퀸 영화 아직도 인기데

 싱어롱 상영이라는 거 좋은 아이디어 같긴 한데 한국인들이 극장에 옹기종기 모여 7080 위 아 더 챔피언 따라하는 걸 상상하면 명량 대흥행의 반복,

 탑승객들이 선상에서 애타게 선장을 부르는 외침이 들린다.

 배가 몹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본 영화들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그 사이에 아사코1&2를 다시 봐서 그것부터 쓴다.

 히치콕의 현기증에 비유하는 찬사에 대해선 뭐라고 덧붙일 말이 없다.

 난 히치콕을 그리 좋아하는 편도 아니고 현기증을 최근 2년... 3년 안에 다시 본 적이 있는데 그때 영화가 사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악한 게 매력이라고 하면 역시 할말 없다.

 이번에 아사코 다시 보면서 찜찜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좀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오카자키가 술상을 부술듯 두들겨 앞 씬을 깨며 등장하고 나서 어정쩡하게 청춘물 쓰키다시로 활용되더니 마지막에 육체가 아예 마비된 채로 등장하는 게 처음에 볼 땐 당혹스러웠던 것 같다. 아사코와 료헤이가 사랑 놀음을 하고 있을 때 그 주변인들은 어떻게 보면 훨씬 중대해 보이는 일들을 겪었다. 당장 마야만 해도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다. 하루요는 성형하고 결혼했고 싱가포르에 있었다가 도쿄로 왔다. 오카자키는 그렇게 됐고, 어쩌면 그 모든 일이 포함됐을지도 모르는 도호쿠 대지진이 있었다. 영화가 두 번에 걸쳐 시간을 훌쩍 뛰어넘은 것은 지진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져 재난 이후가 어떻게 변했는지 바라보기 위한 이동이었을 것이다.

 아사코는?

 아사코도 오사카에서 도쿄로 왔지만 다시 바쿠의 얼굴을 만났고 같은 작가의 사진전을 보러 간다. 대체 아사코는 어떤 사람이었지?

 아사코에게 복원이란 무엇일까?

 당장 답할 수 없는 성급한 질문 같으니 미뤄두자.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쿠시하시가 아사코와 마야가 같이 사는 집에서 체호프에 관해 떠드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마치 지금껏 숨겨져 있던 괴룃줄이 갑자기 휙 당겨진 것 같다.

 아니면 상대 진영에서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어디선가 돌연 수비수가 나타나 논스톱으로 차버린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렇게 느꼈냐면 다른 등장 인물들은 처음부터 아사코와 바쿠/료헤이를 위한 데코레이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장면에선 황당하게도 아사코와 료헤이 대신 마야와 쿠시하시가 주인공처럼 보인다.

 이 점을 좀 더 분명히 봐야 할 것 같다.

 마야와 쿠시하시는 아사코와 료헤이 커플을 위한 뻔한 쓰키다시로 전락하지 않는 동시에 둘의 영역을 지켜주고 강화해 준다.

 그러니까 이때 수비수가 논스톱으로 찬 공은 슛처럼 날카로워 보이지만 엄밀히는 도움이다.

 왜 이런 게 필요했을까.

 넷이 모이기 전 셋이었던 장면, 마야, 아사코, 료헤이가 사진전을 보고 아사코가 갑자기 떠나 마야와 료헤이만 남는다.

 에릭 로메르, 우디 앨런, 홍상수라면 이런 우연을 결코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엇갈리는 사랑의 작대기, 거듭되는 자리 바꿈이야말로 영화의 백미일 테니까.

 마야와 료헤이는 처음부터 서로에 대해 아주 좋은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연애 상대로 대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분명히 하려는듯 남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한다.

 마야의 말에 따르면, 아사코가 다른 데를 보고 있을 때 료헤이가 아사코를 보는 눈빛에 마야가 설렌다고 한다.

 마야는 로메르, 앨런, 홍상수가 노는 진창에 들어가지 않은 채 지닐 수 있는 가장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수비수는 지금 엄청난 감각의 위치 선정 능력과 순발력, 정확성을 과시하면서도 골대가 뭔지 모르는 것처럼 절제하고 있다.

 여기에 오카자키가 이상하게 활용된 이유도 함께 있는 것 같다.

 불꽃 튀는 첫 입맞춤은 환상적으로 찍혔고, 그 환상은 말도 안 된다며 튀어나온 오카자키와 역시 뜬금없이 소환된 하루요가 앉은 4인용 테이블에서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으나 그 인정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클럽에서 외부인이 끼여들어 질서를 어지럽히려 하자 바쿠는 그를 걷어차 축출하고 아사코와 결합하려 하지만 갑자기 하루요가 아사코를 가로채 바쿠는 오카자키와, 아사코는 하루요와 짝을 이룬다.

 아사코, 저 남자와 사귀지 마. 저런 남자는 너를 울릴 거야.

 아사코가 혼자 자는 방에 들어오는 오카자키의 모습은, 으레 위협적이어야 할 외간남자가 아닌 취한 요정, 바보처럼 보인다.

 그는 빵을 사러 간 바쿠가 밤새 돌아오지 않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런 일은 흔하다고 한다. 곧 바쿠가 돌아와 아사코와 포옹할 때 오카자키는 화분에 물을 주며 그 둘의 사랑을 인정하는 자리에 있다. 그가 인정하는 사랑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돌아오면 되니까 기약없이 혼자 기다리는 사랑.

 그가 나중에 거의 황당할 지경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은 이때 평면적으로 소비된 데 대한 반발이자 그 평면이 인정한 사랑에 대한 고발이지만 여전히 아사코의 사랑을 도울 뿐 위협하지 않는다.

 바쿠라는 캐릭터의 속도,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출몰 반경 따위를 고려할 때 그의 사랑은 어떤 안정된 체계 속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대신 현실로부터 한 발짝 붕 뜬 환상을 선사하는 것 같다. 아사코와 바쿠가 오토바이를 타다 사고 나는 장면은 누가 죽었다고 해도 될 것 같은 불안한 분위기로 편집돼 있는데 그들은 마치 크로넨버그 크래쉬에서처럼 사고 한가운데서 환상적인 사랑을 확인한다. 마루에 누워서 방금 떠난 바쿠를 그리는 아사코의 황홀경은 나중에 료헤이 등에 올라타 마사지를 해 주는 몸짓과 허공/지상의 대구를 이룬다. 좋다(Ⅰ) & 좋다(Ⅱ)

 둘은 달랐던 것이다.

 정리하자면 여기엔 두 가지 복원이 있는데, 하나는 사회적 관계, 일자리, 주거지 따위 환경에 자리잡는 것이고, 다른 하는 일탈의 기쁨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모두 전자의 성립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더러운 물이 불어났다는 료헤이의 평가에 그래도 아름답다는 말을 덧붙인 아사코의 새로운 태도가 의미하는 복원은 복원 불가능을 포함하고 있는 이성적인 사랑이다. 영원히 완전한 믿음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겠다는 태도는 매우 성숙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사코의 태도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순간, 뭔가 거래된 느낌이다. 예전에 한쪽 눈을 감으세요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말 그대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선 한쪽 눈을 감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영화 마지막 씬에선 두 사람이 강과 카메라를 향해 나란히 네 개의 눈을 뜨고 있는데 서로의 흠결을 다 드러내놓고 비상구 없는 세상을 함께하자는 결의 같다. 재난을 이겨내야 하는 일본인의 초상이 아사코에 투사되면서 청춘의 연애는 혈연 관계처럼 어쩐지 무거운 짐이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사코가 왜 마음을 바꿨는지 따져보자.

 더 만날 수 없다고 료헤이에게 전화한 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사코가 돌아와, 처음 바쿠가 아사코에게 다가왔던 것처럼 료헤이에게 다가갔을까.

 또 아사코는 모든 걸 버린 채 바쿠를 따라갔다가 왜 또 더 못 간다고 변덕을 부린 걸까.

 내 가설은 이렇다.

 이것은 아사코(Ⅰ)와 바쿠가 오타바이 사고를 당한 일의 반복이고, 이제 아사코(Ⅱ)는 거기서 로맨틱한 환상보다 죽음을 본다.

 지진이 났을 때, 그러니까 세상이 무너지려고 할 때 아사코는 료헤이(마침 땅을 걷고 있던 남자)와 함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바쿠가 같이 둑에 올라가 바다를 보자고 한 제안을 거절하고 혼자 바다, 시선/세계의 끝을 마주한 아사코의 클로스업은 그 현실을 똑바로 지각하는 이의 얼굴이다.

 의존하지 않고 책임 지면서 사랑한다니 불패의 논리다.

 로봇 같은 아사코가 무섭다.

 이 영화에 내가 일말의 희망처럼 품고 있는 것은 네코-아사코,

 아사코의 운명에 동일시되는 고양이의 속성이다.

 진탄은 잃어버린 줄 알았지만 내내 료헤이의 집에 있었던 집고양이였다.

 하지만 정말 집고양이라는 게 따로 있나?

 언제든지 길고양이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