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변화는 고통의 연대기를 끊어내고 행복한 진실 위의 천진성을 꺼내는데 중심이 있다. 


인간들은 이 단순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금강경의 사구게를 게송해주는 것이 수마산만한 칠보의 덩어리를 보시하는 것보다 더 복덕이 큰 것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진실위에서 천진성의 유희로서 살아가는 것.

본질이 바로 서서 육의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다. 

여기엔 법칙도 자격도 도구도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인간은 알지 못한다. 돌멩이 하나에 깃든 그 행복을 알지 못한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12월초, 산란하고 권태로운 마음으로 바닷가에 갔다.

한 가족이 바닷가에 서있었는데, 

밀려드는 파도를 보고 꺄르르 웃는 두 명의 남매와 

뒤에서 심드렁하게 휴대폰만 보고 서있는 부부를 보았지.


아이 둘은 파도를 따라 앞으로 갔다가 다시 파도를 피하며 백사장에서 그 포말이 주는 긴장감에 발을 구르며 세상 천지를 울리는 웃음 소리를 만들었지만

자신의 자식들의 행복이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화면안의 세상에 빠져 있는 그 두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풍경을 놓치고 있었다.


달리 비극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서 매순간 생하였다가 파스스 산란하여 갈곳 없이 흩어지는 유희의 파편들이 비극이었다.


어째서 우리는 다 잊고 사는 가? 산천은 아직 있는데. 어째서 그 웃음을 예사로 넘기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