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항상 내가 잠든 뒤에 집에 들어왔어.


너무 어렸던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아빠는 사실 괴물이 아닐까.


흉측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내가 잠든 시간에만 다닌 게 아닐까.


그날, 나는 잠에 들지 않고 기다렸어.


달님이 집안에 얼굴을 내비치던 밤이었어.


시계가 째깍거리며 12시를 가리켰지.


나는 계단에 서서 집으로 들어오는 아빠랑 눈이 마주치고 말았어.


아빠는 옷에 빨간 립스틱이 잔뜩 묻어있었어.


아빠는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나를 안심시키고 잠을 재워줬지.


나는 아빠가 괴물이 아니란 사실에 안심했어.


그 뒤에는 한 번도 아빠가 퇴근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어.


엄마는 언제나 내가 잠에 들 때까지 오르골을 들려줬으니까.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그날의 일이 떠올라.


아빠의 옷에 묻어있던 빨간 립스틱들


그날 어렸던 나는 그것을 립스틱이라 생각했던 게 아닐까?


만약 정말 립스틱이었다면 그것은 뭐였을까?


아빠가 바람을 피운 걸까?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커다란 걸까?


대체 이 많은 돈은 어디서 벌어오는 걸까?


어쩌면 립스틱이 아니라 피가 아니었을까?


아빠는 사람을 죽였던 게 아니었을까?


확인해 보고 싶었던 마음에 몰래 자는 척을 한 적이 있었어.


눈을 떴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컴컴한 어둠 속에서 엄마는 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나는 다시 잠에 들 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속의 의심은 커져갔어.


겉으론 관심 없는척해도 공부도 운동도 손에 잡히지 않았어.


그게 뭐가 됐든지 잘 할 수가 없었어.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


나는 점점 더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일이 잦아젔어.


엄마가 열이 많이 나던 날 밤이었어.


기회는 오늘 밖에 없었어.


나는 밤에 몰래 방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어.


달님이 푸르스름한 얼굴을 집안 가득 내비치던 밤이었어.


째깍 거리던 시곗 소리보다 내 심장이 더 크게 쿵쾅거렸어.


아빠가 들어왔어.


하얀 와이셔츠에 빨간 립스틱을 잔뜩 묻히고서는


나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어.


아빠는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내 나에게 다가와 나를 꼭 안아줬어.


나는 이제 내가 그날 본 것을 알겠어.


그리고 아빠가 언제나 내 편이란 것도 알았어.


이제 나만 잘하면 되는 거야.


아빠에 옷에 묻어있던 건 빨간 립스틱일 뿐이었으니까.


아빠는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어.


아빠는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어.


나만 잘하면 되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