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눈물을 머금고 간단하게 쓰는 걸 양해해줘.


B. 일단 이 글에 제목을 붙이자면 <딜레마와 linéarité> 정도일까? 내가 한국어를 잘 몰라서 linéarité라고 프랑스어로 쓰는데 프랑스어 잘하는 사람 아니면 프랑스어 사전 있는 사람 이게 뭔지 한국어단어 뜻 좀 찾아보고 알려주셈;;; 나폴리탄 괴담 전반이 아니라, 그 중 "규칙서" 괴담에 대해 쓰는 글임.


C. 규칙서 괴담은 기본적으로 어떤 공간에서 살아남는 것을 전제로 씌여진 글임. 그 미친 공간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기에 괴이하게 뒤틀렸을 수도 있고.. 혹은 딱히 그런 사건 없이도 원래 그런 미친 공간일수도 있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은 "현세의/상식적인 규칙 따위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바로 이 규칙의 괴이함이 으스스함과 비일상성을 유발하는 거임.


예컨대 "소리내지 말고 계단을 오르세요"나 "건강을 위해 계단을 오르세요" 기본 에티켓이나 상식이기 때문에 전혀 으시시하지 않음. 그런데 "신발의 왼쪽과 오른쪽을 바꿔신고 계단을 오르세요?" 이건 매우 비일상적이지. 심지어 일상적인 규칙을 내세워도 이것은 일상이 아님임을 반드시 전제함. 예컨대 소망대교(라고 쓰고 ㅈ망대교라고 쓰는 미친 곳)의 규칙 중 하나는 "속도를 45-90km/h로 유지하세요"라고 다분히 일상적으로 보이는 규칙을 내세워놓고 이거 뒤에 덧붙임. "이것은 교통법규가 아닙니다" 라고 말이야. 아니면 대놓고 규칙이 매우 미친 경우도 있지. 몸에서 피를 내서 적셔야 하는 해남산 관리자 수칙 같은 거.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잖아. 그거는.


D.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규칙서 괴담의 경우, 창작자는 "일상적이지 않은" 규칙을 통해 미쳐버린 공간을 "꾸민다"고 할 수 있지.

평범한 지하철역이나 회사나 산도 일상적이지 않은 규칙이 등장할 떄 미쳐버리거든. 그렇게 괴이하게 꾸밀 수 있음.


규칙은 공간을 단순히 괴이하게 "꾸미는" 것 뿐만 아니라 이 공간의 과거의 역사 (예: 해동아파트에서는 10층 사는 혜진이가 죽었다) 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지. 10대 중반의 여자는 절대로 아파트에 충분한 주의 없이 들어가면 안된다거나, 10층엔 뭔가가 있다거나, 10층에 사는 할머니는 지금도 손녀 혜진이를 찾고 있다거나) 역시 규칙을 더함으로서 알려줄 수 있기 떄문에 규칙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공간은 더 많은 서사를 가지게 돼.


E. 하지만 이러한 꾸밈은 필연적으로 어떤 딜레마를 맞이하게 되지.


위 항목(D)의 결론대로라면 그러면 "와! 꾸밈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단 말인데

그게 아니란 말이야. 바로 이래서 제목에 딜레마라고 적어놓은 거야.


꾸밈과 서사가 많으면 규칙서의 규칙도 많겠지? 10개? 20개? 50개 넘을 수도 있겠네.

근데 말이야.... 규칙서는 기본적으로 규칙서야. 괴담이기 이전에 규칙서야. 규칙서의 탈을 쓴 괴담이라곤 하지만, 읽는 사람은 몰입해서 읽는단 말이야. 그래서 "괴담을 읽는다"고 생각하기 전에 (이 공간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상상하고 그 입장에 몰입해서) "규칙서를 읽는" 게 되는 거지. 그러기 때문에 이 규칙서는 암기까진 아니더라도 (이 종이를 들키지 않게 씹어 삼키십시오 뭐 이딴 극악한 조건이 붙어서 암기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긴함;;;) 적어도 "지킬 수 있어야" 한단 말이야. 그런데 너 50개의 규칙 다 외울 수 있어? 외우는 게 필요없다 치더라도 어떤 항목에 주의해야 할지 정도 다 이거할 수 있어? 나는 못 해. 극도의 긴장 상황에서 인간 기억력이 얼마나 휘발성이 높은데. 사실 규칙 5개만 되어도 버벅거린다고. ㅋㅋㅋ



F.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야. 기본적으로 우리는 "많은 규칙"으로 공간을 꾸미고 싶지만, "규칙서"라는 본질상 많은 규칙을 넣으면 절대로 몰입할 수 없어.


솔직히 니들 생각해봐. 어딜 가는데 규칙이 1. 파란 xx를 보면 yy초간 숨을 참으시오 2. 뒤를 보지 마시오 3.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올 시 zz하시오 4. 앞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려오는데 생선냄새가 나면 aa하시되, 아무 냄새도 나지 않으면 bb하시고, 꽃향기가 나면 cc하시오 .... 야.....니네 이거 다 기억해서 실행할 수 있냐? 난 못해. 몰입이 되냐? "안 해 안 한다고" 이런 말을 내뱉으면서 포기하겠지.

규칙서라는 건 기본적으로 인간이 따를 것을 (그것도 특별히 머리가 비상하거나 멘탈이 세거나 하지 않은 너, 나, 우리 같은) 전제한 글이며, 따라서 "인간은 한 번에 신경쓸 수 있는 화제가 한정되어 있다"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글이란 말이야. 그리고 바로 그런 규칙, 너 나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규칙이어야만 몰입할 수 있어.

너, 나 우리가 한 번에 기억하고 실행할 수 있는 규칙은 고작해야 서너개일걸.


U. 이 상황에서 많은 창작자들이 이 딜레마를 해결하는데, 바로 linéarité (프랑스어 사전 켜라...)를 의지해서 해결하더라.

한국말로는 정확히 뭐라고 번역해야할지 모르겠는데...아무튼 이 공간의 리네아리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으로 딜레마를 타파하는 경우가 많아.

이게 가장 잘 활용된 첫 번쨰 예시는 바로 나폴리탄갤러리 창작은 아닌... 외국에서 퍼온 "트럭운전사" 괴담이야. 0~10km구간에서는 xx하시오, 10km~20km 구간에서는 yy하시오, 20km~30km 구간에서는 zz 하시오 이런 식으로 공간을 하나의 긴~~~~ 줄line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분절>>을 해놨어.


그렇기 떄문에 지켜야 할 규칙은 많지만, 각 구간에서 신경써야 할 규칙은 하나 혹은 두 개로 극히 제한되지.


다시 말하자면, 지켜야 할 규칙은 많지만 (=정보량은 많아서 공간은 충분히 괴이하게 꾸며지고 서사도 부여되지만) "지금 이 순간" 신경써야 할 규칙은 한 두 개 정도가 다야. 10km~20km을 통과하고 나선 그 이전에 뭔 규칙이 있는지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다음 규칙에 집중할 수 있어. 각 구간에서 신경써야 할 규칙은 하나, 혹은 두 개고 나머지 규칙에는 신경꺼도 되는 구조라서, 머리 나쁜 사람이나 너, 나, 우리도 따라할 수 있기에 충분히 몰입 가능하다고.


Y. 이제 갤 내의 창작품에서 예를 들어보자. 소망대교도 마찬가지야. 트럭운전사 괴담처럼 KM별로 칼같은 분절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잘 보면 큰 분절이 보여. 톨게이트 구간~ 하얀 차/파란 비엠떠블유/트럭이 나타나는 구간~잼민이가 나타나는 구간~소망대교 붕괴의 환상이 보이는 구간 이렇게, 각 단계마다 규칙이 따로따로 있어. 한두개씩.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정보량이 많아도 "이걸 어케 다함;;;"이라는 한숨과 함께 몰입이 깨지는 일이 없는 거야. 각 단계별로는 한두개니까.


이 분절을 거리별로 나타낸 게 아니라 공간별로 잘 나타낸 또 다른 공간이 바로 "산 속의 저택" 괴담이야. 노인이 안내해준 공간에 따라 분기가 나뉘지. 2층 침실, 드레스룸, 화장실, 서재. 한 공간에 들어가면 다른 공간의 룰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바로 이 분절성이야. 그리고 지금 이 공간적 분절을 극한으로 활용하고 있는 게 현재 연재중인 "별곡호텔" 괴담이야. 시간순대로 라운지-> 로비-> etc 이런 식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는데 각 공간마다 따라야 하는 룰이 다르기 떄문에, 한 공간에 있으면 그 이전 공간의 룰이나 이후의 공간의 룰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 떄문에 정보량은 많은 채로 유지하면서 "인간은 신경쓸 수 있는 화제가 한정되어 있다"는 규칙서의 본질에 부합하거든.


이 분절은 거리/공간 뿐 아니라 시간으로도 나타날 수 있어. 소망대교와 세계관이 연결되는 아름드리화원에서는 xx시부터 xx시까지 해야 할 규칙, 그 다음 yy시부터 yy시까지 해야 할 규칙 이렇게 시간적으로 분절해놨지. 마찬가지로 내가 쓴 파란문유니버스 ("당장 이 건물에서 나가시기 바랍니다") 역시 시간순으로 분절해놨어. 나가라-> 건물 찾아라-> 들어가라-> 계단 올라라. 각 단계마다 규칙이 따로따로 있고.


E. 아무튼, 글을 요약하자면,

규칙이 많을수록 정보량이 올라가서 글이 재미있어지지만 규칙이 너무 많으면 규칙서로서의 의의를 잃어버려 읽는이가 몰입을 못하게 된다는 게 우리의 딜레마이며,

이는 전체적인 정보량은 보존하는 대신 "한 번에 지켜야 하는 규칙"을 몇 개로 제한하는, 공간적 및 시간적 분절을 활용함으로서 해결된 예가 많다는 거지...


Z. 읽어줘서 고마워. 그럼 이제 스크롤을 다시 맨 위로 올려서 제목을 읽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