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친구들 또 끄적끄적 써본다


무의식속에 있는 무서운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안좋고 힘든거만 있는거 같은데 그런거 왜 보려고 하냐 이런 생각도 들 것 같은데


수행해서 좋은것은 얼마나 좋으냐면 

몇천년을 온갖 고생 해가며, 있는지 없는지 확신도 못하면서 찾아헤멘 것을 드디어 찾아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야. 

고아로 가난하고 비천하게 평생 살다가 날 아주 사랑하는 엄마 아빠가 있었네? 하는걸 깨닫게 되는듯한 기분이지.

절벽에 매달려서 이거 놓으면 죽는다고 악을 쓰다가, 막상 놓았더니 바로 조금 발밑에 땅이 있었네? 하는 기분이고.


세 가지 예시를 들었는데 이런것들은 수행 극초반에 느끼는 느낌이고, 수행이 깊어졌을때의 느낌들은 말로 형언할 수 없어. 

그나마 비슷하게 말해 보자면 

존재하는 모든 게 날 사랑하고, 날 경배하고 있는걸 알게 돼. 왜냐면 내가 그들에게 생명을 주었기 때문이지.

모든 게 살아있고, 어린이 만화나 동화 속 세계처럼 자신의 생명의 기쁨을 노래하면서 내게 고마워하지. 


근데 그런 좋은거 이야기 해서 실질적으로 뭐가 도움이 되겠어? 

말이라는 게 정확한 게 아닌데. 오해하기 딱 좋지. 미친 소리같이 들리지 않음 다행이고.

그리고 나도 아직 갈길이 멀기에 늘 그안에 있지도 않고 휩쓸리기도 하고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뭐 그래.


대부분의 영성관련 책이나 가르침들이

진짜 좋은건 이야기 하지도 않고 애매하게 고요한 상태만 이야기하고 

진짜 해결해야 할것은 아예 외면하고 이야기해 주지 않기 때문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해결도 할 수 있을거아냐 그래서 해결해야 할 '무서운'것들이 뭐가 있는지 위주로 이야기를 한다.


당장 해결하지 못해도 그런게 있다고 알고 살면 조금씩 인식 안에 보이기 시작하거든

보이고 뭔지 알아야 해결할 마음도 먹게 되고 언젠가는 벗어나고 싶다고 여기게 되니까.


무의식 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갈망에 대해 이야기를 할건데

죽음이라는 건 이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의 기본 셋팅값이라고 비유해서 말한 적 있지? 

신의 세계는 생명의 세계라 죽음이라는 게 없어. 신의 세계의 빛은 파동빛이 아니야. 

파동은 이쪽 갔다가 저쪽 갔다가 이거였다가 저거였다가 하는건데 신의세계에는 그런게 없어.

그냥 완벽함만 있을 뿐이야.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완벽함.


보통 사람도 이걸 살면서 경험해볼 수 있는데,

감동 받을때 생각해봐. 감동도 어떨때는 작지만 어떨때는 인생을 바꿀만큼 크지?


감동을 느끼는 그 순간 잠시나마 시간이 멈추는 듯하고, 찰나지만 완벽한 순간을 경험하고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혼자가 아닌 것 같은, 함께인 느낌이 들고, 안심되며, 

저사람을 위해 나도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살아있기를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들잖아?

내 말은 감동이 좀 깊을 때 말이야? 사람에 따라 감동을 거의 못느끼는 사람도 있더라고.


이 감동의 순간이, 마음이 신의 세계에 존재함을 기억해내게 되는 순간이야. 

실은 원래 우리는 늘 신의 세계에 있거든, 신의 세상 밖에 있다는건 우리의 착각이야.

근데 우리의 지각을 흐리는 안개구름같은 파동에너지가 뭉게뭉게 우리의 지각을 가리고 있는데 

그 파동에너지가 세상의 사람이나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이는거야, 


이 뭉게뭉게 구름같은 파동에너지 덩어리는 우리의 상상일 뿐이기 때문에 

(뭉게뭉게는 비유일뿐이고 실제로는 따가운 전기신호로 느껴짐)

그 너머를 보려고 하면 볼 수 있어, 하지만 그 구름덩어리는 두려움의 산물이기 때문에

두려움 너머를 보는 것을 두려운 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보지 않으려고 하는거야.


감동을 받을 때는 자신의 마음이 그것을 두려운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그 너머를 보게 되고, 마음은 결합하는 특성이 있기에

신의 세계를 본 나의 마음은 전체의 신의 세계와 결합하여 자기가 누구였는지, 

신의 세계에 있는걸 알고있던 그때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일시적이나마 체험하는거야.


따라서 감동을 자꾸 받으려고 의식적으로 감동적인 이야기나 영상을 찾아보는건 수행에 도움이 돼.

그리고 수행을 해서 마음의 파동에너지가 옅어지면 시도 때도 없이 감동을 받게 되고

감동이 조금 더 깊어지면 불교에서 말하는 삼마디 혹은 사마디? 라고 하는 순간들을 체험하게 되는거야.

이런 체험들도 깊이가 있는데, 그게 깊어지고 자주 오면서 생명의 실체를 기억해내게 되는거지.


자 이게 좋은 이야기를 했으니 무서운 이야기(?) 도 좀 해보자.


무의식을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죽음을 갈구하는 마음이야.

죽음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죽음을 바라며, 상대에게도 죽음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야.


죽음은 소멸에 대한 믿음이거든, 마음은 결합하고 소통하는 전체성의 특성이 있는데

그 마음을 부인하고 혼자가 되어 결합하지 않고 소통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상한 고집이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며, 이 죽음을 주고 받는 것은

'신을 배반하고 나혼자 몰래 만들어낸' 이 세상에서 

나를 신으로 만들어주고 내가 버린 신의 무능함을 상징하는 것이 되지.

따라서 죽음을 갈구함은 곧 신에 대한 두려움이며, 두려운 신에게 결코 돌아가지 않으려는 의지를 뜻해.


좀 어렵게 느껴질지 모르겠는데 간단하게 말해보면

네가 어떤 좋은 친구를 배신했다고 믿어, 막상 그 친구는 네가 한 나쁜행동이나 말들을 장난이라고 여겨서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친구에겐 여전히 네가 좋은 친구야.

하지만 넌 그 친구를 배신했다고 믿기에, 죄책감을 갖게 되고, 

다시는 그 친구 주변에 얼씬거리지 않음은 물론, 그 친구를 아는 사람에게서도 종적을 감추려고 하는거지.


그런 자신이 싫지만 친구가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을거라고 굳게 믿어서, 

살면서 계속 자신을 비난하면서 같은 행동을 되풀이 하게 되어서

영원히 친구 주변에는 가지 못하고 두려워서 계속 피하면서, 친구에 대해 좋았던 기억은 거의 잊어버리고 

친구를 떠올리면 두려운 마음만 들기에 친구는 마음속에서 두려운 존재가 되었고, 

혹시라도 그 친구가 다가오지 못할만한 나쁜 짓을 하면서 살게 되는거지.  


나쁜 짓을 하면서 살게 되다 보니, 양심도 사라지고, 그 친구때문에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다고

아예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멀쩡하게 잘 살고 있을텐데 하고 비난하면서

점점 더 폐쇄적이 되고 마음속에 친구를 미워하게 되는거지.


물론 이 비유에서 친구는 신이야. 네 마음속에 신이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고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고 그럴때마다 항상 나를 도와준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면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거야.

신은 거리낄 것이 없기에 너를 거부할 일도 없으니, 그 두려움은 네가 신을 거부했기에 있는거지.

무한한 생명을 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완벽한 소통과 전지전능함을 표현할 다른 표현이 없기에 그렇게 말할 뿐이지

신이 인격을 가지거나 개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


글이 길다 또 끊어보자.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