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리스트에 언급되는 델 토로, 이냐리투, 쿠아론 영화에 별 애정은 없다.

 로마는 무척 잘 만든 영화고 어떤 면에서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좀 더 근본적인 태도에서 (특별히 뒤의 두 연출가에게 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로마는 쿠아론 영화 중에 나은 편이다.

 나는 칠드런 오브 멘이 대단한 걸작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칭송하는 그런 걸작이 어딘가 진짜 있어서 마치 그걸 누가 모작한 결과가 그 영화 같다.

 그래비티, 버드맨, 레버넌트 모두 마찬가지다.

 (말하고 보니 중남미 삼총사라는 이유로 델 토로까지 묶을 이유는 없었던 것 같다

 ... 게다가 설사 못 만들었다 하더라도 델 토로 영화에 어떤 애정을 느낀다고 번복해야겠다)

 작년에 본 루크레치아 마르텔의 자마가 내겐 중남미 최고 걸작이었다.
 중남미 빼도 될 정도로.
 오늘 레토를 봤는데 흑백이라는 점 때문인지 자연스레 로마와 비교하게 됐다.
 내가 영화제나 시상식 심사위원이라면 로마의 완성도와 야심을 레토의 자유로움보다 우위에 둘지도 모르겠지만 직감은 레토의 태도에 훨씬 끌린다.

 레토란 말이 여름이라는 걸 알게된 장면에서 벌써 이 영화에 반했다.

 해변을 거닐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 젊은이들이 화면에 등장했다 사라지는 리듬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몸들과 햇볕, 풍광이 어울어지는 자연스러움은 감동적이다.

 싸이코 킬러가 나올 때는 처음에 깔깔대며 웃다가 어느새 흑흑 울었다.

 자신을 가짜라고 거듭 부연하는 불사의 환영이면서도 왜 총을 맞고 벽에 피를 묻히는 몸으로 존재해야 하나.

 거친 애니메이션이 덧칠된 장면은, 어디가 어떻게 접붙여졌는지 이음새도 알아채기 힘든 로마의 특수효과와 비교해 그 화풍을 확연히 드러낸다.

 어쩌면 이게 러시아의 예술가들에게 상속되는 나그네 영혼일지도 모르겠다.

 솔라리스나 잠입자 같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에서 찻잔이나 주전자 따위가 탁자 위에 비를 맞으며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장면은

 쿠아론이나 이냐리투가 딱 떨어지는 황금비를 향해 화면 내 모든 요소를 배열하는 것과 달리

 수많은 가능성을 품은 동시에 냉혹한 세계에 그대로 노출돼 있고, 타르코프스키는 거기에 뭔가 오길 기다린다.

 소쿠로프는 인위적인 마술을 제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인위적으로 대놓고 화면을 망친다.

 가령, 러시아 방주에서 정사진으로서 아름다운 순간 네 군데 이상을 꼽을 수 있나?

 많아야 세 군데다.

 세상에서 가장 큰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전통적으로 예쁜 구도를 다 망쳤는데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냈다.

 레토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태도도 완결되지 않는 세계를 떠도는 나그네의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