히 인물 간의 거리만 멀어져도 그 사이를 잇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LA에서 피아노를 치는 세바스찬과 유럽에서 영화를 찍는 미아가 헤어져야 했던 이유는 그 두 장면을 관련짓기 힘들다는 셔젤의 판단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게 딱히 역량 부족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각본과 감독이 잘못 만난 경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수억 광년 떨어진 두 사람이 같은 리듬으로 위기를 겪고 극복한다는 놀란의 야심이 오히려 너무 터무니없이 크다고 할 수도 있다.

 셔젤의 이 맹점을 직시하려면 관객들을 얼빠지게 만드는 작가주의 영화가 될 것이다. 가령, 닐이 육중한 로켓 선체를 온몸으로 느끼며 죽음의 공포를 체험할 동안 교차 편집으로 재닛은 남편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 비서 자격 시험용으로 타자기를 연습하거나 미리 동네를 돌면서 괜찮은 남자를 물색할 수도 있다. 왜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어야 하나. 셔젤은 자신이 모르거나 믿지 않는 영화를 만들었고 관객들에게도 통하지 않았다. 셔젤이 권하는 4DX나 아이맥스 나부랭이 스펙타클은 이런 결핍을 그나마 좀 가릴 수 있는 돈지랄일 것이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

 택시 드라이버와 비슷한 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남자가 성매매 조직에 있는 미성년자를 구출한다는 플롯 정도다. 조는 트라우마 백화점이다. 트래비스의 트라우마는 그의 파행과 강박, 반복되는 곡조, 말 그대로 약 빤 스콜세시가 찍은 멍한 숏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지만 조의 트라우마는 조각난 플래시백으로 직접 제시되는데, 그 직접성과 증상의 심각성 때문에 나중엔 그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의문시된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자기 현존감에 대한 영화로 봐도 될 것 같은데, 이렇게 본다면 소더버그의 헤이와이어나 자무시의 몇 작품과 비슷해 보인다.

 나아가서 박약한 현존감을 미디어의 절망적인 폭력 이미지들이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할 여지도 남기는 것 같다.

 적어도 세 가지 다른 시공간의 기억이 제시된다.

 1. 어린 시절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로부터 어머니가 폭행당하는데 개입할 수 없어서 무력하다.

 2. 서아시아나 아프리카로 짐작되는 곳으로 파병돼 철조망 너머 여자아이에게 초코바를 줬는데 남자아이가 총을 쏴 여자아이를 죽인 뒤 빼앗는다.

 3. 동아시아인들이 어떤 이유에선지 밀입국 하려다 집단 사망한다.

 미디어의 폭력 이미지 얘기로 나아가기엔 영화가 주는 단서가 거의 없으므로 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다 겪었다고 치자. 어린 시절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향으로부터 가능한 한 먼 곳으로 파병 자원 -> 전쟁터에서 뭘 바라나. 당연히 지옥 목격 -> 고향으로 돌아와 군 경력을 살려 경비 업체 근무. 암시장에 인력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일이 잘못돼 다수 사망한 것을 적발 -> 무력감도 잊을 겸 쌓인 응어리도 풀 겸 해결사로 전직.

 시동이 느린 코믹스 자경 영웅 탄생기 같다. 와치맨에 한 자리 봐 놓을 수 있을 만큼 몸과 마음 모두 상처투성이 일그러진 영웅이다. 어머니와 관계도 위태해 보인다. 자식은 아버지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한 어머니를 마냥 동정하지만은 않는다. 강자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약자에 공감해 같이 무력한 처지가 되기보단 약자를 처리해버림으로써 강자에 편입되려는 본능이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압도하기도 한다. 조의 경우엔 어머니가 하네케 피아니스트에서처럼 자식을 어린애 취급하며 삶을 장악하려 할 만큼 성가시진 않다는 점이 어머니를 '처리'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그 충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서 조는 어머니가 난리를 치고 있는 화장실 앞에서 싸이코 샤워 살인을 흉내낸다. 이후 어머니가 살해됐을 때 조는 더욱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없앨 수도 없으면서 지킬 수도 없었다. 어머니를 살해한 이와 바닥에 누워 손을 잡고 같이 노래를 부른 장면을 들어 조가 무의식적으로 바라는 바를 이뤘다고 해석하기엔 어머니는 어떤 안정을 주는 것처럼 보인다. 질식하는 중에 읊는 카운트다운이 조각조각 파편화된 내면을 다스리는 죽음의 주문이라면 어머니가 부르는 ABC 노래는 흐트러진 것을 하나하나 정돈하는 삶의 주문이다. 다만 조에겐 죽음의 주문이 더 익숙하다. 보통 이런 사람이 도박에 쉽게 빠지는데, 조는 카지노에 가는 대신 자기 목숨을 담보한 도박을 하는 것이다.



 양의 나무.

 정성일은 과도하게 (상징 질서를 수호하는) 직역에 집착해서 러시아 방주를 러시아의 방주라고 하던데, 한국어에선 이 '의' 용법이 불안정하고 한 문장에 두 번 이상 쓰이면 자연스러움을 해칠 수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어에선 '의'를 잘 쓰지 않았고 그냥 붙여 쓰면 뜻이 통하니 '의'를 빼고 쓰는 게 더 낫다. 가령, 한국 사람, 미국 제품이라고 하지, 한국의 사람, 미국의 제품이라고 하지 않는다. 체언 사이에 '의'를 써서 수식하는 것은 전형적인 일본식 어법이다. 그냥 양나무 또는 양 나무라고 하면 된다. 일본식이라고 다 미워하고 배척할 것은 없지만 굳이 부자연스러운데 양의 나무, 진격의 거인이라고 할 이유 없다.

 나는 요시다 다이하치가 한정 없는 세계와 길 잃은 인간을 다루는 태도가 여전히 좋지만 이번 작품은 전작들보다는 평범한 수준인 것 같다. 범인이 특정된다는 점이 이 각본과 요시다가 장기를 발휘할 수 있는 세계가 엇갈리는 지점이다. 키리시마는 끝까지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해도 별 볼일 없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래야 미스터리한 세계가 한 곳으로 처분되지 않는다.

 맨 처음 종이달을 본 것은 일본판 나를 찾아줘라는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 나를 찾아줘가 좀 재밌었나. 중반까지는 흔한 일본식 도덕극이라고 생각했는데 후반부에 나를 찾아줘를 뛰어 넘어버려서 그때부터 요시다 다이하치에 대해 궁금해졌고 키리시마도 찾아 봤다. 아름다운 별까지 세 편을 보며 아주 감각적이라고 느껴서 나이가 많아도 마흔 언저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찾아 보니 63년생이다. 소닉 유스풍 펑크 음악이나 크레딧 내려올 때 쓰인 닉 케이브 곡도 한때 좋아하던 것들이라 친근감이 든다. 요시다도 양의 나무 결말을 지어놓고 맘에 좀 걸렸던 모양이다. death is not the end, 죽음이 끝이 아니라니. 죽은 동물을 묻은 봉분 위로 싹이 돋고, 노로로 대가리를 바다에서 건져내는 것으로는 장르를 상쇄하는 데 충분치 않다고 여겨 넣은 노래일 것이다.



 닉 케이브도 명곡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