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혈압을 상승시키고
피에 독성을 만들어낸다.
반면 사랑은?
사랑도 흥분되면 혈압이 어느정도는 상승할 수 있겠으나, 느낌이 완전 다르다.
차이점은 뭘까.
스트레스가 아닐까?
분노가 발산되어 상대가 파괴된다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신이나면서, 어쩌면 오히려 건강해질지도 모른다.
스트레스가 해소되니까.
그러나 분노가 찼는데 아무런 해결이 안되고 분노의 대상이 계속 눈에 보이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피의 독성은 그 스트레스가 만드는게 아닐까?
반면 심장이 떨리는 사랑은 비록 약간 흥분하여 혈압이 상승하더라도 스트레스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달리 말하면,
분노도 스트레스유발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취한다면, 인체에 해가 없지않을까?
그럼 화두이다.
어떻게 스트레스없이 분노를 가질 수 있을까?
오히려 희열이 느껴지는 분노.
이거는 상대를 파괴하지 않는이상 불가능할까?
상대를 파괴해야만 희열과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면 분노라는 감정에너지는 너무나도 쓸모가 없다.
방편이 필요하다.
망상과 합치던가 아니면, 분노의 대상을 정하지 말고 그냥 예술로 승화시키던가.
아니면 어떤 리추얼로 풀어내던가
태초의 의지에서 사랑과 분노는 어떻게 분열되었나. 색계의 존재들은 가장 순수한 분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와 다름에 대한 진노함이라 했다. 나와 비슷한지 다른지에 따른 분별. 다른것은 필연적으로 내 속성의 위협을 의미한다. 고통이 수반될 수 밖에 없다. 분노는 그 탄생자체부터 고통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 상대를 파괴하지 못하면 나에게 고통이 오는 개념이다.
육신은 철저하게 자신의 유지를 위해 설계되었으므로 . 분노와 함께오는 필연적인 고통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오직 내 분노로 상대가 파괴되는 것을 확인해야만 스트레스가 없다.
육신없는 존재들에게는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육신은 기본적으로 분노같은 감정하고는 상극이다.
이것을 쓰려면,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꿔야한다. 분노가 거꾸로 에너지인 존재는. 분노 그 자신 뿐이다. 나라는 존재가 분노를 쥔게 아니라 내 정체성이 분노 자체가 되어 , 타인들의 분노에 즐거워해야한다.
오니가 나에게 알려준 것은 . 그것같다. 이 힘을 쓰려면. 나는 내 정체성을 버리고 분노 스스로가 정체성인 것에 씌여야 한다.
내가 갈망하던 죽음의 에너지 또한 마찬가지다. 딜레마가 있는 힘. 그러나 정체성을 죽음 그자체로 바꾸어 거기에 씌이면. 죽음현상의 증폭이 오히려 나의 생명에너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