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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첫 출근일. 단순 사무 및 서류 보조,

비서 및 상담 실장 역할을 맡는 작은 변호사 사무실에

취업하게 된 나는 출근시각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

사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이내 안에서는 상당히 파리한 행색의 40대 여성이 문을

열어주었고, 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잠시 후

탕비실에 들어간 그녀가 나와서 내게 차를 한 잔 권하고는

워드로 입력된 종이 몇장을 건내준 뒤 꾸벅 인사를 하고는

말 없이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야.. 전임자인가? 그건 그렇고 정말 불친절하네. 인수인계를

직접 안해주고 그냥 이렇게 종이나 몇장 던져주고 말야...'


뭐 어쩌겠나. 어쨌건 이제 사무실 직원이 아닌 그녀에게

그 이상의 친절함을 바라는 것도 무리. 그나마 서류라도

남겨둔 것에 감사해야 할 따름이었다.


호로록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그녀가 건내준 서류를

천천히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이 어디 사시는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썩 괜찮은 근무 조건과 제법 높은 보수에 혹해서

오시게 된 분일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이 변호사 사무실에서

3달을 일했고,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기에 떠나게 되었습니다.


다만 직접적인 언급을 할 시에는 당신께서 취업을 거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이렇게나마 문서로 남기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희 사무실의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입니다.

더러 업무량이 많아 야근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되도록이면 아근은 지양하고자 하는 것이 김근석 변호사님의 방침입니다.


실장님께서 하셔야 하는 일들은 크게 3가지로 서류 정리, 변호 의뢰

상담 및 전화 응대, 송무 및 소송 보조 업무 입니다.


각 업무에 있어서 주의하셔야 될 리스트를 간추렸으니, 해당 사항을

반드시 숙지하시어 업무에 지장이 없길 바라겠습니다.



1. 출근 직후에는 우편함에서 사무실로 온 우편물들을 받아서

사무실로 가져와 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사님의 손을 거치기 전에 한 번씩 밀봉된 우편물을 열람하시되

종종 검은색 봉투에 주소지가 적혀있지 않고 자주빛의 封 이라는 인장이

찍혀있는 봉투의 경우, 절대 열람을 금지합니다. 참고로 우리 사무실의

주된 소송 분야로는 흉악 범죄 형사 소송이며 우리의 의뢰인이

언제나 피해자만 있지 않으며, 종족, 성별, 연령,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언제나 참고하셔야 합니다. 저희와 같은 범인(凡人)의 선에서

손대지 말아야 하는 부분에서는 가감없이 손을 떼시는 편이 실장님께서

이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서류 정리를 하던 도중 사람의 것이 아닌, 마치 물갈퀴와도 같은 형태의

손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있는 서류가 있다면 그 즉시 김근석 변호사님께

전화해서 '오늘은 손님을 받을 수 없는 선약이 있는 날입니다.' 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후 변호사님께서는 실장님께 수고했다며 퇴근하라고 하면, 토달지 마시고

언제가 됐건 간에 바로 사무실에서 나와서 곧장 집으로 가신 뒤 그날은 외출을 삼가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합니다. 이미 '그것' 의 사념이 투사된 종이와 접촉을

했기에 얼마든지 엮일 수 있으므로 집에 있는 모든 불을 끈 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최대한 조용히 지내야 합니다. 물론 '그것' 또한 의뢰인인 이상 변호사 사무실의

인력을 의도적으로 해코지할 일은 없겠으나, '그것'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우리에게는 크나큰 피해가 갈 수 있기에, 최대한 접촉을 끊는 것 많이 가장 좋은 해결책 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걸어가려 해도 바닥에 있는 개미나 그보다 더 작은 미물들을 밟고

지나가는 것이 불가항력이듯이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3. 사건 의뢰 수락의 경우, 일정을 잡고 면담을 한 뒤에 변호사님께서 여부를 결정합니다.

만약 갑자기 전화를 통해서 무턱대고 변호 의뢰를 수락해 달라며 부추기는 고객이 있다면


'변호 의뢰는 유선상으로는 수락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씀해주십시오.


일반적인 고객이라면 알았다고 하거나, 다른 곳을 알아보거나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김근석 변호사님께 이미 통화를 마쳤다며

수락해달라고 요구를 한다면 바로 전화를 끊어주셔야 합니다.


변호사님께서는 변호 의뢰에 관련하여 전화가 오시면 일절 사무실을 통해 일정을

잡으라고 말씀하시지, 개인적으로 의뢰를 수락하시지 않습니다. 이는 변고가 없으므로

상대방이 어떠한 감언이설로 실장님을 유혹하더라도 넘어가셔선 안됩니다.



4. 걸려오는 전화 중에서는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고객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끊어버리거나, '해당 건은 직접 방문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면 되지만 몇 가지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겠습니다.



4-1. 1997년 11일 장진래 씨 토막 살인사건에 대한 의뢰 요청


해당 사건을 언급하는 이는 약 6~70대 할머니의 목소리를 하고 있으며

귀에 거슬리는 울음소리를 내며

'여러 변호사 사무실에 상담을 받아 봤는데 아무도 의뢰를 수락하지 않는다.'

'우리 진래가 실종되었는데 옆집 쌀집 아저씨가 수상하여 고발하고 싶다.'

라는 말과 함께 제발 의뢰를 받아주실 것을 간곡히 간청할 것입니다.


행여 할머니의 울음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 의뢰를 수락하겠다고 말하고 싶다는

충동이 참지 못할 만큼 들겠지만, 절대로 수락한다고 해서는 안됩니다.


'할머니. 진래는 며칠 뒤에 만나실 수 있다고 서에서 연락 왔으니 걱정 마세요.'


라고 말씀을 드린 뒤 할머니의 넋두리를 끝날 때까지 받아주신 뒤 끊어주시면 됩니다.


해당 사건에 나오는 장진래 군은 그녀에게 온 몸이 찢겨져 토막 살인 당했으며,

이후 할머니의 행방이 묘연해져 영구미제사건으로 남은 사건 입니다.


최대한 할머니의 넋두리를 진중하게 들어주고 맞장구도 쳐주셔야 합니다.

만일 조금이라도 그녀의 넋두리에 건성으로 대답했다가는 전전 실장이였던 장진래씨의

절차를 유사하게 밟게 될 것이고, 이후로 걸려오는 전화에서 할머니의 아들 이름이

실장님으로 바뀔 것입니다.



4-2. 스토킹을 당하는 여성


허스키한 톤의 음울한 목소리를 가진 여성이 전화를 해서는 전화를 받자마자

한숨을 푹 쉬고는 '제 일상이 스토킹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전화도

도청되고 있어요.' 라면서 자신을 도와달라 요구할 것입니다.


진정을 시키신 뒤 내선번호 돌려주기 버튼을 누른 후 2101* 을 누르신 뒤

전화기를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이쪽'에서 담당할 수 있는 소관이 아니며


이후 내선번호가 연결 된 사무실 벽면 너머에서 전화기가 몇 번 울리다가

이내 수신이 끊길 것입니다. 이는 해당 담당자가 벽면 너머에서 그녀와

상담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오니, 김근석 변호사님께

'스토킹 가해로 매번 의뢰 해오시는 여성분께서 상담 받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해주시고 마무리해주시면 됩니다.



4-3. 이 세상 어느 곳의 언어도 아닌 듯한 말을 하는 자.


우선 해당 전화가 걸려온 뒤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해서

본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므로, 그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전화선을 한 번

뽑아보시길 바랍니다. 전화선을 뽑았음에도 목소리가 끊기지 않고 들린다면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그것'에게 전화가 온 듯 합니다. 전화를 받은 이상

'그것'이 만족하기 전까지는 전화기를 끊거나 사무실에서 나오더라도

'그것'의 속삭임은 실장님의 귀를 계속해서 맴돌 것입니다.


응접실에 가신 후 서랍 2번째 단에 있는 검은색 알약을 복용하신 뒤

안대로 눈을 가리고 이어플러그를 낀 뒤 응접실 구석에 있는 캐비넷에 들어가

몸을 숨겨주십시오.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소리를 죽이시고, 스멀스멀

몰려오는 공포와 광기에 최대한 잠식당하지 않게끔 저항하시길 바랍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김근석 변호사님께서 직접 안대와 이어플러그를

벗기고 캐비넷 안에서 꺼내주기 전까지는 반드시 이 상황을 유지해야만 합니다.



5. 사무실 청소를 하실 때 다른 곳은 자유로이 드나들며 청소를 진행하셔도

상관없지만, 김근석 변호사님의 책상에 있는 물건들 관리에는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큼지막한 크리스탈 안에 어느 여인의 두상이 그려진 장식품은


특히 사무실 내부에서 범인(凡人)이 있기에 적절한지에 대한 척도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물건이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이 장식품 속 여인의 형상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여인의 표정이 무표정하며 눈을 감고 있다 - 가장 기본적인 상태로 아무 이상 없음을

뜻합니다. 평소대로 업무를 진행하시길 바랍니다.



여인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 이는 2가지의 단계로 나뉩니다. 단순히 눈물을 흘릴 뿐이면

평소대로 업무를 진행해도 되나, 흘러내린 눈물이 장식품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벽에서 여성의 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한 환청이 느껴진다면 즉시 김근석 변호사님께 전화하여

'작신도에서 손님이 찾아온 듯 합니다.' 라고 알려드린 뒤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십시오.



옥상에 준비되어 있는 완강기를 이용해서 아래로 하강해주시기 바랍니다.

내려가는 동안 위에서 줄이 흔들리고 다시 올라오라고 타이르는 사무실 직원이나

김근석 변호사님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르지만, 전부 무시하시고 끝까지 내려가야 합니다.


만약 다시 올라가게 된다면 그 곳은 당신이 알던 건물의 옥상이 아닐 것입니다.


여인이 피눈물을 흘린다 - 해당 현상은 제가 근무했을 당시에는 일어났던 적이 없었고

일어나서도 안될 현상입니다. 만일 해당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간의 짧은 생에 대하여

겸허히 회상하는 시간을 가진 뒤 탕비실 뒤쪽 벽면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 주십시오.



여인이 싱글벙글 웃고 있다 - 제발 도망...쳐야 해..



변호사님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는 총 2대가 있습니다. 회색 전화기는 실장님의 책상에

있는 전화와 내선으로 연결된 전화입니다. 변호사님께서 부재중일 때 해당 전화기로

걸려오는 전화는 최대한 응대를 해주신 후 나중에 변호사님이 돌아오시면 보고를 드리면 됩니다.


오른쪽에 비치된 고동색 전화기는 평소에는 가동하지도 않지만, 문득 당신이 이 전화기를

들고 454-6995 라는 번호로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수도 있습니다.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전화를 거셨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적어도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가슴 속 품어 왔던 당신에게 상처를 줬으나 심판받지 못한 이들이 다소 강도 높은

심판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날 뿐입니다.


하지만 명심하십시오. 남을 저주하려면 무덤은 2개를 준비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값은 반드시 근시일 내에 지불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



마지막으로 변호사님의 책상 위에는 항상 사용하시는 만년필이 놓여져 있습니다.

드물게 이 만년필의 잉크가 새어나와 책상 전체를 검은 잉크로 물들이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신속히 책상 위의 잉크를 떠서 한모금 마셔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그 이후의 참상을 버틸 수 없으리라 사료됩니다.




6. 실장님께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닌, 김근석 변호사님을 만나러 왔다면서

만나게 해달라 요구를 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변호사님의 지인이나 단골 고객도 있지만, 이전 의뢰에

앙심을 품은 자들도 있기에 잘 구별해주시기 바랍니다.


6-1. 변호사님과의 만남을 허가해도 되는 이들


피부와 머리카락 등 온 몸이 회색인 장신의 여성


얼룩무늬 제복을 입은 퇴역 군인


양 팔에 이레즈미 문신을 박고 머리에 8바늘 정도 꿰멘 자국이 있는 안경을 쓴 남성



6-2. 변호사님과의 만남을 허가해선 안되는 이들


양갈래 머리를 땋고 백옥색 원피스를 입은 11세 정도로 보이는 여아


새카만 롱코트를 입었으며 중절모를 쓴 고풍스러워 보이는 백인 신사


아름다운 용모에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중성적인 이


안구가 온통 초록색을 띈 더벅머리 남학생 (특히 주의할 것)




인수인계에 대한 서류는 이상이며, 해당 서류에 나온 조항들을 지키며 근무를 한다면

실장님의 안전은 보장될 것입니다.


아. 그리고 아무리 일이 힘들고 하기 싫다 하더라도 절대로... 절대로!

중간에 도망가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음 근무자가 정해질 때까지는

좋든 싫든 이 업무를 해주셔야만 하며, 만약 무단으로 도망가게 될 시에는


당신의 근무지가 벽면 너머로 바뀌게 될 테니까요..


부디 실장님의 무사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