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낡은 폐허.

지하수도같이 기분 나쁜 곳.

어둠이 깔려 앞이 보이질 않는다.

벽을 더듬어 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눈앞에는 두 버튼이 있다.

갈망과 포기.

나는 갈망하고 싶다.

왠지 모르겠지만 포기할 수 없다.

 

버튼을 누르려 하자

내 위로 검은 벌레가 후두둑 떨어진다.

검은 벌레는 내 살점을 파먹는다.

삶을 갈망하려면 이 정도의 아픔은 견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몸을 박박 긁었다.

살점과 함께 벌레가 떨어지도록 박박 긁었다.

 

벌레를 떨어뜨린 나는 갈망을 골랐다.

그러자 전방에 펼쳐진 필터.

필터는 검은색 벽이었다.

검은색 벽이 꿈틀댄다.

필터는 검은 벌레로 이루어진 것이다.


살기 위해선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검은 필터에 손을 넣었다.

살을 파먹고 뼈가 떨어지는 아픔에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팔을 빼냈다.

팔은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다시 팔을 넣었다.

너무 아프지만 견뎌야 한다.

머리를 넣었을 때 귀에 속삭이는 소리와

입안에 들어가는 벌레 때문에 나는 거의 혼절할 뻔했다.

몸통을 넣었을 때 심장을 파먹는 벌레 때문에

필터를 통과하지 못할뻔했다.


그렇지만 필터를 통과한 나는

빛을 향해 걷는다.


정신이 들었다.

처음부터 꿈을 꾸고 있던 건가.

그러나 내 몸이 움직이지 않고

내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차라리 포기 버튼을 누를 걸 후회했다.


이제야 기억난다.

도심 가운데로 떨어진 핵폭탄.

태양보다도 더 밝은 빛은 내 눈을 멀게 했다.

이어지는 폭풍에 나는 잔해에 깔렸고

살아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허우적대며 잔해에서 빠져 나왔다.


나를 반겨준 건 먹구름

검은 벌레가 아닌 검은 비였다.

검은 비를 맞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구조된 나는 온몸이 붕대로 휘감겨졌다.

떨어지는 살점을 하나라도 더 막기 위해

붕대로 몸을 칭칭 감았다.


의료진들은 치료를 목적으로 날 붕대로 감았지만

내 생각에 그들은 내 장례를 준비해준 것이다.

미라, 나는 붕대에 감겨 죽을 것이다.


살점이 뜯어지고 뼈가 분리되는 아픔에

나는 기절하고 깨어나기를 반복한다.


기절하면 나는 폐허에서 정신을 차린다.

내 앞에는 두 가지 버튼이 있다.

갈망과 포기.

사람의 의지는 강하다.

죽지 않고자 한다면 며칠은 더 살 수 있다.

그러나 방사능에 피폭된 내게 가망이 있는 걸까.


나는 갈망 버튼을 누른다.

한 가닥 희망이 있다면

누군가 나를 이 아픔에서 구해줬으면 좋겠다.


전방에 펼쳐지는 필터.

필터를 통과하면 깨어나고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면 죽는다.

모든 생명체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이 필터를 만난다.

나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 필터를 만나야 할까.